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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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에서 출신 성분이란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혁명 원로의 손자로서 엘리트 군인의 길을 영웅적으로 밟아 가던 리강은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조명도에게 있어 아예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밤하늘의 별이었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바야흐로 여기는 통일 대한민국이니만큼 얘기는 달라도 한참 달라야 했다. 왜냐. 조명도는 자신이 천생 남조선식 자본주의 체질인 데다가 리강은 노동단증을 전투복 안쪽에 품은 채 아프리카 밀림에서 깜둥이들과 충질이나 해 대다 죽어야 어울리낟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명도는 통일 대한민국이 아름다워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26쪽

서일화의 소견으로 북조선과 남조선의 강력한 공통점은 고위층의 속물근성이었다. 서일화는 북조선에서는 그런 식이었으니 남조선에서는 이런 식으로 속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들이 애초부터 서일화는 웃겼다. 그것을 통일 대한민국이 넉넉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서일화에게는 남조선이 사실이고 북조선이 추상이었다. 옳았다. 추상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북조선은 죽었다. 이 천박하고 잔인하게 뭉개진 자본주의의 만상이 서일화에겐 참으로 리얼한 세계였다. 서일화는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수긍하였다. -38쪽

혁명? 혁명은 국회의사당과 방송국에서 총으로 하는 것이다. 파리의 극장과 길거리에서 "금지를 금지한다." 따위의 문학적인 구호를 외치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공연일 뿐이다.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했다. 무덤을 파 시체 옆에서 잠자는 훈련까지 받았던 그들은 27명이 죽고 둘은 도망쳤으며 나머지 둘이 생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유일한 생존자 스물여섯 살 청년 김신조는 수감 생활 중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기독교 신자 소녀와 결혼하여 훗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24부대원 31인 전원이 각기 한 정 소지하고 있었던 것이 TT33이다. 비록 실패는 했지만 혁명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리강은 믿었다. 그는 피를 지불하지 않는 어떠한 혁명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변화시키고 싶은 간절한 모든 것들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었다. -71쪽

통일 대한민국이 잘 돌아갔다면 지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것도 조국이라면 조국은 어차피 쓰레기가 됐어. 금주법 시대와 마찬가지야. 혼란에 감사하라고. 네 문제가 뭔지 알아? 너는 항상 매사에 답을 구해. 답을 구하지 마. 세상은 주체철학 용어 사전이 아니야. 답을 구하니까 네가 세상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 거야. 답을 구하니까 망자에게 집착하는 거고. 주도면밀한 거? 사내가 물론 그래야지. 그렇지만 각론은 각론이고 총론은 총론이야. 살아남은 인간은 총론에 강하다. 전체를 읽어야 상황이 파악되고 할 일 안 할 일 구분하게 되는 거야. 혼돈의 시대에 각론은 잘해 봐야 감정싸움일 뿐이야. 답? 세상 어디에도 그런 건 없어. 질문도 성립이 안 되는데 답이 어딨어? 네가 이해는 돼. 우리가 그런 사회에서 살았으니까. 선과 악, 적과 동지를 확실히 정해 놓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북조선에서. -73~4쪽

자본주의란 게 결국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바다야. 어디에도 육지가 없는 바다. 사내들은 제 손바닥만 한 배에 돛을 올리고 조만간 어딘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지. 어리석은 짓이야. 정박할 땅이 없는 배가 바다를 이길 순 없다. 파도를 타고 떠돌다 운이 다하면 가라앉을 뿐이야. -80쪽

회사원인 거지. 양쪽 다 회사원. 현실에서 제 잇속만 챙기는 회사원. 짤리거나 진급이 안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회사원. 과자 던져 주면 냠냠 좋아하는 회사원. 국회의원들만 회사원이 아니야.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까지 전부 회사원이니 나머지 놈들은 말 다 했지. 종교인은 거론하기가 귀찮다. 관두자. 예술가는 뿔 달린 수도승이야. 균열이 없는 가슴에서 나오는 미학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회사원이 되지 말아야 그 사회가 건강해지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진짜 회사원들보다도 훨씬 옹졸한 겁쟁이가 돼 버린 거지. 늑대여야 하는 자들이 모조리 애완견이 돼 버린 거라구. 누가 키우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 알아서 기거나 길들여진 놈들이 더 한심하지만. 현실에서 죽음 이후를 겁낼 필요가 없는 사회는 희망이 전혀 없다. 너 말이야, 뭐하는 놈인 줄은 모르겠는데, 한국에서 출세하고 싶거든 절대 비판하지 마라. 비판은 곧 죽음이다. 죽음. 정 하고 싶은 얘기가 있거든 열라 큰 그림을 그려서 얘기해. 못 알아듣게. 회사 중역들이 기분 상하면 그날로 좆 되는 거야. 정말 평생 죽기로 싸우고 나서 져도 절대 후회 안 한다는 열정이 확고할 시에만 비판해. -155~6쪽

넌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 천만에. 그건 이남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야. 여긴 원래 이랬어. 그게 통일 때문에 극심해져서 확연히 드러난 것뿐이지. 구더기는 썩은 살에 천사처럼 갑자기 나타나 들끓는 법이야. 아니라고 믿는 자들에겐 불행의 이유까지 제공하니 얼마나 좋아? 하핫. 나는 남조선이라고 해서 뭐 별것이 있는 줄 알았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주케 하는 것이라고? 맞아. 그런데 이북 사람들과 이남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저 끔찍한 시점에 거의 다 다른 것 같다. 머지않아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들이 펼쳐질 것 같아. 나는 여기서 그것들을 겪으며 끝까지 내 거짓의 죗값을 치를 작정이야. 하지만 리 부장 너는 달라. 너는 나라를 지키는 순결한 군인이었잖니? 그 허위로 유지되던 나라가 사라졌으니 어디서든 새롭게 시작할 자격이 네겐 있어. 아직 젊고 영혼이 남아 있을 때 이 화약고를 떠나.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데리고 네 조국이 되기에는 서로운 이 조국을 떠나라.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누구인지를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네 인생의 답을 구하고 얻어 내. -183쪽

폭동은 논리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화약고에 불을 붙이면 터지고 보는 게 폭동이에요. 다 불타 버리고 나서 이러니저러니 해 봤자 부질없구요. 폭동의 본질은 동기가 아니라 증오의 폭발 그 자쳅니다. 심지어는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쟁도 그래요. 전쟁 전에는 명분을 들먹이지만 전쟁이 진행되다 보면 명분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죠. 그냥 작동되는 겁니다. 폭력이란 게 원래 그래요.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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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도 출신 성분은 중요한데요.부모가 부자야라지만 비싼 과외를 받고,자사고나 외고에 들어가 SKY이나 외국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에 취직하니까요 ㅜ.ㅜ

이매지 2009-08-19 13:05   좋아요 0 | URL
우리도 어느 정도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걸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거 같지는 않아요. 뭐 돈을 들이 부어도 안 되는 놈들은 안 되던데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