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장바구니담기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지키는 게 실은 머리로 이해하는 이상으로 힘들다는 것을 나는 곧 통감하게 된다. 사람은 시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 느껴지는 기척에 아무래도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안을 떨치기 위해서는 그쪽을 보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작은 공포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 처음에는 불안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미미했던 느낌이 자꾸자꾸 쌓이면서 어느새 커다란 진짜 공포로 자라난다. 그게 얼마나 불안하고 무섭고 쓸쓸하고 꺼림칙한 느낌인지는 체험을 한 사람만이 실감할 수 있으리라. -39쪽

'게다가 뭣보다도 논리적 사고를 토대로 괴이에 임한다고 반드시 완전히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고.'
겐야는 이전의 설명에 의거해 그렇게 섦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비합리, 흑과 백. 세상 많은 사람들이 매사가 그런 식으로 명쾌하게 구분된다고 무의식중에 믿는다는 것도, 지긋지긋하리만큼 겪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0쪽

"물론 실제로 사건이 벌어진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잊히기 쉽단 말이지. 예컨대 같은 마을 사람이 조금 서둘러 뒤를 지나쳤을 뿐인 상황도 여기선 어떤 요사스러운 존재하고 마주친 것처럼 느껴지거든. 또 잠깐 다른 데 들렀다 가느라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도 신령한테 납치됐다고 여겨지고. 그런 게 아닐까. 난 처음엔 마을 곳곳에 허수아비님이 모셔진 광경이 무섭게 느껴졌어. 그리고 이런 환경을 스스로들 만들었기 때문에 섬뜩한 전승이 생겨나는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도야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자위를 위한 방어책인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혼자 길을 다닐 수 없을 만큼 사위스러운 느낌이 있는 거지, 이 마을의 지형엔."-26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장바구니담기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20쪽

실러에 의하면 성찰적인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단어들이 실재를 규명할지, 실재에 도달할지, 말들이 그가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등등의 문제로 불안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이 쓴 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사용한 방법과 기법 들의 인위성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인은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와 세계 자체를 그다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대적이고 성찰적인 시인은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지각마저 의심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지각한 것을 시로 옮길 때도 교육적, 도덕적, 사상적 원칙들로 고민합니다. -23쪽

우리는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풍경을 걸어가며 모든 잎사귀를, 모든 부러진 가지를 어떤 신호처럼 여기고 의심하며 주의 깊에 살피는 사냥꾼처럼 행동합니다.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모든 새로운 단어, 사물, 캐릭터, 주인공, 대화, 묘사, 세부 사항, 소설의 언어적, 형식적 특징, 이야기의 예상 밖 진행 등이 표면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암시한다고 느끼면서 읽어 나갑니다.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32쪽

세부 사항들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묘사될 때면 우리는 "맞아, 정확히 이래,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상상 속에서 장면을 떠올리고 작가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가 모든 것을 마치 실제 경험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으며,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도 느낍니다.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합시다. 이 역량은 정말로 멋진 것이며, 소설가의 존재를 잠깐이 아니라 전적으로 잊고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하고자 합니다. 그 어떤 소설을 읽건 내내 작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설의 감각적 세부 사항들을 항상 우리의 경험과 비교하고, 그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51쪽

우리가 어떤 소설에 전적으로 몰입했을 때, 소설 표면에 있는 복잡한 풍경 가운데 깊숙이 내재된 의미를 찾고, 주인공들의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사람들의 대화와 일상의 사소한 세부 사항들을 통해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발견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때 작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손에 들린 소설이 어떤 작가에 의해 계산되고 계획되어 쓰였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소박하게 잊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여기서 유행이 지난 비유를 사용하고 싶습니다)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벽한 거울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거울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모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하나의 거울을 선택합니다. -52쪽

소설의 등장인물은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서 풍경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소설 읽기는 세상을 등장인물의 눈과 정신과 영혼을 통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낭만시, 서사시, 메스네비, 장시 같은 현대 이전의 서사들은 세상을 독자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이러한 전통 서사에서 주인공은 어떤 풍경 속에 있고, 우리 독자들은 외부에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를 풍경 속으로 초대하고, 우리는 세상을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그의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단어를 통해서 봅니다. 등장인물의 눈으로 볼수록 세계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쉽게 이해됩니다. 소설 예술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은 이 친근함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62쪽

소설을 다른 장편 서사들과 구별하고,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장르로 만든 기본 특징은 선 안에 있는 이 작은 점들(신경관) 각각을 통해 이야기 속 인물 가운데 한 명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관찰한 결과를 주인공의 감정과 지각과 결부시킬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사건이 일인칭 관점으로 서술되든 삼인칭 관점으로 서술되든, 소설가 또는 서술자가 이 관련성을 알든 모르든, 독자는 전체 풍경 속 모든 세부 사항을 사건과 관련된 주인공의 감정, 심리 상태와 연관지어 읽습니다. 소설 예술의 내부 구조에서 비롯된 황금의 법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와 별로 관계가 없고 사람이나 사물이 없는 풍경 묘사라 할지라도 소설 독자들은 주인공의 감정적, 정신적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79쪽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문학 장르와 비교했을 때, 소설은 우리의 평범한 인생 경험과 때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감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소설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냄새, 소리, 맛, 감촉에 의해 일깨워진 느낌들도-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흉내낼 수 없는 풍부함으로-묘사합니다. 소설의 전체 풍경은 주인공들이 보는 것 외에도 세상의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순간들이 있어 활기를 띱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존재하면서, 매 순간 우리 나름대로 느꼈던 경험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당연히, 보는 것입니다.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의 단어를 가지고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92~3쪽

소설가는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주인공만큼이나 관심이 있으며, 소설 속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사물'들을 필요한 만큼 화가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플로베르가 말한 '적절한 단어'를 찾기에 앞서 소설가들이 찾아야 하는 '적절한 심상' 역시 풍경, 사건, 소설 속 세계에 완전히 들어간 뒤에야 찾을 수 있습니다. 소설가가 주인공에게 느끼는 애정도 이렇게 해야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사물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애정의 결과이며 표현입니다. -112쪽

소설이 일상생활의 경험과 감각을 묘사하고, 삶의 본질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일깨운다는 얘기는 앞에서 여러 차례 했습니다. 동시에 소설은 인간적인 감정,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일상, 제스처, 말, 태도 들에 대한 강력하고 풍부한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리, 단어, 일상 구어, 냄새, 모습, 맛, 물건, 색깔은 오로지 소서가들이 이것들을 인식하고 단어로써 주의 깊게 배치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어떤 사물 또는 그림을 봤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이야기와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카탈로그의 도움으로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이미지, 대화, 냄새, 이야기, 신념, 감각 등이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묘사되고 보존됩니다. -125쪽

어떤 소설을 완성하고, '실현'하려면 작가의 의도 못지않게 독자의 의도도 중요합니다. 한 명의 독자로서 나 자신을 언급하자면, 아이셰처럼 그리고 다른 많은 독자처럼, 아무도 그 소설을 읽지 않을 때 나 혼자만이 발견한 것 같은 느낌으로 읽으며 불운하게도 사람들이 작가의 진가를 몰라준다고 상상하는 것을 나도 좋아합니다. 그런 순간이면 이해받지 못하는 소설의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부분을 나 혼자만이 이해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주인공들과 동일화되는 것이 자랑스러워질 뿐만 아니라 작가가 소설을 내 귀에 대고 속삭이고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이러한 자긍심이 극에 달하면, 심지어 자신이 그 소설을 썼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중략)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열심히,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익게 됩니다. -136~7쪽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의 반응을 파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소설가는 독자가 이래저래 해석하리라 추측하며 썼겠지 하고 추측하며 텍스트를 쓰고, 독자 역시 소서가가 이래저래 추측하면서 썼겠지 하고 추측하면서 읽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독자들이 스스로 작가가 된 기분에 젖거나, 작가가 이해받지 못해 불행해한다고 여기면서 읽을 거라는 것도 소설가는 미리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 소설을 씁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직업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르겠군요! -137쪽

소설의 중심부는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입니다. 하지만 소설가들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중심부의 장소와 형태가 바뀐다는 것도 압니다. 대부분 중심부는 소설을 써 나갈수록 모습이 드러납니다. 많은 소설가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중심부를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될 주제 정도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소설을 쓸수록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중심부의 심오한 의미를 발견해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소설이 진행되고 풍부해질수록, 각각의 나무뿐만 아니라, 뒤엉킨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그림이 되어 드러날수록, 작가도 독자도 '감춰진 중심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소설 읽기는 진짜 중심부와 진짜 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표면의 세부 사항에서 묘미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짜 중심부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합니다. 때로 독자에게는 중심부, 즉 소설의 진정한 주제를 탐색하는 것이 그 세부 사항들보다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14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을 '누구나 제목은 알지만 읽지 않는 책'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흔히 한다. 내게 찰스 디킨스 또한 그랬다.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등으로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때 읽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조금이라도 더 매력 있었다면 그의 작품을 내리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강조하는 내용일 뿐 이야기 자체는 크게 매력이 없었던 터라 영 심드렁했었고 찰스 디킨스도 그렇게 관심 밖의 작가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영감을 『두 도시 이야기』에서 얻었다고 언급했고, 때마침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도 시작돼 다시 한번 찰스 디킨스에 도전해볼까 싶어졌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에 히익, 하고 질겁했지만 다행히도 초반의 지루함을 넘기자 나도 모르게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두 도시로 이동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두 도시 이야기』는 짧게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느 정도 개인의 삶이 보장되고, 다소간의 갈등은 있을지라도 전반적으로 안정된 분위기의 런던. 그런 런던과 반대로 파리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얼굴에는 굶주림의 고랑이 깊어져만 가는 도시다. 가난과 배고픔, 지배계급의 압제에 사람들은 최소한의 삶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이 상황을 더는 견디지 못한 그들은 조금씩 '그날'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물밑에서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 없이 이 혁명에 휩쓸린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 귀족 가문의 일원이었으나 민중을 향한 폭압을 더는 용인할 수 없어 자신의 모든 지위와 권리를 버리고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찰스 다네이를 비롯해, 18년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내며 정신적으로 무너져 어둠 속에서 구두 만들기에만 골몰하나 친구인 로리의 도움으로 딸 루시를 만나며 '되살아난' 마네트 박사, 아버지 마네트 박사와 남편 다네이를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루시를 중심으로 영국 은행에 근무하는 로리, 변호사 스트라이버와 시드니 카턴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혁명에 휩쓸린 사람들 반대편에 오랫동안 혁명을 준비해온 드파르주와 그의 부인이 있다. 런던과 파리라는 두 도시가 대비되듯이 인물 구성에 있어서도 크게 두 축으로 대비된다. 각각의 축에 그 나름의 사연이 있고, 그 나름의 개연성을 가졌기 때문에 쉽사리 이들의 대립을 선과 악의 대립이라고 선을 그을 수 없다. 그저 하나의 사건, 하나의 시대를 둘러싸고 어쩔 수 없는 만남이 하필 그곳에서 벌어진 것일 뿐이다.

 

  장소와 인물의 대비를 통해 이야기는 탄탄하고 극적으로 진행된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 용서와 복수 등 온갖 감정의 변화를 읽어가다보면 어느샌가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다. 워낙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있어 한 가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이야기가 길어질 테지만, 꼭 짚고 싶은 것은 대중의 광기다. 애초에 품은 혁명의 취지를 잊은 채 그저 피에 굶주려 한 사람의 죄과를 제대로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더 많은 사람들을 기요틴에 보내려는,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점점 광기에 취해가는 '애국시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체 무엇을 위한 혁명인가, 결국 이들은 그들이 쫓아낸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라는 자조가 들었다. 두 번 재판석에 오르는 다네이를 보면 '애국시민'의 이같은 태도는 극명히 드러난다. 첫번째 재판에서는 그의 무죄에 환호하던 사람들이 두번째 재판에서는 그의 유죄 선고에 환호하고 그의 처벌을 촉구한다. 이미 광기에 휩쓸린 '애국시민'에게는 대의도 명분도 유무죄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들은 복수와 피에 목말라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리고 싶어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혁명이라는 혼돈의 시기에서만 유효한 이야기일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늘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사리분별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상에서 그 상대만 바꿔가며 끊임없이 벌어지는 마녀사냥도 '애국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내면에 잠재된 광기의 변형은 아닐까? 인간이란 누구나 이렇게 타인을 향한 잔인한 폭력성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요틴에 잘려간 머리를 세는 낙으로, 붉게 물든 땅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섬뜩했지만,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본 것만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지금 하려는 행위는 지금까지 해온 어떤 행동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걸었던 어느 길보다 훨씬 더 평안한 길이리라"라는 문장과 함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시드니 카턴. 그리고 그가 마지막을 함께해준 한 소녀. 그들의 죽음과 함께 『두 도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쉽사리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때문에 읽기 시작했으나 어느 순간 영화와의 연관성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찰스 디킨스라는 거장이 만들어낸 이 놀랄만큼 가혹하고도 숭고한 이야기에 매혹되었다.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시드니 카턴의 희생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도 과연 숭고하다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몇백 년 전 파리와 런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닌, 이제는 끝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 오늘날 지구 반대편의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니 말이다. 

 

 

덧1)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두 도시 이야기』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미 잘 정리하신 분이 계셔서 링크로 갈음한다.

덧2) 근래에 읽은 책 중에 정말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오탈자가 많았다. 영화와 뮤지컬 등에 맞추느라 일정이 급했겠거니 이해는 되지만 매력적인 이야기에 옥의 티처럼 오탈자가 있어 안타까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짜 경감 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피터 러브시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육십 년이 지났지만 가짜 경감 듀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강렬한 첫문장으로 시작되는 <가짜 경감 듀>. 이 책 또한 <환상의 여인>처럼 오래전 동서판으로 읽으려고 사뒀다가 몇 페이지 넘기다가 흥미가 일지 않아 관뒀던 이력(?)이 있어 망설였으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에 반해 내친 김에 집었는데 '탄산수처럼 톡톡 튀는 선상 미스터리'라는 표지 문안처럼 톡톡 튀는 매력 때문에 읽는 내내 몇 번이나 키득거렸다. 영국에 금의환향하는 찰리 채플린과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이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가짜 경감 듀>. 그리고는 뜬금없이 담당 치과의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꽃집 아가씨와 예쁘장한 소매치기가 연달아 등장한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식으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극단에 소속되어 마술사의 플랜트(관객인 척 객석에 앉아 있는 조수) 생활을 하다 독심술사가 된 월터는 연극배우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치과의사가 된다. 이후 줄곧 그녀의 그늘 아래서 아내의 말에 순종하며 별 트러블 없이 살아간다. 치과의사로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자리를 잡아가던 차에 아내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할리우드에 가겠다고 한다. 자신은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다시 시작하고, 월터는 치과의사가 아닌 자신의 매니저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자신의 삶이 부정당한 것 같아 낙담한다. 그런 그의 곁에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꽃집 아가씨 앨마가 있다. 로맨틱 소설을 즐겨 읽던 앨마는 월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심지어는 월터에게 미국행 여객선에서 가명으로 함께 탄 뒤 선상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신분을 바꿔치기해서 미국에서 둘만의 새 삶을 시작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택한 두 사람. 이들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만 다음 날 바다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놀랍게도 그 시체는 월터의 아내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명백해보이는 시신의 모습에 고민하던 차에 승객 중에 유명한 살인범 크리펜을 체포한 듀 경감이 있다는 소식에 선장이 그에게 SOS를 청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는 듀 경감의 이름을 가명으로 쓴 월터. 도망갈 수도 없는 배 위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가짜 경감 듀(월터).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유명한 경감으로 오인받아 타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 새로운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너는 연인. 설정만 보기에는 진지한 정통파일 것 같은데 <가짜 경감 듀>는 허를 찌른다. 배라는 이동수단 안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잘 섞여 있다는 점에서 어쩐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몇몇 작품이 떠올랐지만, <가짜 경감 듀>는 그보다 더 유쾌하다. 인물간의 갈등이나 상류사회의 풍속, 살인사건 자체를 구성하는 음모도 물론 등장하지만 <가짜 경감 듀>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음모와 반전이 양념처럼 들어간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월터-앨마 러브의 메인 러브라인뿐만 아니라 배 위에서 그려지는 앨마-조니, 바버라-폴-포피 등 여러 등장인물이 배 위에서 얽키고설키며 서로 사랑의 작대기를 들이대는 모습은 정말 이 배 위에서 살인사건이 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분홍분홍하다. (하긴 뭐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승객이 범인이 잡힐 때까지 벌벌 떠는 것도 좀 우습긴 하겠다.) 아무튼 명탐정(혹은 명형사)이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라 긴장감은 떨어지지만 그런 느슨함이 오히려 매력처럼 느껴져 부담없이 즐겼다. 

 

  하지만 유머러스하고 개구진 것만이 <가짜 경감 듀>의 매력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 때문에 살인과 신분세탁을 감행했던 앨마는 "치과에 드나들 때는 당신을 우상처럼 떠받들었죠.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남자와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남자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가족 마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뿐이었으니까요.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연애 소설 속 주인공 말이에요. (중략) 하지만 그건 집착일 뿐이었어요. 전쟁 기간 내내 꿈꿔왔던 소녀 취향꿈이나 좌절감, 환상 같은 것들을 모두 당신에게 쏟아부었어요. (중략) 배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분별력이 생겼어요"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배 위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로맨스 소설 밖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다. 아내에게 한 번도 반항해본 적 없었던 소극적인 월터도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듀 경감으로 오인받아 수사에 나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그것이 다른 이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을 드러내고 하나의 중심으로 존중받는다. 그는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죠. 영리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고 숨겨진 단서를 찾을 필요도 없었어요. 형사 일이란 그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더라고요. 난 듣는 걸 잘하니까. 그것도 리디아 덕분이지만, 어쨌든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게 한 다음 진상에 도달한 공로를 차지하는 거죠"라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신의 삶에 눈을 뜬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살해당한 여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모두가 즐거운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웃으며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꾸눈 소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8
마야 유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절판


"그럼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하늘을 바라볼 때는 다 그러는 법 아닌가?"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은 모르나보군요."
소녀는 눈을 한 번 커다랗게 떴다가 마치 한숨을 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제야 시즈마는 소녀의 양쪽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응달에 있어서 몰랐는데, 오른쪽 눈은 머리카락과 똑같이 칠흑빛이지만 왼쪽 눈은 약간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눈이 촉촉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비해 초록빛을 띤 왼쪽 눈은 인공적이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의안인 듯했다. -25~6쪽

"……혹시 야마시나 씨가 용의 연못에 남은 게 그것 때문이야?"
"그래요. 아버지는 내가 슬슬 데뷔해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계시고, 나도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와 같은 탐정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고토노유에서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요."
"그럼 미카게가 탐정으로 데뷔를 하느냐 마느냐가 야마시나 씨의 교섭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이네. 살인현장에서 비지니스라. 어쩐지 굉장히 현실적이군."
"원래 탐정이 그런 거예요. 묘한 환상 같은 건 버리는 게 나아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뒤를 잇기 위해 태어난걸요. 이래봬도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요."-62쪽

예민한 시기를 스가루 후보의 대역으로 보낸 사나코는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은 것이리라. 그런 심정은 이와쿠라가 평한 '자유'라는 말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한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카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되기 위해 수련해왔어요. 5년 전부터는 경험을 쌓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녔죠. 여러 마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접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제가 나아가려는 길이 옳다는 걸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됐어요. 사나코 씨도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찾고 있던 자신의 길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미카게는 마치 연장자 같은 말투로 말했다. 열일곱 소녀가 스물네 살 여자한테 하는 말이니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셈이다. 하지만 미카게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나이차를 뛰어넘은 진실미가 담겨 있었다. -147~8쪽

"내 왼쪽 눈은 미사사기 미카게의 증표야. 하지만 이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건 아니지."
"그건 무슨 소리야? 요전에는 꿰뚫어본다고 큰소리친 것 같은데."
며칠 전의 광경이 되살아났다. 용의 연못에서 수정 눈을 뜨고 침묵으로 주위를 압도하던 아름다운 모습. 그건 거짓이었던 걸까.
"그냥 퍼포먼스야. 나는 점쟁이도 초능력자도 아니고,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탐정이거든.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어머니의 뒤를 이을 탐정으로 자라왔고." (중략)
"중요한 건 오른쪽 눈이야. 실은 이 오른쪽 눈이 내게 힘을 줘. 시즈마는 우뇌와 좌뇌의 활동에 관해 알아? 우뇌는 감성, 좌뇌는 언어를 관할한다고 해. 그리고 뇌는 각각 반대쪽의 감각을 다스리지. 우뇌가 불완전하면 좌반신에 마비가 오는 식으로."
"즉 오른쪽 눈으로 본 걸 좌뇌가 판단한다는 말이야?"
"그런 셈이야. 그러니 내 머리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고 상황에 좌우되기 쉬운 감성이 아니라,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말로 처리되는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말로 처리할 수 있어. 거기에는 전혀 애매함이 없지."-158~9쪽

"그럼 미카게는 컴퓨터에 수식을 쳐넣는 것처럼 사물을 본다는 거야? 못 믿겠는데. 바로 에러가 날 거야." (중략)
"그러니까 오히려 탐정활동에는 수월해. 합리적이지 않으면 반드시 좌뇌가 반응하지. 모순된 현상이라고 말이야. 특히 인간은 우뇌 탓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나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어. 어중간하지. 하지만 말로 처리할 때는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야 해. 어중간한 건 원래 나쁜 일은 아니지만, 탐정한테는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야."-15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