아빠, 천체관측 떠나요! -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천문 우주 여행
조상호 지음 / 가람기획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였던가 새벽에 시골 할머니댁에 내려가다가 우연히 창 밖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차창밖으로 그야말로 별이 쏟아질 듯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어린 시절 별자리에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별은 많지 않았기에 그저 가끔 밤하늘을 보며 '오늘은 날이 맑아서 별이 좀 보이네' 정도로 생각할 뿐 본격적으로 천체관측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나 천체관측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타겟은 청소년들이다. 하지만 청소년이 아니라 나같은 일반인들도 어차피 천체관측에 있어서는 초보자이기는 매한가지. 오히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성단, 성운 등의 개념을 공부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이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성단, 성운은 얼마만에 들어보는 명칭인지!) 청소년이 독자층이니만큼 이해하기 쉽게 호성이라는 아이가 천체관측을 시작하며 겪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이야기 식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망원경의 종류에서부터 시작해, 망원경 구입 방법 등을 설명하고, 이후 본격적인 천체관측의 단계로 넘어가기때문에 이왕이면 진짜 천체관측을 시작하려는 분들이 보시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굴절망원경이니 반사망원경이니 겉보기 시야니, 배율이니 다소 낯선 개념들이 쏟아지기때문에 초등학생 자녀를 두신 분들이 아이들과 함께 별을 보기 위해 이 책을 접한다면 다소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단순히 이런이런 별자리가 있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마추어 천체관측자들이 알아야 할 내용들이 담겨 있기에 이 책의 주인공인 호성이와 은하처럼 동아리 활동으로 천체관측을 하는 청소년들이나 천체관측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았다. 천체망원경은 부담되서 구입할 수 없지만 대신 천문대에 가서 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을 때만해도 사실 큰 관심은 없었던 책이었다. 그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권신아씨의 일러스트만 흘끔보고 글은 읽지 않고 지나갔었다. 사실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들은 매일매일 챙겨보기보다는 나중에 책으로 나왔을 때 읽는 게 소설의 완성도면에 있어서나 집중도에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재물을 잘 안 읽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일러스트로 이미지만 남았던 소설이 책으로 나왔지만 이상스레 계속 미뤄오다 선물로 받아 뒤늦게나마 읽기 시작했다. (선물 보내주신 멜기세덱님께 감사를!) 
 
  이 글의 주인공 은수는 우리와 같은 시대를 30대 미혼 여성이다. 최근에야 서른 살을 넘기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예전보다는 눈치가 덜 보인다고도 하지만 은수는 먹어가는 나이와 내 인생의 반쪽을 만나지 못한 초조함, 부모님의 잔소리 앞에 우왕좌왕한다. 그렇게 방황(?)하던 은수는 젊은 시절 만난 애인의 결혼식날 진짜 성인이 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날 자신보다 7살 어린 태오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연인이 된 두 사람. 하지만 젊기에 미래가 불안한 태오는 은수의 마음에 100% 차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겉모습도 평범하고 그야말로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 김영수를 소개 받는다. 여러모로 좋은 조건을 가진 그지만 왠지 '한 방'이 없어 그 또한 뭔가 아쉽다. 여기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남자친구까지. 은수는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르는 이 연애를 조금씩 저울질해보기 시작한다. 

  2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내 나이 서른에는...'이라는 생각을 해볼 것이다.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나름대로 생각해본 것들이 있었지만 20대 초반에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 떠올리면 과연 서른까지 그게 가능할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은수처럼 30대는 아니지만 슬슬 2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다보니 더 현실적이고, 더 냉정하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은 30대이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을 나와 만원버스(혹은 지옥철)을 타고 저마다의 목적지로 전투를 하듯이 나가는 모습, 연애를 할 때 사람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기준으로 재보는 모습, 회사에서 불의(?)를 당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모습 등은 대개의 사람들과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20대인 나도 은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소설은 말랑말랑하고 한국 소설은 딱딱하고 왠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텐데 이 소설은 그런 면에 있어서 일본소설같은 느낌을 풍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은수를 그리기 위해 작가는 실재하는 요소들을 소설에 집어넣고 있고, 이야기도 가볍고 말랑말랑하게 이어간다. 읽고나서 딱히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없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며 가볍게 읽기는 좋은 것 같다. 최근 유행하는 칙릿 소설(<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류)의 일종이라는 느낌도 많이 들었기에 문학이라면 자고로 뭔가 교훈을 줘야하고, 잘못된 사회를 고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이것도 소설이라고. 쯧쯧'하실 수 있겠지만 젊은 세대의 구미에는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부와 중반 초반까지는 괜찮았는데 중후반부터 이야기가 너무 엉성해서 실망스러웠다. (영수와의 관계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야기가 너무 이상하게 흘렀다)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생각보다는 가벼운 드라마 한 편 본다는 생각으로 보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멜기세덱 2007-08-2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방 읽으셨네요...ㅎㅎ

이매지 2007-08-25 01:10   좋아요 0 | URL
읽고 있는 다른 책이 진도가 느려서 ㅎㅎㅎ
워낙 빨리 넘어가는 책이기도 했군요 ㅎㅎ
멜기님 덕분에 즐거운 독서했어요 :)

비로그인 2007-08-2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쌉싸름하다는 말이 맞는것 같네요.
저도 웬지 아쉬운 느낌으로 끝냈어요.
저는 신문에 연재될때 매일 읽었죠,스크랩하며 하루에 몇 번씩.

이매지 2007-08-25 13:09   좋아요 0 | URL
전 요새 연재되고 있는 김영하씨의 퀴즈쇼도
'그냥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보지 뭐'하고 미루고 있어요.
연재소설 읽는 게 쉽지 않더라구요^^;;
초반에는 괜찮았는데 뒤로 갈수록 아쉬웠어요. 정말.

비로그인 2007-08-25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거지같았습니다 :)

이매지 2007-08-26 00:06   좋아요 0 | URL
책 읽고 괜찮으면 9월에 학교에 강연하러 온다길래
한 번 가볼까했는데 지금은 글쎄 어쩔까 고민하는.
체셔님의 거지같았다는 말에 순간 픽 웃었어요 ㅎㅎ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장바구니담기


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17~8쪽

첫째, 하고 싶은 사람과 둘째, 하고 싶을 때 셋째, 안전하게 하자.
이것이 섹스에 대해 정해놓은 원칙의 전부다.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문제는 주로 2번 항목에서 발생하곤 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때와 나의 때가 일치하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특히 첫 관계를 시작하는 시기에 대해, 남성인 상대방과 여성인 나 사이에 현격한 이견이 있기 일쑤였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정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또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성향이나 세계관의 차이일 것이다. 나의 입장은 아무튼, 일단 마음이 통한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 몸도 통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처음 만난 남자와 바로 '하러 가는' 원나잇 스탠드 따위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는 뜻이다. -26~7쪽

단언하건대,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세계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29쪽

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난 얼굴, 그것을 진짜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으로 한 겹 가리고 나면 내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 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42쪽

누군가의 불타는 의지를 무력화시키고픈 음모를 꾸미오 있다면 출퇴근 시간에 맞춰 서울 지하철에 태운 다음 뱅뱅 돌려보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깨에 힘이 쪽 빠지고 '모든 게 귀찮다, 의지 따위야 어떻게 되도 좋으니 어디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열망만 굴뚝 같아지니까. -50~1쪽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53쪽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쓰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69쪽

처음 경험한 민트초코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마도 다음번에 또 먹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초콜릿무스, 망고탱고, 자모카 아몬드훠지처럼 내 혀끝에 익숙한 맛들을 선택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110~1쪽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114쪽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만을 다를 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깊어 보인다. -133~4쪽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 그러나 사랑의 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소모하지 않는 삶을 위해 사랑을 택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 사랑이 깨지고 나면 삶이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탕진되었음을 말이다. 이번 사랑에서는, 부디 나에게 그런 허망한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139~40쪽

어쨌거나 영화가 시작되자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크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극장 관객이 된 자의 관성적 운명이었다. 극장은 익명의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는 곳, 그리고 암흑 속에서 타인의 빛을 훔쳐보는 곳이었다. -145쪽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이해 못한 인간의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틀만 지나면 나는 서른두 살이 된다. 고작 서른둘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의연하게 찡긋 윙크해줄 수 있을까? -146쪽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 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아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148쪽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 사이는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 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180쪽

그러나 어쩌면 좋으랴. 나이 들수록 점점,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내 깊은 속내를 쉬이 털어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달팽이가 자꾸만 동그랗게 몸을 움츠리는 것이 달팽이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혓바닥을 놀려 진심의 조각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진심은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의외의 곳에서 그 책임 없는 말들의 유령과 조우했을 때 받게 되는 고약한 느낌에 대하여 더듬더듬 기억할 수 있을 따름이다. -204쪽

사람은 왜 선(線)을 넘는가. 끊임없이 선을 의식하고 살기 때문이다. 선을 밟으면 안 된다는 억압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충동이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깜빡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대형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 -205쪽

태오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괘씸했고, 조금 뒤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얼마 안 가 두려워졌다. 사흘이 흐르는 동안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책임감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관계의 종말이 닥쳤음을 확인하고 확인받는 순간 이별은 온전히 내 몫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한줌의 희망도 없이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이별인지 아닌지 모르도록, 결정적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 싶었다. -217쪽

나 역시 그렇다.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227쪽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전 운동회 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휙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이 끝나버렸는데 누가 승리자이고 패배자인지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대로 줄을 놓쳐버리기에는, 나는 지금 너무 힘겹다. -235~6쪽

연인들은 어떻게 이별하는가. 이별이 결국 '과정'의 문제라면 세상의 연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헤어진다. '자,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가자'는 합의에 도달하는 커플도 있겠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며, 제삼자가 끼어들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드잡이를 벌이고서야 끝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끔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315~6쪽

넌 그 남자들 단점은 다 버리고 장점만 뽑아서 하나로 모으고 싶지? 근데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냐? 진짜 살아한다면 망설이지 않을걸. 절실하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들 쭉 늘어놓고 문방구에서 연필 고르듯 하는 거. 난 너무 비윤리적이라고 봐. -329쪽

싸움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할 때, 잘못된 관점을 교정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을 내 힘으로는 죽어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 들 때는 싸움 대신 외면을 택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359쪽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373쪽

아무리 선량하게 살더라도 재수가 없으면 별별 막다른 경우에 처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생존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꿈틀댈 때, 그 몸짓이 법이 정한 경계선과 충돌한다면 어떻게 되지? 법은 당연히 그를 단죄하겠지. 그것이 법의 의무이니까.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선을 밟은 그는 죄인일까, 죄인이 아닐까. -4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신검시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사라진 이틀>이나 <클라이머즈 하이>등을 지은 요코야마 히데오와의 첫만남으로, 이 작품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1위를 차지했다기에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다소 익살스러운 표지를 보며 왠지 코믹한 미스터리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밍밍한 느낌이라 읽고나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좀 괜찮으려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책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구라이시는 워낙 뛰어난 검시 능력 때문에 종신 검시관이라 불리며 10여년 간 검시관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능력만 보면 최고지만 야쿠자같은 말투와 조직 생활과는 맞지 않는 행동, 술과 마작을 좋아하는 취향 등의 이유로 출세하기는 그른 것 같다. 하지만 출세와는 상관없이 경찰들로부터 '교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얼핏 보기엔 자살로 보이는 사건이라도 구라이시의 날카로운 검시 앞에서는 진상이 드러나고, 억울하게 눈을 감을 뻔했던 피해자도 그의 검시 앞에서는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다. 그렇게 억울하게 눈을 감을 뻔한 사람들의 8가지 사연이 이 책 안에는 담겨 있다. 

  8개의 사건은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그 안에 구라이시의 존재만 공통분모로 존재한다. 하지만 전체의 에피소드에서 구라이시는 어디까지나 제3자의 눈으로만 관찰할 수 있다. 구라이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의 진짜 삶은 어떤 것인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겉으로 보기완 다르게 작은 일까지 챙길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뿐. 특정 캐릭터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키지 않기 때문에 전체 이야기에 몰입하긴 좀 힘든 것 같았다. 이야기 또한 지나치게 감동적으로 몰고가려는 성향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점도 좀 아쉬웠고. 

  8개의 단편 가운데 <붉은 명함>과 <전별>, <눈 앞의 밀실>과 같은 작품은 재미있게 봤지만 <목소리>는 너무 별다른 스토리가 없고 재미도 없어서 가장 별로였다. 전체적으로 초반에는 약간 흥미진진하다가 뒤로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라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하고 전문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 트릭을 중시하는 분들께는 아쉬움이 많이 남지 않을까 싶다.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2% 부족함을 느끼실 것 같고, 추리소설은 무서워서 싫다는 분들이라면 따뜻한 추리소설도 있구나라고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이더스>에 이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2편으로 이번에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개인적으로는 <레이더스>나 <최후의 성전>보다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누르하치의 유골이 담겨있는 보물을 둘러싸고 상하이에서 라오 일당과 협상을 벌이던 인디아나 존스.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더니 그것도 잠깐, 독을 마시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해독제는 눈 앞에 있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해독제를 마시기 전에 죽을 판. 여차저차하다가 결국 해독제는 마시게 되지만 라오 일당에게 쫓긴다. 기껏 비행기를 타고 도망칠 수 있었으나 하필 그 비행기는 라오의 것. 조종사들은 인디아나 존스가 잠든 사이에 몰래 도망가버리고 비행기는 추락할 위기에 처한다. 이에 고무보트를 타고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인디아나 존스 일행. 인근 마을에 가서 도움을 청했으나 그 곳에서는 그들을 하늘에서 보내줬다고 믿고 있어 방코드 궁에서 가져간 마을의 보물인 신비의 돌을 찾아오면 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이에 방코드 궁으로 간 인디아나 존스 일행. 그들의 모험은 시작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피에 굶주린 마신인 카리를 숭상하는 밀교가 등장한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그들의 비밀 종교 의식도 등장하고, 비밀의식을 행한 곳에서 신비의 돌을 가지고 탈출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기에 분위기 자체도 꽤 으스스했다. 카리를 숭상하는 교라 그런지 붉은 빛으로 그려진 장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다른 영화에서는 긴장과 이완이 번갈아가면서 등장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바싹 긴장하며 볼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거의 긴장상태가 계속되서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지만 간혹 유머러스한 부분이 등장해 긴장을 풀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더스>나 <최후의 성전>에 비하면 긴장감이 떨어졌지만.) 다소 엽기적인 부분도 많아서 (눈알이 동동 떠있는 스프, 원숭이 골 디저트, 뱀요리 등등) 너무 자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흥미진진했던 영화였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는 이후에 스필버그의 두번째 부인이 됐다고 한다. 또, <스타워즈>를 의식한 탓인지 영화 첫 부분에서 라오 일당과 협상을 하는 장소의 이름은 '오비완'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8-2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기를 하면 온갖 까탈스러움이 나오는데, 그녀는 남달랐나부죠, 뭐~^^

이매지 2007-08-22 21:09   좋아요 0 | URL
과연 그럴까요? 흠. ㅎㅎㅎㅎ
아니면 더 까탈스러웠는지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