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장바구니담기


북조선에서 출신 성분이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혁명 원로의 손자로서 엘리트 군인의 길을 영웅적으로 밟아 가던 리강은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조명도에게 있어 아예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밤하늘의 별이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바야흐로 여기는 통일 대한민국이니만큼 얘기는 달라도 한참 달라야 했다. 왜냐. 조명도는 자신이 천생 남조선식 자본주의 체질인 데다가 리강은 노동단증을 전투복 안쪽에 품은 채 아프리카 밀림에서 깜둥이들과 충질이나 해 대다 죽어야 어울리낟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명도는 통일 대한민국이 아름다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26쪽

서일화의 소견으로 북조선과 남조선의 강력한 공통점은 고위층의 속물근성이었다. 서일화는 북조선에서는 그런 식이었으니 남조선에서는 이런 식으로 속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이 애초부터 서일화는 웃겼다. 그것을 통일 대한민국이 넉넉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서일화에게는 남조선이 사실이고 북조선이 추상이었다. 옳았다. 추상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북조선은 죽었다. 이 천박하고 잔인하게 뭉개진 자본주의의 만상이 서일화에겐 참으로 리얼한 세계였다. 서일화는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수긍하였다. -38쪽

혁명? 혁명은 국회의사당과 방송국에서 총으로 하는 것이다. 파리의 극장과 길거리에서 "금지를 금지한다." 따위의 문학적인 구호를 외치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공연일 뿐이다.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무덤을 파 시체 옆에서 잠자는 훈련까지 받았던 그들은 27명이 죽고 둘은 도망쳤으며 나머지 둘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유일한 생존자 스물여섯 살 청년 김신조는 수감 생활 중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기독교 신자 소녀와 결혼하여 훗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24부대원 31인 전원이 각기 한 정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TT33이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혁명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리강은 믿었다. 그는 피를 지불하지 않는 어떠한 혁명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변화시키고 싶은 간절한 모든 것들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71쪽

통일 대한민국이 잘 돌아갔다면 지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것도 조국이라면 조국은 어차피 쓰레기가 됐어. 금주법 시대와 마찬가지야. 혼란에 감사하라고. 네 문제가 뭔지 알아? 너는 항상 매사에 답을 구해. 답을 구하지 마. 세상은 주체철학 용어 사전이 아니야. 답을 구하니까 네가 세상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 거야. 답을 구하니까 망자에게 집착하는 거고. 주도면밀한 거? 사내가 물론 그래야지. 그렇지만 각론은 각론이고 총론은 총론이야. 살아남은 인간은 총론에 강하다. 전체를 읽어야 상황이 파악되고 할 일 안 할 일 구분하게 되는 거야. 혼돈의 시대에 각론은 잘해 봐야 감정싸움일 뿐이야. 답?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질문도 성립이 안 되는데 답이 어딨어? 네가 이해는 돼. 우리가 그런 사회에서 살았으니까. 선과 악, 적과 동지를 확실히 정해 놓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북조선에서. -73~4쪽

자본주의란 게 결국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바다야. 어디에도 육지가 없는 바다. 사내들은 제 손바닥만 한 배에 돛을 올리고 조만간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지. 어리석은 짓이야. 정박할 땅이 없는 배가 바다를 이길 순 없다. 파도를 타고 떠돌다 운이 다하면 가라앉을 뿐이야. -80쪽

회사원인 거지. 양쪽 다 회사원. 현실에서 제 잇속만 챙기는 회사원. 짤리거나 진급이 안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회사원. 과자 던져 주면 냠냠 좋아하는 회사원. 국회의원들만 회사원이 아니야.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까지 전부 회사원이니 나머지 놈들은 말 다 했지. 종교인은 거론하기가 귀찮다. 관두자. 예술가는 뿔 달린 수도승이야. 균열이 없는 가슴에서 나오는 미학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회사원이 되지 말아야 그 사회가 건강해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진짜 회사원들보다도 훨씬 옹졸한 겁쟁이가 돼 버린 거지. 늑대여야 하는 자들이 모조리 애완견이 돼 버린 거라구. 누가 키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 알아서 기거나 길들여진 놈들이 더 한심하지만. 현실에서 죽음 이후를 겁낼 필요가 없는 사회는 희망이 전혀 없다. 너 말이야, 뭐하는 놈인 줄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출세하고 싶거든 절대 비판하지 마라. 비판은 곧 죽음이다. 죽음. 정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든 열라 큰 그림을 그려서 얘기해. 못 알아듣게. 회사 중역들이 기분 상하면 그날로 좆 되는 거야. 정말 평생 죽기로 싸우고 나서 져도 절대 후회 안 한다는 열정이 확고할 시에만 비판해. -155~6쪽

넌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이남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야. 여긴 원래 이랬어. 그게 통일 때문에 극심해져서 확연히 드러난 것뿐이지. 구더기는 썩은 살에 천사처럼 갑자기 나타나 들끓는 법이야. 아니라고 믿는 자들에겐 불행의 이유까지 제공하니 얼마나 좋아? 하핫. 나는 남조선이라고 해서 뭐 별것이 있는 줄 알았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케 하는 것이라고? 맞아. 그런데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저 끔찍한 시점에 거의 다 다른 것 같다. 머지않아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들이 펼쳐질 것 같아.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겪으며 끝까지 내 거짓의 죗값을 치를 작정이야. 하지만 리 부장 너는 달라. 너는 나라를 지키는 순결한 군인이었잖니? 그 허위로 유지되던 나라가 사라졌으니 어디서든 새롭게 시작할 자격이 네겐 있어. 아직 젊고 영혼이 남아 있을 때 이 화약고를 떠나.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데리고 네 조국이 되기에는 서로운 이 조국을 떠나라.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누구인지를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네 인생의 답을 구하고 얻어 내. -183쪽

폭동은 논리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화약고에 불을 붙이면 터지고 보는 게 폭동이에요. 다 불타 버리고 나서 이러니저러니 해 봤자 부질없구요. 폭동의 본질은 동기가 아니라 증오의 폭발 그 자쳅니다.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쟁도 그래요. 전쟁 전에는 명분을 들먹이지만 전쟁이 진행되다 보면 명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냥 작동되는 겁니다. 폭력이란 게 원래 그래요. -207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카스피 2009-08-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도 출신 성분은 중요한데요.부모가 부자야라지만 비싼 과외를 받고,자사고나 외고에 들어가 SKY이나 외국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취직하니까요 ㅜ.ㅜ

이매지 2009-08-19 13:05   좋아요 0 | URL
우리도 어느 정도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거 같지는 않아요. 뭐 돈을 들이 부어도 안 되는 놈들은 안 되던데요 뭐~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품절


사실, 고교생이 '찐따'가 되는 데에도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눈알이 축소돼 보이는 두꺼운 안경알, 악어가죽도 쥐포처럼 쭉 찢어먹을 공포의 쇠붙이(치아교정기), 뺨에서 기름기를 뽑아 올린 여드름, 더불어 교실용 책상 밑으로 두 다리를 한꺼번에 집어넣기 벅차게 만드는 비곗살. -12쪽

알리앙스 프랑세즈? 나는 아이들의 입에서 모르는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입안의 교정기를 감추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나는 외국어고등학교가 외국어를 배우러 들어가는 학교인 줄 알았지, 외국어를 배워서 들어가는 학교인 줄은 미처 알지 못한 채 입학을 한 거다. 이곳은 뉴욕도, 파리도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니 국어가 아니라 영어와 불어를 잘 못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연합고사 평균점수가 이백 점 만점에 백구십오라는 불어과 아이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일이학년 과정을 미리 떼고 온 눈치였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나로서는 모를 노릇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과외금지령으로 대학생 과외가 내내 불법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대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나 하다못해 삼촌도 없는 나 같은 아이는 누구에게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고 온단 말인가. 나는 영어교사의 말대로 이곳에서 한번 뒤떨어진 사람은 영원히 따라갈 수 없는 건지, 한번 열등생은 영원한 열등생인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16~7쪽

나는 교사들이 무슨 이유로 아이들을 일으켜세워 질문하는지 궁금할 적이 많았다. 불어교사뿐 아니라 영어교사도 시간마다 아이들을 지적하며 영어해석을 시켰다. 그날이 2일이면 2, 12, 22, 32, 42, 52번 아이들이 바짝 긴장을 했다. 물론 2번 학생을 일으켜세운 후, 그 뒷줄에 앉은 아이들을 주르륵 일으키는 방식도 심심치 않았다. 방식에 일정한 논리가 없다는 점에 아이들은 더 겁을 먹었다. 지뢰는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기에 무서운 거였다.
쉰일곱 명의 아이들 가운데 일으켜세워진 한 명이 입시학원 교재의 영어지문을 읽고 빠른 속도로 해석하는 동안 영어교사는 한 줄이라도 잘못 해석하면 넌 끝장이야, 라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교사들이 그런 수업방식을 고수하는 까닭이 다음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1. 고도의 집중력으로 외국어 습득능력을 높이기 위해.
2. 혼자 다 읽고 해석하면 목구멍이 너무 아프니까.
3. 기분 나쁜 일을 약자에게 풀려는 의도.
4. 학생들의 정신력 강화를 도우려고.
5. 남을 괴롭히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4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미미달 2009-08-20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찐따가 뭐예요?
왕따와 비슷한 말인가요.
암튼 학교 다닐 때 저런 친구들 몇 명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이매지 2009-08-20 09:28   좋아요 0 | URL
왕따랑은 좀 다르구요,
찐따=찌질이랄까요 ㅎㅎ
 
[켈리워터] 알로에 워터젤

단종


어릴 때 휴가 끝나고 돌아와서 빨갛게 된 피부에 알로에로 팩을 했던 기억이 나서 그런지 알로에하면 '진정효과'가 저절로 연상되는 것 같아요. 하루종일 사무실에 있어서 밖에 오래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름이라 그런지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얼굴이 화끈화끈하더라구요. 그럴 때 마침 체험단으로 받게 된 알로에 워터젤! 냉장고에 넣어놓고 시원하게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이 제품을 사용하기 전에는 로레알에서 나온 수분크림을 사용하고 있었어요. 아침에는 로레알 제품을 사용하고, 저녁에는 켈리워터의 제품을 사용했어요.

둘다 수분감이 많은 제품이라 그런지 비슷해보이는데, 켈리워터 쪽이 더 쫀득한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형광빛 도는 색깔이 좀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계속 사용하다보니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다소 혐짤(?)이지만, 질감을 비교하기 위해 올려봤어요. 왼쪽이 켈리워터, 오른쪽이 로레알이예요. 로레알은 수분크림이지만 그렇게 묵직한 느낌도 없고 가벼운 편이라 그런지 켈리워터 쪽이 더 탱글해보이네요. 바르고 나면 켈리워터 쪽이 좀 무거운 느낌이 들지만 더 촉촉한 것 같았어요.



예전에 켈리워터의 버찌젤을 사용할 때도 느꼈지만, 켈리워터는 정말 촉촉한 제품인 것 같아요. 특히 여름에 냉장고에 넣어놓고 쓰면 탱글탱글한 느낌때문에 기분까지 상쾌해지는 제품! 향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고, 적은 양만 사용해도 되서 꽤 오래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살짝 가격이 비싼 감도 있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수분감 있는 제품을 찾으신다면 켈리워터 꽤 괜찮은 것 같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이제는 어느 정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인지 1위 작품 뿐만 아니라 순위권에 올랐던 작품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듯하다. 2006년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1위를 놓고 다투었다는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그런 경우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인데 전혀 기대 없어 읽어서 그런지 간만에 정말 이야기에 푹 빠져서 잠자는 것을 미뤄가며 읽어갔다. 

  대학교 경음악부에서 유독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코올중독분과회'를 만들어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며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졸업 후 각자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꽤 오랫만에 이들은 알코올중도분과회의 멤버인 안도의 주최로 안도의 형의 고급 펜션에 모여 동창회를 연다. 무엇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물건이 없는 장소. 마치 중세의 성 같은 이 장소에서 후시미는 아끼는 후배 니이야마를 죽이기 위해 만발의 계획을 세운다. 완벽하게 밀실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는 후시미. 친구들은 모두 니이야마가 그저 푹 잠들어 있다고 생각할 뿐 니이야마가 죽어 있을 것이라는 '비일상적'인 생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불안해지는 친구들. 어떻게든 문이 열리는 시간을 늦추려는 후시미. 그리고 이 상황에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추리를 시작하는 유코. 그들의 숨막히는 두뇌 대결이 시작된다. 

  발달한 과학수사 탓에 점점 본격 미스터리가 설 자리가 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이런 식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라는 놀라움이 들었다. 부유한 동네에 위치한 고급 펜션. 마음만 먹으면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있고, 문을 부수거나 창문을 깰 수도 있지만 이 책 속의 주인공들은 차마 이웃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해, 어디서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문짝을 부수지 못해 밀실 상태를 유지시킨다. 도시 속에 있지만 외딴 섬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을 보며 저자의 착안에 감탄했다. 

  오랫만에 본격 미스터리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만에 읽는 '도서 추리소설'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범인의 정체가 누군인지 밝혀내는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범인이 누군지를 보여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범인의 심리 상태나 범인의 정체에 도전하는 인물을 통해 긴장감을 이끄는 도서 추리소설. 이 책 속에서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지만 가슴은 뜨거운 후시미와 겉으로 보기엔 후시미와 비슷하게 차가워 보이지만, 실은 속마음도 차가운 유카. 닫힌 문을 두고 이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대결을 시작한다. 니이야마의 죽음을 단순히 사고사로 만들기 위해 후시미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트릭을 하나씩 하나씩 부수며 후시미를 긴장시키는 유카. 대학 시절 핑크빛 로맨스가 있을 뻔한 관계였던지라 뭔가 껄끄러움이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함이 넘쳤다.   

  책 속에서 유카는 결국 후시미의 모든 것(심지어 동기까지)을 파악해 자신이 후시미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적인 면에서는 우수한 유카에게는 인간다움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애초에 후시미가 니이야마를 살해한 동기도 뭐랄까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물론, 그보다도 더 하찮은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만) 그런 동기로 범행을 저지른 후시미보다 후시미의 범행을 속속들이 까발리는 유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남들은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든 그 궁금증을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 감성보다는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는 냉혹한 성격 등등 유카는 예쁘장한 얼굴을 한 추리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유카는 다른 추리소설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일단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이시모치 아사미가 마음에 들어서 다른 작품도 읽게 될 것 같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상작인 <용의자 x의 헌신>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낯선 작가라 다음 작품은 한참 있어야 만날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찾아보니 저자의 다른 작품인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도 얼마 전 출간됐고, <달의 문>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시모치 아사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왜 이제야 만나게 됐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을 정도로 반가웠던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ㅣ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이클 코넬리. 스릴러 좀 읽는다는 이들의 리뷰에서 몇 번이나 만난 이름이었지만, 정작 내가 그의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브론테님의 '코넬리를 읽는 여름밤'이라는 제목의 페이퍼를 보고나서였다. 코넬리에 대한 애정이 팍팍 느껴지는 그 페이퍼를 보고 나는 '이제 정말 코넬리를 읽을 때가 왔구나'라고 절로 생각하게 됐고, 그 덕에 무더운 여름에 어울리는 작가 코넬리와 만났다. (물론 미스터리/스릴러는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 읽어도 진리다.)

  지역 신문사에서 '죽음' 담당으로 일하고 있는 잭 매커보이. 어느 날, 자신의 쌍둥이 형이자 경찰인 숀이 차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얼마 전 있었던 참혹한 살인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의외였던 형의 자살. 잭은 형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얻어 경찰관 자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이내 다른 지역의 경찰관들의 자살 가운데 몇몇 이상한 사례를 발견한다. 자신의 형처럼 참혹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 사건에 얽매였던 경찰관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자살을 했고, 유서로는 에드거 앨런포의 시구를 하나씩 남겼다는 것. 형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임을 알게된 잭. 특종을 쫓아, 형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쫓아 조사를 시작하고 우여곡절 끝에 FBI의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일명 '시인'이라고 이름 붙인 범인.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긴장감 넘치는 조사가 시작된다.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다. 빼어난 경찰도, FBI도, 그렇다고 탐정도 아닌 일개 신문기자인 그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시인'의 범행에 대해 가장 먼저 눈치를 챈다. 하지만 이런 관찰력이나 추론력만이 그의 매력은 아니다.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을 가진 그였지만, FBI 요원인 레이철과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은근 귀엽게 느껴졌고, 툭툭 던지는 (약간은 신경질 적인) 특유의 유머도 매력적이었다. 가지고 다니며 읽기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지만, 그럼에도 근 며칠 출퇴근 시간을 쪼개 이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이 책, 그리고 잭 매커보이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매력 뿐 아니라 에드거 앨런 포의 시구를 남기는 범인의 정체도 매력있었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독자는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나 또한 반전을 기대하면서 읽어가다가 너무 빤하게 범인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어서 '진짜 이 사람이 진범이면 엄청 시시하겠다' 싶었는데, 정작 알고보니 진범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인물이라 놀랐다. 한편으로는 아무 개연성이 없게 느껴졌던 인물이라 저자가 반전을 의도하고 일부러 만들어 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다. (내가 못 알아챘다고 투정하는 게 아니다.)

  매력적인 주인공, 그리고 독특한 범행을 저지르는 범인. 이 때문에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인지 <시인>의 7년 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시인의 계곡>이 곧 한국에도 출간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잭 매커보이는 등장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시인의 타깃으로 지목된 레이철과 해리 보슈 시리즈의 해리 보슈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의 계곡>이 해리 보슈 시리즈의 열 번째라고 하는데, 앞으로 이 시리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어쨌거나, 코넬리를 읽는 여름날, 그 어느 때보다 스릴 넘치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9-08-1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브론테님의 페이퍼를 보고 코넬리를 읽게 됐죠.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읽었었답니다. 마지막이 살짝 헐리우드 영화같아서 저도 별 다섯개까지는 못주겠어요. ㅎㅎ

이매지 2009-08-16 23: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마지막이 좀 헐라우드 영화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거만 아니었으면 정말 별 다섯인데. 아쉽아쉽.

... 2009-08-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지금 그 죽음담당 기자였던 잭 매커보이와 FBI요원 레이첼 월링이 12년 만에 다시 만나는 마이클 코넬리의 신작 The Scarecrow를 막 읽기 시작했어요, 이거 다 읽고 코넬리 페이퍼 2탄 들어갑니다, 음하하.

저도 그 마지막이 좀 작위적이어서, 이게 영화제작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다음 시리즈를 예고하는 것인지 아리까리 하긴 했었어요. 저는 지금까진 링컨차가 제일 재미있었는데,이매지님도 어서 링컨차를 읽어보세요.

이매지 2009-08-16 23:09   좋아요 0 | URL
오오오. 12년 만의 재회라니!! 페이퍼 2탄 기대하겠어요! ㅎㅎ

링컨차가 젤 재미있으셨다니 얼른 링컨차도 읽어봐야겠군요. 그것도 두께가 후덜덜;; 그나저나 결말은 결국 시인이 돌아오는 에피소드가 있는 걸 보면 다음 시리즈를 위한 카드로 빼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

다락방 2009-08-17 08:29   좋아요 0 | URL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12년만에 재회라구요? 기대되잖아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