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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평점 :
예전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덕분에 알게 된 일본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서점대상을 알게 되었다. 그 상의 1회 수상작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었던 것.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책을 선정할 정도라면 이 상을 믿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사실 읽기 전에는 돈을 받고 선정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정작 작품이 너무 좋아서 믿음으로 마음이 기운 것.) 그런 면에서 2회 수상작인 이 책은 일단 재미가 보장된 셈.
이 책의 주인공들은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쌓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학교의 행사인 보행제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행동의 변화들을 풀어가고 있다. 고등학생들의 행사라고 다소 우습게 보다간 큰코 다칠 정도로 이 학교의 보행제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밤을 새워 무려 80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행사. 모두가 줄지어 그저 걸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하나의 추억만들기는 충분할 듯 싶다.
책 속에 등장하는 보행제처럼 뭔가 어마어마한 거리는 아니지만 사실 나도 고등학교 때 비슷한 행사를 경험했었다. 매년 5월이면 학교에서도 먼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가서 10킬로미터 마라톤대회를 했던 것. 왜 거기까지 가서 행사를 해야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1학년 때는 나름대로 순위권에 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2학년 때는 나름대로 몸을 사리겠다는 생각으로, 3학년 때는 그저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산책간다는 생각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3학년 때는 아예 뛰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간 덕분인지 등수는 뒤에서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지만 그 때 10킬로미터를 함께 걸으며 친구들과 노래도 함께 듣고 음식도 나눠먹었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보행제에 참가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의 기억을 다시금 더듬어볼 수 있었다.
단순히 길을 걷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밋밋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다카노와 도오루는 이복남매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들은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 게다가 같은 반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벽을 설정해두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이상한 반응때문에 둘은 사귀는 것이 아니냐는 주위의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둘은 그저 "쟨 나를 싫어할꺼야"라고 얘기할 뿐. 누구에게도 자신들이 이복남매임을 밝히지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던 그 둘의 관계는 보행제를 계기로 바뀌게 된다. 시시각각 변하게 되는 다카노와 도오루의 감정.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조금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80킬로미터를 걸어야만 하는 압박감, 하지만 옆에는 친구가 있기때문에 힘을 내서 걸을 수 있는 아이들. 아무리 다리가 뻐근하고, 발에 물집이 잡혀서 걷기가 힘들어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친구가 옆에 있기때문에 그들은 무사히 보행제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80킬로미터를 걷는 행사가 아니라 보행제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친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그들은 얻게 된 것. 출발점에서는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무사히 도착점으로 들어오게 된다. 비단 그런 일들은 보행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그들은 보행제를 통해 좀 더 성장하고, 좀 더 생각의 깊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보행제에 대한 추억도, 나의 10킬로미터 마라톤의 추억도 다시 하라고 하면 으음. 그런 경험은 3번만으로 족하다고,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추억은 추억일 때 소중한 것이니까.
어쨌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소설을 건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다음에 소개될 서점대상은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덧)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다소 헷갈리니 옆에 종이에 간략한 사항을 써두고 읽는 센스가 필요할 것 같다. 출판사에서 이런 센스를 발휘해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