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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김별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나는 웃어른에게 기억에 남을 두 번의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두 번 모두 그 꾸지람의 형식은 이랬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으면 뭐하니, 너는 ***인데....”
아무래도 내가 그 분 앞에서 책 읽는 액션을 무리하게 취한 거 같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서평쓰기를 위한 책읽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책은 나에게 있어 휴식이자, 즐거움이자 삶 자체인데, 리뷰를 쓰려고 하면 머릿속 생각과 쓰는 행위는 어쩐지 각각 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공저 <조화로운 삶>을 읽었다.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기본이 될 만한 최소한의 가치 몇 가지.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지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그리고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
좋은 말이다. 그런데, 단지 좋은 말일 뿐이다. 단지 내겐 그렇다.
그러나 정작 오래 남는 구절은 ‘건물이 제 구실을 잘 하려면 배수가 가장 중요하다.’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음 이 에세이는 실수와 상처가 두렵지 않은(나의 20대와는 다르구나. 나는 상처받고 실수하는 것에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던가...) 가열찬 20대를 보낸 소설가 김별아가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 되어서, 자신이 더 이상 강력하거나 자신만만하거나 아름답지 않음을 느끼며 쓰는 에세이이다.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이번 생은 조졌어! 라는 황지우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김별아는 절망 한가운데 있는 듯 하다. 더더군다나 업고(業苦)로 글쓰기를 행하며 살게 되었으니, 글쓰기란 결국 끝없이 절망을 자각하며 사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음, 김별아를 누군가 토닥여 줘야 할 것 같다. 아니, 독자들에게 위무받고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 이런 에세이를 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쓰러지는 포즈하고는.....! )
그런데 신기하지. 이런 걸 또 투사라고 한다지. ‘그도저도 여의치 않다면, 지금처럼 흔들리고 방황하는 채 나이를 먹어 여전히 팔리지도 않는 소설을 잡고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말거나 감겨 주는 나를 상상한다. 그러면 나는 훨씬 유쾌하고 자신 있게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와 같은 회한의 말들에 나는 공감하고 있다.
‘참는 것보다 도망치는 편이 낫다’며 삶의 비겁을 위로하는 김별아의 모습에서 책을 읽고 되도않는 괴발새발 리뷰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날림공사라도 하나 급조해 리뷰로 남기는 게 낫지 하며 위로하는 나를 본다.
소설가들이 산문집을 내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 누군가 그랬지.
그 말 속에 산문집을 문학 속에는 끼워 주고 싶어하지 않는, 깎아보려는 태도가 담겼을 게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과는 다른 산문의 맛은 ‘고백체로 내지르는 직설 어법’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또 인심 좋게 돈을 벌려고 산문집을 내는 소설가의 주머니를 좀 불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뭐, 전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이 에세이집의 어느 구절에선가 나는 ‘이건 펄프 낭비인걸’ 하기도 했으니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