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절판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5쪽

그녀가 나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능력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신사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며, 불필요한 감상을 끊어 내고 그녀가 없는 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후에 행해진 나의 '연구'는 그녀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 같은 것과는 무관하며, 철저히 냉정하고 신사적으로 행해 왔음에 틀림없다. 이상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말없이 끊거나, 주위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을 나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나에게 감사하면 했지, 그런 사내를 앞잡이로 내세워 내게 수치를 겪게 할 필요는 단연코 없었다. -33~4쪽

그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이건 내 꿈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중학생 시절의 어리석음을 다 드러낸 꿈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과거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 실패의 퇴적 위에 세워진 존재다. 태곳적 생물들의 유해가 석유가 되어 현대 문명을 쌓는 초석이 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연료로 태워 이제는 멋지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나라한 과거를 당당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파헤쳐 내지 않았다면, 세상에 숱하게 방출되어 맘껏 환경을 파괴시키는 플라스틱 제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0 ~1쪽

우리는 매우 절도 있는 인간이므로 술에 취해 정신을 놓는 일은 없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전에 전선에서 퇴각하는 방침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재빨리 변기에 게운 후 철수한다. 자신의 에틸알코올 분해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게다가 토사물을 투하할 장소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술을 마시는 학생이 많은 세태가 심히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순히 유감으로 끝날 일이겠는가, 같은 학생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고 우겨 댈 생각이라면, 술집 계단에 잘못 투척한 토사물을 자기가 빨아들일 정도의 각오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46쪽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화려하진 않더라도 뭔가 인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보는 것 같은 고상한 경험이 나에게 있느냐 하면, 그런 깊이 있는 일과는 인연이 없다. 작금의 젊은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갈수록 현대 문명에 의지하는 나날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것 또한 젊은이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나는 선택된 인간'이라는 역겨운 프라이드를 나 역시 품고 있다. 이 또한 있을 법한 일이긴 하겠으나, 선택된 자로서의 그 어떤 황홀도 불안도 일상 속에서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 네가 '선택되었다'고 확신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눅눅히 젖어 있는, 모두가 눈길을 피해 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어둠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56쪽

일상은 간결한 게 최고다. 진정한 위업은 극적인 일상과는 무연한 장소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이거다'라고 드러낼 수는 없는 게 유감이지만, 나 역시 세계사에 남을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이므로 사색을 흐트러뜨리는 파란만장한 일상 따윈 원치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살짝 외로워질 때만 마음을 써 주면 충분하다.
그러나 마음을 써 주길 원할 때는 마음을 써 주지 않고, 그냥 혼자 내버려 두길 원할 때는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세상사이게 마련이다. -56~7쪽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사정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들의 망상에 상처 입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했는데,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세상이 썩었는지 우리가 썩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풍부하고 지나치리만큼 참혹한 망상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시카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87쪽

"언제 술 한잔 하자."
그가 말했다.
"이도가 또 축 처져 있어. 위로해 줘야지."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침울해 있는 인간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다."
시카마가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잖아."
"도움도 안 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은 없어. 난 다만 그의 강렬한 질투에 경의를 표하고, 그 결말을 조용히 응시하고, 그리고 기탄없이 즐길 뿐이지."-106~7쪽

긴긴 하루였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뒤늦게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현대 문명에 철저히 의존해 살아가긴 해도, 양친과 지구환경 외에는 부끄러워할 대상 하나 없이 조개와 같은 무해한 생활을 하고 있건만, 스토커 놈에게 스토커라고 불리질 않나, 애차 마나미호가 어딘가로 끌려가질 않나, 교토대생 사냥에 쫓기질 않나, 망상에 빠진 빚쟁이가 찾아오질 않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질 않나,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챙겨 주길 원치 않을 때에만 챙겨 주길 원치 않는 인간이 일상을 침범해 들어오는 잔혹한 현실. 그리고 정작 챙겨 주길 원하는 사람은 날 챙겨 주지 않는다. 딱히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128~9쪽

우리는 인류를 구제하게 될 거대한 에너지를 떠올려 보았다. 좌절, 실연, 죽음에 이르는 병, 모든 고뇌가 유익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자동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를 띄우고, 인터넷은 어디서든 연결되고, 아이돌 비디오도 실컷 볼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멋진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도처럼 과도한 고통을 끌어안은 자가 인류의 구세주로 각광을 받고, 숨 막힐 정도로 포지티브한 인간은 몽땅 수납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50쪽

작금의 세상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악령이 설쳐 대고 있다. 일본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부조리는 일단 눈 감아 주기로 하자.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건 좋다. 설령 그것이 켈트 신앙을 기원으로 한 정체 불명의 흰 수염 할아버지가 이뤄 주는 '물욕'의 꿈이라 할지라도. 하나 작금의 크리스마스와 연애 예찬주의의 잘못된 습합까지 허락해 줄 까닭은 없다. 목청껏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실로 폭력적인 일이다. -154쪽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듣고 싶지도 않은 행복의 구가(謳歌)를 들어 줘야 할 의리 따윈 없다고.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불합리한 열등감을 맛보며 하숙집에서 냄비를 끌어안고 우울하게 지내야 할 의리도, 보통 사람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다느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다느니 하는 무익한 번민을 끌어안아야 할 의리도 없다고! 그들은 분명 수많은 샘플을 눈앞에 늘어놓고 제군에게 '행복'을 제시해 보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이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마치 학생의 본분인 양 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닥쳐, 닥치라고. 학생의 본분은 학문이다. 사랑에 정신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면 좀 더 학문에 매진하란 말이다, 이 미친 새끼들아! -154~5쪽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 어리석은 틀에 박히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현혹시키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행복도 좋다고, 우리가 중얼거린 적도 있지 않을까. -200~1쪽

사랑 따위로 뻐길 게 뭐 있어? 사랑하는 놈이 그리 잘났나?
현대 풍조에 연애 예찬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디 불합리한 정서인 연애를 칭송하는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인간 저변에 깔린 어두운 감정을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치장한다 해도, 언젠가 그것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본성을 드러낸다. 막상 그 광기에 직면해 그럴 리가 없다고 신음해본들 이미 때는 늦다. 흔히 '비뚤어진 애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연애라는 것 자체가 애당초 어딘가 비뚤어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리 기쁜 듯 행복한 듯 싱글벙글 만족해하는 걸까.
사람들은 광기의 구렁텅이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뭇사람들에게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몸을 던지고 싶다, 몸을 던지지 않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 부끄럽다고까지 생각한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구렁텅이에 빠진 모습이며, 빠지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217~8쪽

연애는 어디까지나 배은망덕한 기쁨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남의 눈을 피해 맛보아야 할 금단의 과실이다. 그것을 마치 인생에 당연히 열리는 과실인 양 장소를 안 가리고 먹어 대고, 과즙을 남에게 튀겨 대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인식해야 마땅하다.
만천하에 우글거리는, 팔짱을 낀 남녀들에게 고하노라.
"살아가라, (그러나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라."
-218쪽

그러나 취해선 안 된다. 결코 자신에게 취해선 안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눈 내리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한동안 끙끙 힘을 내봤지만,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자신에게 취하게 해 주자고 마음먹고 나는 울었다. -245쪽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하긴, 아마도 나 역시 잘못됐을 것이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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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구판절판


사랑은 간절한 바람,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상태, 어떤 열병과도 같은 것, 끊임없는 성적 판타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유일무이하게 타당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느낌을 뜻했다. 헬렌 빌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감정은 더욱 특별하고 강렬해졌다. 그것은 연필로 그어진 몇 개의 선들만 가지고도 별 어려움 없이 어떤 얼굴을 떠올릴 수 있고, 단 몇 줄의 문장만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성격을 그럴듯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과 흡사했다. 함께 휴가를 떠나 그리스 섬들을 돌아보고, 파티가 끝날 무렵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고, 기차에서 사랑을 나누고, 남은 생을 함께할 어떤 사람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는 그녀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14~5쪽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 -19쪽

에로티시즘이란 결국 벌거벗은 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는 심리적 기대감에서 비롯되는데, 어쩌면 스키복과 모자로 꽁꽁 싸매고 나란히 리프트에 앉아 산기슭을 오르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22쪽

현대의 바람직한 결혼생활을 통해 경험하리라고 기대되는 감정들 가운데 새삼스러울 만한 것은 전혀 없다. 그것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각종 예술과 문학작품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대의 결혼에 담긴 야망이 예사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결혼이 그러한 감정들을 평생에 걸쳐 반드시 '단 한 사람'에게만 품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28쪽

부르주아의 이상이 결코 허왕된 꿈은 아니다. 로맨스와 에로스,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 가지 황금요소를 완벽하게 융화시킨 궁극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종종 냉소주의자들은 행복한 결혼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치부하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긴 해도, 궁극의 결혼은 분명 존재한다. 결혼이 우리의 소망에 부응하지 말아야 할 형이상학적 이유 같은 건 없다. 다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할 뿐이다. -34~5쪽

사회적 관계의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만 많고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직장 동료들은 하루 종일 성심성의껏 대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선 잔소리를 평소보다 조금 심하게 했다거나 열쇠꾸러미 챙기는 걸 깜빡했다는 이유로 솜씨 좋고 상냥한 아내를 매몰차게 면박 주는 남자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마도 그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고, 어쩌면 이런 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42~3쪽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붙는다. -71쪽

창녀와 나쁜 남자는 소유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우리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과 이상한 습벽들을 환기하는 영원한 목격자로 행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섹스는 잘 아는 사람과 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110쪽

우리를 둘러싼 현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기대를 주입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고, 우리 또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묘기는 경우에 따라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133쪽

우리의 문화는 사랑도 믿고 일도 믿지만, 사랑을 위한 일의 가치는 믿지 않는다. 아직도 낭만적 충동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숙명적으로 끌린다. 연습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며, 만일 열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헌신에 대한 약속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믿는다. -156쪽

한때 그는 용기를 다르게 생각했다. 어렸을 적 그는 용을 잡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행군을 그렸었다. 지금 그는 새로운 그림을 가졌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미치거나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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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5-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안녕? 저 간만에 서재 기웃기웃하는데, 이매지님은 여전히 부지런부지런하시군요. 부럽고 부끄러워요.

이매지 2012-05-13 22:42   좋아요 0 | URL
엇. 생일주간인 네꼬님이다! ㅎㅎ
저 4월에 완전 태업하다가 몇 개 올렸는데 네꼬님이 부지런하다고 하시니 어쩐지 부끄럽구요. ㅎㅎ
 
신참자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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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소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내에 가장 많이 소개된 작가 중에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 워낙 다작을 하는 편이기도 하고(그래서 작품의 퀄리티가 들쑥날쑥하지만), 영상화해도 좋겠다 싶은 작품도 많다보니 그의 작품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 경우가 꽤 많다. 더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용의자 X의 헌신>부터 <백야행>, <명탐정의 저주>, <유성의 인연>, <갈릴레오>, <비밀> 등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순히 '미스터리'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로 다양한 독자(혹은 관객)을 만나왔다. 그렇게 많은 영상물 중에서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이 <신참자>였다. 가가 형사 시리즈야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기에 가가 형사와는 구면이었지만 책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와 아베 히로시의 모습으로 만나는 가가 형사는 사뭇 달랐다. 일본에서 드라마로 꽤 인기를 끌었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도 선정된 작품이라 금방 번역되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려 출간된 <신참자>.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더 반갑게 읽기 시작했다. 

  혼자 살아가던 40대 이혼 여성 미쓰이 미네코가 도쿄 니혼바시의 한 아파트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던 미쓰이 미네코. 왜 그녀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인지, 대체 누가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인지 좀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니혼바시 경찰서에 갓 부임한 형사 가가 교이치로는 관할서 형사로서 미쓰이 미네코 주변의 탐문수사를 시작하고, 닌교초 거리에서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센베이 가게, 민속 공예품점, 시곗방, 요정 등 아직 옛 풍경이 남아 있는 닌교초 거리.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히 고인 물처럼 무사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이 거리에는 몇 개의 비밀과 거짓말이 잠들어 있다." 닌교초 사람들이 각자 품고 있는 소소한 거짓말 혹은 비밀. 이 거리의 '신참자'인 가가 형사는 조금씩 어느샌가 이 거리의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크게는 미쓰이 미네코란 여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지만, 생전의 그녀의 모습을 되짚는 과정에서 가가 형사가 만나는 닌교초 사람들에 더 눈이 간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사소한 비밀들. 그 비밀을 알아챈 가가 형사가 당사자들을 배려하면서 움직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 또는 오해를 풀어주는 과정을 읽노라면 어딘가 너무 한가해보여서, 왜 잡으라는 범인은 안 잡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고 다니나 싶어지기도 한다. 이런 독자의 반응을 예상했던 것일까. 가가 형사는 이런 의문에 이렇게 답한다.

 

 "형사는 수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사건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피해잡니다. 그 피해자를 치유할 방법을 찾는 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이거 뭐 작가 스스로 <신참자>의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한 것 같다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까지 신경 써주는 가가 형사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진다. 이전에 출간된 다른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도 그렇지만 가가 형사라는 캐릭터 자체가 배려심 있고 따뜻한 형사라는 점 외에는 사실 큰 개성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고, 전체적인 전개가 사람에 맞춰져 있다보니 본격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한번쯤 닌교초 거리를 거닐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쯤 이 가슴 따뜻한 형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얽히고설킨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드라마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으면 두 배로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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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5-1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가가 형사 좋더군요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도 좋고 이번에 영화를 기대하고 있어요

이매지 2012-05-21 19:25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 기대하고 있어요.
아베 히로시와 가가 형사 은근히 참 잘 어울려요. ㅎㅎ

유부만두 2012-06-10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sp 까지 챙겨봤어요. 그런데, 범인이 누구였더라, 기억이 안나네요;;;

이매지 2012-06-11 13:28   좋아요 0 | URL
범인은 바로!!!! ㅎㅎㅎ
책으로 만나보셔요. ㅎㅎ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짧은 봄밤에 필스너 한 잔 하며 읽기 좋은 책. 심야식당의 일상추리소설 버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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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5-0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 그림이 좋군요.
근데 필스너란 음료가 있었나요? 그건 어떤 맛이기에...?^^

이매지 2012-05-08 12:01   좋아요 0 | URL
필스너는 맥주 브랜드입니다. ㅎ
책 표지는 커버랑 안이랑 조금 다른데, 둘 다 책의 내용을 담고 있지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품절


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11쪽

내 학창시절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때가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학교였기 때문에,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제는 일화가 된 몇몇 사건과, 시간이 변모해가면서 확신으로 굳어진 덕분에 꽤 사실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게 된 몇몇 기억들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실제 사건들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가질 순 없어도, 최소한 그런 일들이 남긴 인상에 대해서만은 정직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12~3쪽

인생에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우리 부모들을 보라. 그들이 문학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진짜의, 진실된, 중요한 것들의 사회적 배경막의 일부로서 등장하는 구경꾼이나 방관자 정도라면 모르겠다. 그 중요한 것들이 무어냐고? 문학이 아우르는 모든 것이다. 사랑, 섹스, 윤리, 우정, 행복, 고통, 배반, 분륜, 선과 악, 영웅과 악당, 죄악과 순수, 야심, 권력, 정의, 혁명, 전쟁,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사회에 맞서는 개인, 성공과 실패, 살인, 자살, 죽음, 신 같은 것들. 아, 외양간올빼미도 있군. 물론 다른 종류의 문학도 있다. 연극적이고, 자기반영적이고, 눈물을 자아내는 자전적인 문학. 하지만 그런 건 지루한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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