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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3 - 기괴환상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음울한 짐승>을 읽으며 에도가와 란포를 처음 접했는데, 왠지 곰팡내도 나는 것 같고, 습기가 차서 기분마저 나쁜 그런 지하실에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특히 당시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겨준 단편은 이 책에도 실려있는 <인간 의자>였던지라, 사실 이 책을 다시 잡으면서도 이번에는 그 찝찝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갔는데, 새삼 그의 매력을 깨닫고 정신없이 야금야금 읽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무료해서 왠만한 자극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J라는 사내가 남들에게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방식으로 100명의 사람을 죽였다는 고백('붉은 방')에서 시작되는 책은 뒤이어 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신 등장한다.('붉은 방'처럼 돈 많고 시간이 많아 일상이 지루한 이들의 독특한 경험담이라는 설정도 자주 등장한다.) 대개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지 왠지 나도 이야기 속의 화자에게 다소 기괴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느낌이 들어, 어린 시절 수련회에 갔을 때 불을 꺼놓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그런 기분이 들어서 나름 재미있었다.
특히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꼽자면 예전에는 보고 다소 오싹하게 느꼈던 '인간 의자'를 비롯하여 '공기사나이', '악령', '거울지옥', '벌레' 등이 흥미로웠다. 특히 '공기사나이'나 '악령'의 경우에는 꽤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쉽게도 미완성인 작품이라 결말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 덕에 에도가와 란포가 아니라 다른 작가가 그 나름의 결말을 완성해서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품어보기도 했다. '기괴환상'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서 뭔가 괴상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을까 긴장하면서 봤는데 의외로 유쾌한 요소들도 숨어 있어서 때로는 키득거리며, 때로는 숨을 멈추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한 작가의 이야기라도 이토록 다른 매력을 가질 수 있구나'라고 느끼며 읽었던 책이었다.
책을 다 읽고 이제는 에도가와 란포와 마주할 수 있다는 왠지 모를 자신감이 들어서 이 책에 실린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란포지옥>도 구해서 봤는데, 영상으로 보는 란포의 기괴함은 솔직히 다소 역겨운 지경. 영화와 원작의 내용도 많이 각색되서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전위적인 구성에 질려 결국은 스킵해서 보다가 꺼버리고 말았다. 영화는 너무 기괴한 쪽으로 각색을 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혹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겨 보실 분들이 계신다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경고 아닌 경고를 해주고 싶다.
에도가와 란포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있을 정도로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추리소설에 기여한 공은 크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이 책 속에는 정통 추리소설적인 요소보다는 다소 변태적이고, 기괴한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그의 재치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던 책이었다. 마지막에 작가가 쓴 작품에 대한 여담이 붙어 있어서 이 또한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었다. (마츠모토 세이치와의 인연도 얼핏 얼핏 등장한다.) 이전에 <음울한 짐승>이나 <외딴섬 악마>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작가지만 이렇게 전단편집으로 만나보니 더 반갑고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아직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도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유쾌하고, 생각보다 기괴한 에도가와 란포와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