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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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덕분에 알게 된 일본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서점대상을 알게 되었다. 그 상의 1회 수상작이 바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었던 것.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책을 선정할 정도라면 이 상을 믿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사실 읽기 전에는 돈을 받고 선정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정작 작품이 너무 좋아서 믿음으로 마음이 기운 것.) 그런 면에서 2회 수상작인 이 책은 일단 재미가 보장된 셈.

  이 책의 주인공들은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쌓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학교의 행사인 보행제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행동의 변화들을 풀어가고 있다. 고등학생들의 행사라고 다소 우습게 보다간 큰코 다칠 정도로 이 학교의 보행제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밤을 새워 무려 80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행사. 모두가 줄지어 그저 걸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하나의 추억만들기는 충분할 듯 싶다.

  책 속에 등장하는 보행제처럼 뭔가 어마어마한 거리는 아니지만 사실 나도 고등학교 때 비슷한 행사를 경험했었다. 매년 5월이면 학교에서도 먼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가서 10킬로미터 마라톤대회를 했던 것. 왜 거기까지 가서 행사를 해야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1학년 때는 나름대로 순위권에 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2학년 때는 나름대로 몸을 사리겠다는 생각으로, 3학년 때는 그저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산책간다는 생각으로 행사에 참가했다. 3학년 때는 아예 뛰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고 간 덕분인지 등수는 뒤에서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지만 그 때 10킬로미터를 함께 걸으며 친구들과 노래도 함께 듣고 음식도 나눠먹었던 일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보행제에 참가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의 기억을 다시금 더듬어볼 수 있었다.

  단순히 길을 걷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이야기는 밋밋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다카노와 도오루는 이복남매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들은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 게다가 같은 반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벽을 설정해두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이상한 반응때문에 둘은 사귀는 것이 아니냐는 주위의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둘은 그저 "쟨 나를 싫어할꺼야"라고 얘기할 뿐. 누구에게도 자신들이 이복남매임을 밝히지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던 그 둘의 관계는 보행제를 계기로 바뀌게 된다. 시시각각 변하게 되는 다카노와 도오루의 감정. 그리고 마침내 둘이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조금 더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80킬로미터를 걸어야만 하는 압박감, 하지만 옆에는 친구가 있기때문에 힘을 내서 걸을 수 있는 아이들. 아무리 다리가 뻐근하고, 발에 물집이 잡혀서 걷기가 힘들어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는 친구가 옆에 있기때문에 그들은 무사히 보행제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80킬로미터를 걷는 행사가 아니라 보행제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친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그들은 얻게 된 것. 출발점에서는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무사히 도착점으로 들어오게 된다. 비단 그런 일들은 보행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그들은 보행제를 통해 좀 더 성장하고, 좀 더 생각의 깊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보행제에 대한 추억도, 나의 10킬로미터 마라톤의 추억도 다시 하라고 하면 으음. 그런 경험은 3번만으로 족하다고,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 추억은 추억일 때 소중한 것이니까.

  어쨌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 편의 소설을 건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다음에 소개될 서점대상은 어떤 책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덧)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다소 헷갈리니 옆에 종이에 간략한 사항을 써두고 읽는 센스가 필요할 것 같다. 출판사에서 이런 센스를 발휘해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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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13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보셨군요. 그냥 잔잔하죠. 일본 소설 같은 느낌은 안나요.

이매지 2006-05-13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회 수상작인 <박사가 사랑한 수식>도 일본소설 느낌 별로 안 나고 따뜻하고 잔잔한 느낌이라 좋았었거든요^^ 이 책도 비슷한 느낌. 혹 <박사가 사랑한 수식> 안 읽어보셨으면 읽어보세요^^

마늘빵 2006-05-1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첨들어보는데 찾아봐야겠군요.

아망딘 2006-05-1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매지님..리뷰가 깔끔하고 매끄러와요..저도 이거 읽고 참 좋았었는데..님덕분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이라는 책도 알게 되었네요 ^^

이매지 2006-05-1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리번 두리번. 아망딘님. 어딜 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 버럭! ㅋㅋ
박사가 사랑한 수식. 만족하실꺼예요^^
 
이성과 감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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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오만과 편견>이 국내에 개봉해서 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영화덕분인지 원작인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고 여러 출판사에서 앞다퉈 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아쉬웠던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가 <오만과 편견>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었다. 기존에 나온 그녀의 다른 작품들은 시덥잖은 번역(혹 번역가가 이 글을 본다면 기분나빠하겠지만 내게 있어서 범우사판의 <맨스필드파크>는 최악의 번역이었다.)으로 출간되어 있거나 절판되서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형편이어서 그런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러던 중, 그녀의 다른 작품인 <이성과 감성>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을 때 내심 기뻐하며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다시 번역되서 나왔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오랜 시간 기다렸던 책이기때문에 반가움에 집어들었다.

  <오만과 편견>에서처럼 이 책의 내용도 영국의 전원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자매의 사랑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노신사 대시우드의 사망으로 시작된다. 그의 조카인 헨리 대시우드(그에겐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한 명과 현재의 부인과의 결혼에서 얻은 딸 셋이 있다.)는 법적 상속자로 원래대로라면 그가 상속을 받아야만 했지만 노신사는 상속의 반을 네살짜리 손자에게 상속시켜줬고, 세 손녀딸들에게는 고작 천 파운드씩을 상속시켜줬다. 그럼에도 낙천적으로 희망을 가졌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헨리 대시우드가 병으로 죽게 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본디 성품은 나쁘지 않은 아들이었지만 부인인 패니의 말에 넘어가 누이동생들에게 별다른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러던 중 먼 친척의 도움으로 그들은 결국 정든 고장을 떠나 새로운 고장으로 떠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저마다의 사랑을 찾게 된 두 자매, 엘리너와 메리앤. 둘 다 지성과 외모를 모두 겸비했지만 언니인 엘리너는 분별력이 있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탁월한 이성적인 여자라면, 동생인 메리앤은 감정에는 충실하나 그것을 절제하지 못해 지나치게 감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진 여자다. 이들의 이런 성격은 사랑을 하는 데에서도 드러나 엘리너는 에드워드란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와의 애정은 겉에서 보기엔 알아채지 못할 정도. 하지만 메리앤의 사랑은 그야말로 누가봐도 사랑에 빠져있음을 알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 둘의 각기 다른 사랑이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그들을 둘러싼 상황과 함께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다소 지지부진해보일지도 모른다. 조용한 영국의 전원풍경처럼 이 책의 내용도 조용히, 잔잔하게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고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식과의 갈등, 연인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오해, 돈과 결혼의 상관관계, 사랑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은 결코 조용하고 잔잔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작가의 시선(혹은 어투)은 평온하게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독자에게는 지극히 '이성'적인 엘리너와 지극히 '감성'적인 메리앤, 두 자매의 모습 중 과연 어떤 쪽이 긍정적인가에 대한 저울질을 넌지시 비추고 있다. 작가 스스로 어떤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 않은 듯하지만 내 생각엔 메리앤이 실연을 당한 후 좀 더 공부에 힘쓰고 예의를 배우겠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마 제인 오스틴은 이성을 좀 더 중시하지 않았나하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엘리너를 보면서는 '저러다 홧병이라도 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었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메리앤을 보면서는 '저러다 헤어지면 고개를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성'과 '감성'의 중용의 덕을 지킨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평범한 우리네들은 둘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을. 두 자매가 각각 만나는 상대들의 성격차이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고, 영국 사회의 일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흥미로웠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은 대개 내용이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그 속에 든 저마다 다른 메세지들이 마음에 든다. 현대의 뻔한 사랑이야기와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고.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접하고 보니 또 다시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1) 이 책의 원제는 <센스 앤 센서빌리티Sence and Sensibility>이다. 요새 한참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안감독이 1995년에 영화화하기도 했던 작품으로 영화엔 엠마 톰슨, 휴 그랜트, 케이트 윈슬렛 등이 출연한다. 혹, 책을 읽고 구미가 당기는 분들이나 책의 내용을 간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영화를 봐도 좋을 듯 싶다. 

 덧2) 이 책의 번역은 대체로 매끄러운 편이나 곳곳에서 낯선 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남사스럽다'라고 하는 것을 '남세스럽다'라고 표헌하고 있는데 사실 어감이 낯설어서 그렇지 표준어는 '남세스럽다'이다. 이 외 '지청구'와 같은 낯선 단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번역이었다. 내가 알기로 윤지관 교수는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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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미온♥ 2006-09-0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범우사의 맨스필드 파크는 읽기가 괴롭더군요! 도데체 누가 누나고 동생인지..노생거 사원과 설득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없구요. 이럴 땐 영어 못하는게 한탄 됩니다.ㅜㅜ

이매지 2006-09-08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스필드파크도 제대로 번역되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름대로 제인 오스틴 책들이 많이 나와서 기대했는데 영 소식이 없네요. 노생거사원과 설득도 엉망이군요. 흑흑. ㅠ_ㅠ 영어공부를 하는게 더 빠를까요? ㅠ_ㅠ

박원희 2007-01-2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이 번역도 그리 매끄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은데요. 참을 수 없는 영어식 표현들이 너무 거슬려서요. 신경쓰기 시작하니까 계속 보인다는...^^; 최악은 아니었지만 제인오스틴의 위트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라피포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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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더풀>과 <공중그네>로 내게 즐거움을 한껏 선사해줬던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라라피포>. 갓 나왔을 때부터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인데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신착도서 서가에 꽂힌 것을 발견하고 냅다 집어든 책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전작에서 보여준 유머와 엽기적 사고방식은 이 책에서도 유효하다. 그렇지만 이 전에 그의 작품에서 만나본 사람들은 마음의 고민을 가지고 그것을 풀지 못해 끙끙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모습부터 시원찮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인공포증때문에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남자, 그는 한동안 윗층 남자가 내는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와 여자가 내는 신음소리때문에 갑자기 잊고 지낸 섹스를 떠올리고 자위를 했고, 심지어 윗층의 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고자 빡빡한 재정상태에도 불구하고 도청기까지 사는 모습을 보인다. 그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뚱뚱해서 여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어보이는 여자는 알고보니 남자를 끌어들여 음란 DVD를 촬영하고 있고, 머리가 반쯤 벗겨져서 한 풀꺾인 모습인 관능소설 작가는 취재를 한답시고 여고생을 탐닉한다. 소심해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남자는 이리저리 휘둘리고 심지어 남의 부탁으로 방화까지 저지른다. 게다가 하루하루 누워서 빈둥대며 무료한 생활을 보내던 한 40대 주부는 길에서 우연히 에로물 배우로 캐스팅 되어 출연한다. 그들은 누가봐도 뭔가 비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전작 <공중그네>에서 만나본 주인공들은 자신의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시도(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이라부에게 찾아가는 것)를 하고 있다면, 이 책 속에서 주인공들은 그저 열심히 되는대로 타인의 육체를 탐닉하고, 쾌락에 빠져만 있을 뿐 현실을 벗어나려는 의지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설사 조짐이 보였다고 해도 금새 꺼져버리는 불꽃같은 조짐이었을 뿐.  

  솔직히 말하면 <공중그네>에서 유쾌한 웃음을 생각하고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아마 실망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책도 이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지만.) 둘의 구성(여러명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라라피포>속에는 이라부같이 문제점을 해결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변화하고 싶어도 그들에겐 변화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진다. 이라부의 도움으로 사회와 다시 어울려서 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이 책 속에 사람들은 사회 밖에서 떠도는 사람들이다. 물과 기름처럼.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해봤을 때 이 사회라는 굴레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또 몇이나 될까. 결국 그들은 사회 밖에서 표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지 못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들은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지 않을까. 명문대를 나와 여기저기 원서는 찔러넣지만 아직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 권태로운 일상에 마냥 따분해 하는 사람, 성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삶 자체가 불만인 사람, 만사를 삐딱하게만 보려는 사람 등등. 이 사회 안에는 <라라피포> 속에 등장한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나비의 날개짓으로 허리케인을 불러올 가능성이 생기는 것처럼 이 책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자포자기하고 변화를 어려워한다면 우리도 결국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모습을 한심해하면서 살아갈 지도 모르겠다. 작은 변화가 몇 년 뒤의 모습을 확 바꿔놓을 수 있지 않을까. <라라피포> 속의 주인공들이 <공중그네>의 주인공들처럼 '변화'했다면 그들에겐 어떤 미래가 다가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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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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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얼핏 봐서는 하루키의 책이라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이 책의 제목은 독특했다. 처음에 이 제목을 봤을 때 난 <망량의 상자>나 <우부메의 여름>을 지은 쿄고쿠 나츠히코를 떠올렸었다. 적어도 기담은 왠지 하루키와는 멀어보였고, 책의 표지도 기묘한 느낌이 감돌았다랄까. 이 뿐 아니라 책장을 처음 폈을 때 만나는 첫문장인 "나, 무라카미는 이 글을 쓴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대강 3인칭으로 진행되지만, 화자가 이야기의 첫머리에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이게 단편소설집이 맞나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게끔 했다. 어쨌거나 다소 하루키스럽지 않다고 생각한 요소들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넘겨갔다.

  책은 총 5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우연한 여행자, 하나레이 만,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 날마다 이동하는 신장처럼 생긴 돌, 시나가와 원숭이' 이 다섯편의 이야기는 제목에 걸맞는 이야기들이다. 즉, 뭔가 좀 기이한 이야기들이라 현실감이 없어보이긴 하지만 또 한 켠으로는 이 세상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이야기기도 한 그런 이야기들.

  첫 이야기인 우연한 여행자에서는 하루키 자신이 경험한 사소한 우연을 이야기(한 공연에서 자신이 연주해줬으면 하는 두 곡을 연주자가 잇달아 연주한 일)하고 뒤이어 그 이야기를 듣고 지인이 꺼낸 이야기를 소개한다. 서점 카페에서 디킨스의 책을 읽고 있었던 한 피아노 조율사가 마침 옆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은 여자와 알게되고, 그녀와 만나면서 자신의 누나와 같은 자리에 점이 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유방암 검진을 받는다는 말을 그에게 하고, 그는 뭔가에 끌려 오랜동안 연락을 끊어왔던 누나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녀 또한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다소 극적이긴 하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은 아닌 이야기랄까.

  두번째 이야기인 하나레이만에서는 서핑을 하러 하나레이 만에 갔던 아들을 상어의 습격에 의해 잃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자는 이 후 1년에 한 번씩 아들을 떠올리며 그 곳을 방문하고 어느 날 그 곳에서 우연히 일본인 히치하이커를 태우면서 그들의 입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세번째 이야기에서는 잠시 두 층 아래에 사는 시어머니를 보러 간 남자가 지금 올라가니 팬케이크를 구워달라는 말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내의 의뢰를 받고 남편의 자취를 찾으려하는 한 남자. 내가 종종 보던 드라마인 Without a trace(미 FBI 실종자 전담반의 이야기)가 왠지 생각나는 그런 이야기. 의뢰를 받은 남자는 남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남편이 사라진 계단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네번째 이야기는 한 소설가의 이야기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의 여자는 단 세 명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에 최면에 걸린 것 처럼 빠진 남자는 진정한 의미의 여자를 기다리던 중 한 여자를 만나고 그녀를 통해 신장처럼 생긴 돌이 이동하는 다소 기이한 이야기를 지어내는데... 마지막 이야기인 시나가와 원숭이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종종 기억하지 못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는 데 별 지장은 없지만 나름 불편을 느꼈던 그녀는 우연히 구청에서 하는 상담소를 찾아가게 되고 그 곳에서 이름을 되찾게 된다.

  이렇듯 다섯개의 이야기는 소설의 허구성과 현실의 진실성을 넘나드며 아찔한 곡예를 한다. "에이 그런 일이 어디있어!"라고 치부하기엔 진실성이 있어보이고,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단정해버리기엔 허무맹랑한 이야기. 마치 예전에 즐겨 보던 토요 미스터리가 생각나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도쿄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배경은 그리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 정도로 이 곳이 도시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랄까. 하루키의 다른 이야기들처럼 존재나 사유에 대한 부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하루키의 이야기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흡입력이나 허구와 진실을 오가는 점들은 변하지 않은 듯 싶다. 그리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이기때문에 하루키에 거리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작지만 기묘한 우연들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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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벌써 보셨네요. 빠르다. ^^

이매지 2006-04-16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안 두꺼워서 금방 봐요^^ 1시간 남짓 걸린듯.

비로그인 2006-04-17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한 시간 남짓 밖에 안걸려요?
책 빨리 읽는 사람들 진정 신기해요...
매지님은 하루에 두세권 읽는 것도 껌이겠어요.
전 님 두,셋 읽을 시간에 겨우 한 권 끝마칠걸요?

이매지 2006-04-17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안 두껍고 그렇게 안 어려운 책이라니까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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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름 베르테르. 그는 훌쩍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대자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 가서 모처럼만에 자연과 더불어, 아이들과 더불어 즐거운 생활을 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는 행복한 기운을 온 몸으로 느낀다. 그런 그에게 운명같이 찾아온 한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로테. 뭐 하나 흠잡을 구석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여자인 그녀는 단숨에 베르테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를 그녀의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로테는 이미 알베르트라는 남자와 약혼을 한 사이이고, 알베르트도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후 베르테르는 로테와 알베르트와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지속해가고, 결국은 참을 수 없어 그들을 떠나보기도 하지만 다시금 그들의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베르테르의 너무도 열정적인, 그렇지만 절망적인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 이야기는 괴테 자신의 이야기와 친구인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합해놓은 것이다. 한 때 약혼자가 있던 샤로테 부프라는 여인을 사랑했던 괴테. 그는 결국 그녀를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듯 떠난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한 편 그의 친구인 예루살렘은 남편이 있는 부인을 사랑했고 결국 자살로 사랑을 마감하고 만다. 사실 오늘날에는 '골키퍼있다고 골 안들어가라는 법 있냐'는 식의 의견이 대부분이기때문에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따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한 남자가 사랑에 빠져 얼마나 행복할 수 있으며, 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하여 얼마나 절망할 수 있는가. 사랑의 마력은 대체 무엇인가 등과 같은 점들에 대해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훌륭하다. 베르테르가 남긴 편지, 메모 등으로 구성되었기때문에 베르테르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녀를 내게서 멀어지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할 수는 없다. 그녀가 가끔 나의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녀를 내게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빌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것은 그녀가 다른 남자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그런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명제와 반(反)명제의 끝없는 되풀이가 되어버리겠다.

  위와 같이 고민하던 베르테르는 결국 "수많은 계획과 기대가 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어버리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드러누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담담해진 기분 속에서도 죽어버리자는 그 생각은 변함없이 굳건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스스로 참고 견디어냈다는 것, 당신을 위해서 스스로 몸을 바쳐 희생하겠다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로테, 내가 침묵을 지킬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사라져야 합니다. 나는 그 한 사람이 되려는 겁니다!"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과연 베르테르의 죽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개개인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든 참고 견뎌야지, 다 그런거야'라는 의견이 있는가하면 '그에게 마지막 남은 길은 죽음이었을거야'라고 의견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던 베르테르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죽음으로 로테와의 영원한 만남을 기약하려 했다. 사랑, 절망, 시련, 고통. 그 모든 것에 휩싸여버린 젊은이 베르테르. 시대는 변했지만 우리 주변에서 사랑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한 번쯤은 만나본 적이 있지 않을까. 우리의 베르테르는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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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10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다시 읽어봐야하는데 하도 어릴때 읽어서요. 집에 책도 없네요

이매지 2006-04-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참에 하나 사서 보셔요 ^^ 예전엔 지루했는데 다시 보니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비로그인 2006-04-27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작년 여름에~! 나도 이제 진정한 문학인이 되려면 베르테르쯤은 알아야지 않겠어? 이럼서 이거 읽다가 잤다는.;;; 부끄릅네용.. ㅋ

이매지 2006-04-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문학인이라면 혹 전공이 문학쪽이신가요? ^^;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셔요. 저도 예전에 읽었을 땐 엄청 지루해했었거든요~

비로그인 2006-05-04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노~ 전공이 문학은 아니에요.. 그렇담 잠이와도 저걸 읽고있었겠죠? 전공이라면 그래도 공부는 해야하니깐 읽어야 했지만 결국 잠이와서 도저히 읽을 수 없었어요.. ㅠㅜ 참고로 저의 전공은 행정학도 랍니다.. ^^

이매지 2006-05-0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전 행정학도이셨군요^^ 어쩐지 공무원학원사진이 페이퍼에 있다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