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경감 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피터 러브시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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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십 년이 지났지만 가짜 경감 듀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들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강렬한 첫문장으로 시작되는 <가짜 경감 듀>. 이 책 또한 <환상의 여인>처럼 오래전 동서판으로 읽으려고 사뒀다가 몇 페이지 넘기다가 흥미가 일지 않아 관뒀던 이력(?)이 있어 망설였으나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에 반해 내친 김에 집었는데 '탄산수처럼 톡톡 튀는 선상 미스터리'라는 표지 문안처럼 톡톡 튀는 매력 때문에 읽는 내내 몇 번이나 키득거렸다. 영국에 금의환향하는 찰리 채플린과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이라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가짜 경감 듀>. 그리고는 뜬금없이 담당 치과의사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꽃집 아가씨와 예쁘장한 소매치기가 연달아 등장한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다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식으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극단에 소속되어 마술사의 플랜트(관객인 척 객석에 앉아 있는 조수) 생활을 하다 독심술사가 된 월터는 연극배우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내의 도움으로 치과의사가 된다. 이후 줄곧 그녀의 그늘 아래서 아내의 말에 순종하며 별 트러블 없이 살아간다. 치과의사로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고 자리를 잡아가던 차에 아내가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할리우드에 가겠다고 한다. 자신은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다시 시작하고, 월터는 치과의사가 아닌 자신의 매니저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자신의 삶이 부정당한 것 같아 낙담한다. 그런 그의 곁에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젊은 꽃집 아가씨 앨마가 있다. 로맨틱 소설을 즐겨 읽던 앨마는 월터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심지어는 월터에게 미국행 여객선에서 가명으로 함께 탄 뒤 선상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신분을 바꿔치기해서 미국에서 둘만의 새 삶을 시작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택한 두 사람. 이들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만 다음 날 바다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놀랍게도 그 시체는 월터의 아내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명백해보이는 시신의 모습에 고민하던 차에 승객 중에 유명한 살인범 크리펜을 체포한 듀 경감이 있다는 소식에 선장이 그에게 SOS를 청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는 듀 경감의 이름을 가명으로 쓴 월터. 도망갈 수도 없는 배 위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가짜 경감 듀(월터).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유명한 경감으로 오인받아 타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 새로운 삶을 위해 바다를 건너는 연인. 설정만 보기에는 진지한 정통파일 것 같은데 <가짜 경감 듀>는 허를 찌른다. 배라는 이동수단 안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상황에서 미스터리와 로맨스가 잘 섞여 있다는 점에서 어쩐지 애거사 크리스티의 몇몇 작품이 떠올랐지만, <가짜 경감 듀>는 그보다 더 유쾌하다. 인물간의 갈등이나 상류사회의 풍속, 살인사건 자체를 구성하는 음모도 물론 등장하지만 <가짜 경감 듀>는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음모와 반전이 양념처럼 들어간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월터-앨마 러브의 메인 러브라인뿐만 아니라 배 위에서 그려지는 앨마-조니, 바버라-폴-포피 등 여러 등장인물이 배 위에서 얽키고설키며 서로 사랑의 작대기를 들이대는 모습은 정말 이 배 위에서 살인사건이 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분홍분홍하다. (하긴 뭐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모든 승객이 범인이 잡힐 때까지 벌벌 떠는 것도 좀 우습긴 하겠다.) 아무튼 명탐정(혹은 명형사)이 사건을 진두지휘하면서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라 긴장감은 떨어지지만 그런 느슨함이 오히려 매력처럼 느껴져 부담없이 즐겼다. 

 

  하지만 유머러스하고 개구진 것만이 <가짜 경감 듀>의 매력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 때문에 살인과 신분세탁을 감행했던 앨마는 "치과에 드나들 때는 당신을 우상처럼 떠받들었죠.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강인하면서도 매력적인 남자와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남자 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가족 마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뿐이었으니까요.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연애 소설 속 주인공 말이에요. (중략) 하지만 그건 집착일 뿐이었어요. 전쟁 기간 내내 꿈꿔왔던 소녀 취향꿈이나 좌절감, 환상 같은 것들을 모두 당신에게 쏟아부었어요. (중략) 배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분별력이 생겼어요"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배 위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로맨스 소설 밖의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다. 아내에게 한 번도 반항해본 적 없었던 소극적인 월터도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듀 경감으로 오인받아 수사에 나서면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그것이 다른 이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할지라도)을 드러내고 하나의 중심으로 존중받는다. 그는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죠. 영리한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고 숨겨진 단서를 찾을 필요도 없었어요. 형사 일이란 그저 상대방이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더라고요. 난 듣는 걸 잘하니까. 그것도 리디아 덕분이지만, 어쨌든 상대가 모든 걸 털어놓게 한 다음 진상에 도달한 공로를 차지하는 거죠"라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자신의 삶에 눈을 뜬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변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살해당한 여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모두가 즐거운 추리소설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웃으며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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