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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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17~8쪽

첫째, 하고 싶은 사람과 둘째, 하고 싶을 때 셋째, 안전하게 하자.
이것이 섹스에 대해 정해놓은 원칙의 전부다. 생각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문제는 주로 2번 항목에서 발생하곤 했다. 상대방이 원하는 때와 나의 때가 일치하기란 사실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특히 첫 관계를 시작하는 시기에 대해, 남성인 상대방과 여성인 나 사이에 현격한 이견이 있기 일쑤였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정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또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성향이나 세계관의 차이일 것이다. 나의 입장은 아무튼, 일단 마음이 통한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 몸도 통하자는 쪽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처음 만난 남자와 바로 '하러 가는' 원나잇 스탠드 따위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는 뜻이다. -26~7쪽

단언하건대, 만약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세계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29쪽

화장에도 순서가 있듯, 삶도 그럴 것이다. 완벽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난 얼굴, 그것을 진짜 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화장으로 한 겹 가리고 나면 내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 고개 돌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인생이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내 모습을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손바닥으로 황망히 얼굴을 가렸다. -42쪽

누군가의 불타는 의지를 무력화시키고픈 음모를 꾸미오 있다면 출퇴근 시간에 맞춰 서울 지하철에 태운 다음 뱅뱅 돌려보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깨에 힘이 쪽 빠지고 '모든 게 귀찮다, 의지 따위야 어떻게 되도 좋으니 어디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열망만 굴뚝 같아지니까. -50~1쪽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53쪽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쓰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69쪽

처음 경험한 민트초코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마도 다음번에 또 먹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초콜릿무스, 망고탱고, 자모카 아몬드훠지처럼 내 혀끝에 익숙한 맛들을 선택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110~1쪽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114쪽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만을 다를 거야.'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깊어 보인다. -133~4쪽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 그러나 사랑의 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소모하지 않는 삶을 위해 사랑을 택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 사랑이 깨지고 나면 삶이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탕진되었음을 말이다. 이번 사랑에서는, 부디 나에게 그런 허망한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139~40쪽

어쨌거나 영화가 시작되자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크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극장 관객이 된 자의 관성적 운명이었다. 극장은 익명의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는 곳, 그리고 암흑 속에서 타인의 빛을 훔쳐보는 곳이었다. -145쪽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이해 못한 인간의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틀만 지나면 나는 서른두 살이 된다. 고작 서른둘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의연하게 찡긋 윙크해줄 수 있을까? -146쪽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 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아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148쪽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 사이는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 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180쪽

그러나 어쩌면 좋으랴. 나이 들수록 점점,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내 깊은 속내를 쉬이 털어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달팽이가 자꾸만 동그랗게 몸을 움츠리는 것이 달팽이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혓바닥을 놀려 진심의 조각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진심은 진심이 아닌 것으로 변한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다만 의외의 곳에서 그 책임 없는 말들의 유령과 조우했을 때 받게 되는 고약한 느낌에 대하여 더듬더듬 기억할 수 있을 따름이다. -204쪽

사람은 왜 선(線)을 넘는가. 끊임없이 선을 의식하고 살기 때문이다. 선을 밟으면 안 된다는 억압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충동이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깜빡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대형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 -205쪽

태오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괘씸했고, 조금 뒤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얼마 안 가 두려워졌다. 사흘이 흐르는 동안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책임감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관계의 종말이 닥쳤음을 확인하고 확인받는 순간 이별은 온전히 내 몫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한줌의 희망도 없이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이별인지 아닌지 모르도록, 결정적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 싶었다. -217쪽

나 역시 그렇다.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라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227쪽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전 운동회 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휙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이 끝나버렸는데 누가 승리자이고 패배자인지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대로 줄을 놓쳐버리기에는, 나는 지금 너무 힘겹다. -235~6쪽

연인들은 어떻게 이별하는가. 이별이 결국 '과정'의 문제라면 세상의 연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헤어진다. '자,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가자'는 합의에 도달하는 커플도 있겠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며, 제삼자가 끼어들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드잡이를 벌이고서야 끝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끔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315~6쪽

넌 그 남자들 단점은 다 버리고 장점만 뽑아서 하나로 모으고 싶지? 근데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냐? 진짜 살아한다면 망설이지 않을걸. 절실하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들 쭉 늘어놓고 문방구에서 연필 고르듯 하는 거. 난 너무 비윤리적이라고 봐. -329쪽

싸움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할 때, 잘못된 관점을 교정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을 내 힘으로는 죽어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 들 때는 싸움 대신 외면을 택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고,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359쪽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뿐이다. -373쪽

아무리 선량하게 살더라도 재수가 없으면 별별 막다른 경우에 처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생존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꿈틀댈 때, 그 몸짓이 법이 정한 경계선과 충돌한다면 어떻게 되지? 법은 당연히 그를 단죄하겠지. 그것이 법의 의무이니까.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선을 밟은 그는 죄인일까, 죄인이 아닐까. -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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