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날까지 넘겨야 하는 번역물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 컴퓨터에 앉아 있던 나는, 아파트 현관 문 밖에 툭 신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새벽 5시가 되었음을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 다리뿐 아니라 온 몸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발 디딜 때마다 찌릿찌릿하는 것을 느끼며 신문을 집어 들고 와 마루의 어항 불빛 아래에서 신문을 펼쳐 놓고 무심히 지면을 넘기고 있었다. 기사를 눈으로 훑고 지나가다가 이번에 새로 탄생한 부부 법조인을 소개하는 제목을 보았는데 언뜻 ‘마포 지검의 박계현 검사와’ 라는 글자가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기사 옆의 사진은 흑백인데다가 단체 사진이어서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그 사진에서, 그리고 그 기사에서 한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박계현. 검사가 되었구나. 그래, 그럴 만 해. 뭔가 한 자리 할 거라 생각했어.’

그녀의 신분과 소재지를 알게 되자 전혀 생각지도 않던 마음의 움직임이 느닷없이 일어났다.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어떻게 그녀는 내가 취약했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날 수 있었는지. 아니, 그녀에게 뛰어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특히 그녀의 미술 실력은 그 당시 이미 초등학생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나는 방과 후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고 그녀는 화실엘 다니고 있었다.

“화실엔 일주일에 몇 번 가?”

나와 달리 매일 화실에 가는 것 같기에 물어보았다.

“매일”

“매일? 매일 가는 화실 많지 않은데. 나는 피아노 월요일이랑 목요일에만 가거든.”

“우리 화실도 원래 그럴 거야 아마. 일주일에 두 번인가, 한 번인가. 그런데 나는 매일 가고 싶어서 매일 가.”

내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한다는 그 자신감 역시 나에게는 없는 것 중 하나였다.

그녀 화실에 한번 따라 간 적이 있었다. 같이 숙제를 마치고 뭘 할까 하다가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화실엘 가자고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화실은 보통의 가정집 같이 생긴 곳 2층에 있었다. 밖으로 통해 있는 계단을 올라가니 옥상이 나왔고 작은 간판이 붙어 있는 화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수업이 없는 날인지,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니었는지, 화실에 다니고 있는 계현이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좀 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다시 돌아 나올 줄 알고 발길을 돌리려는데 그녀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화실이 있는 옥상 마당에 가지고 간 화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보통 우리가 쓰는 것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스케치북과 물감, 팔레뜨, 붓통을 늘어놓고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림은 꼭 화실 안에서만 그리란 법 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초록색, 파란색, 붉은색, 서너 가지 물감들을 풀어놓고 물을 섞으니 모두 맑음이라는 새로운 색으로 변신한 것 같았다. 그 색들이 그녀의 붓을 따라 종이 위를 채워 나가는 동안 나는 잠자코 서서 그녀의 그림을, 그림 그리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없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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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사가 되었군요. 앞으로의 행로가 점점 궁금해져요.^^

hnine 2012-07-10 05:51   좋아요 0 | URL
검사가 되었을까요? ㅋㅋ 지켜봐주세요~

하늘바람 2012-07-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검사가 된 친구라
오호 정말 점점 궁금한데요 그림까지 잘그렸던 친구.

hnine 2012-07-10 05:52   좋아요 0 | URL
저는 늘 그림 잘 그리는 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아무때나 저렇게 그림 잘 그리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불쑥불쑥 떠오른답니다.

비로그인 2012-07-09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처럼 그려지네요. 왠지 그런 그녀가 한순간 왈칵, 하고 마음의 상처를 풀어낼 것만 같아요. (멋대로 추측 ㅎㅎ) 아무튼, 소싯적 제가 부러워했을 누군가를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네요. 아주 어렸던 저는 그런 아이와 친구를 하는 것조차 맘상해하는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 '')~

hnine 2012-07-10 05:52   좋아요 0 | URL
아, 부러워하는 아이와는 친구를 하는 것 조차 맘 상해하는 예민한 아이...또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무스탕 2012-07-09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녀가 부러워지고 있어요.
모두가 맑음이라는 색을 만들어 내는 재주라니요!!!

hnine 2012-07-10 05:55   좋아요 0 | URL
저 대목은 저 학교 다닐 때 반에 그림을 무척 잘 그리던 친구를 연상하며 썼는데, 정말 그 애는 물감을 풀어서 물과 섞어만 놓아도 벌써 다른 아이들과 그 색깔이 달라보이는 것 같았어요. 물처럼 맑아보이는...

마녀고양이 2012-07-09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인언니, 소설 연재 시작하셨군요.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어요.... ^^

hnine 2012-07-10 05:56   좋아요 0 | URL
깜짝 놀래켜드렸군요 제가 ㅋㅋ
알라딘 서재 생활 오래 하다보니 이제 제가 겁나는게 없나봅니다.
 

 

 

그녀 집은 우리 집에서 가까워서 등하굣길에 자주 마주쳤다. 그러다가 같이 숙제할래? 그럴까? 이렇게 되어 학교 끝나고 숙제도 같이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우리 집 보다는 그녀 집으로 갈 때가 많았는데 우리 집엔 할머니도 계시고 동생들까지 북적거린 반면 그녀 집은 항상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주인집이 아닌 셋방이었던 그 녀의 집. 엄마 아빠 모두 일하러 가시고 형제자매도 없으니 학교 끝난 후 오후 시간을 그녀는 친구를 불러 함께 놀거나 그렇지 않은 날은 화실에 다녔다.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면 누가 나와 대문을 열어주는 대신, 직접 열쇠로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은 새로웠다. 마치 우리들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자유의 맛이랄까. 우리는 숙제를 후다닥 마치고 참으로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놀았다. 그 나이 때 여자 아이들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긴 했으나 그녀가 제안하는 방법은 그때까지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던 방법이 아니었다. 즉, 이 옷 입혔다 저 옷 입혔다,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꾸며주면서 누구 인형이 더 예쁜가, 공주 목소리 흉내 내어 몇 마디 주고받는, 그런 놀이가 아니라 인형은 우리가 만든 세상의 한 구성원일 뿐이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물건이 우리의 놀이, 우리가 만드는 마을에 포함되었다. 책상은 회사 건물이 되었고, 옷장 속은 숲 속이 되었다. TV위에 놓여있던 곰 인형은 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되어 인형들이 타고 다녔다.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면 그 위에 올라 앉아 구름 위를 타고 나는 양탄자가 되었으며, 천장 형광등은 갑자기 나타난 외계물체가 되기도 했다. 불을 켰다 껐다 하며 외계인들의 신호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엔 그녀가 있었다. 무얼 해도 새로웠고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를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면서 더 놀고 싶어 서운했다. 그녀와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급기야 나는 아침에 학교 갈 때 집에서 일부러 좀 일찍 나왔고, 그녀 집에 들러 그녀가 아침 먹고, 옷 입고,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기다렸다. 그녀 집의 아침 풍경은 우리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엄마보다는 아빠와 더 친한 듯 보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랑 꼭 몇 분이라도 수학 문제를 함께 푼다고 했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아빠가 가방도 함께 챙겨 주고 준비물도 챙겨 주어 학교를 보내는 것을, 새벽 일찍 나가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얼굴 보기도 힘든 나의 아빠, 그리고 엄한 우리 집 분위기를 떠올리며 그저 멍한 눈으로 그 애의 아침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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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07-08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저도 어린시절 기억이 저도 제 친구가 집앞에 와서 기다렸지요
가방챙겨주는 아빠라 정말 근사한 아빠였군요 하지만 그런아빠 정말 드물잖아요
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hnine 2012-07-08 20:45   좋아요 0 | URL
괜히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시작했으니 계속 가볼께요 ^^

하늘바람 2012-07-09 06: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괜히시작은요
넘 재미있는데요

hnine 2012-07-09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보려고 시작했어요...^^

비로그인 2012-07-08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으, 끝까지 작가님과 함께 하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hnine님!
제가 꿈꾸던 친구와의 만남을 그린 것 같아서 아주 많이 설레네요.

hnine 2012-07-09 05:45   좋아요 0 | URL
예, 말없는 수다쟁이님, 그래주세요 ^^

프레이야 2012-07-0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서히 새로운 세상으로 끌고 가는 친구네요.^^

hnine 2012-07-10 05:47   좋아요 0 | URL
그래야되겠지요? ^^
쓰고서 다시 읽어볼 때 마다 고치고 싶은 데가 생기네요 ㅠㅠ

무스탕 2012-07-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 주시면 바로바로 읽진 못해도 몰아서라도 다 읽겠어요.
근데, 참 신기한게, 그렇게 어려서가 어쩜 이렇게 기억이 잘 나세요? +_+

hnine 2012-07-10 05: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무스탕님, 고맙습니다. 너무 길게 가지 않고, 짧게 끝내려고 하는데 모르겠네요.
그리고 글중 주인공을 '나'라고 1인칭 주인공으로 썼더니 다들 저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아시나봐요, 전 주인공 아이처럼 당연히 일등만 하고 어쩌구...그렇지 않았는데 ㅋㅋ
 

 

 

 

이 세상엔 어쩌면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처음 눈치 챈 것은 내가 열 살 되던 해이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내가 다니던 학교, 하필이면 우리 반에,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렇게 나타났다. 그녀가 전학 오던 날 아침, 정년을 앞두고 있어 우리가 할머니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슬쩍 지나치듯이  말씀하셨다.

“오늘 네 라이벌 감 될 만한 아이가 새로 생기겠다.”

라이벌이라는 말도 생소한데 그 '라~' 어쩌구 하는 아이가 새로 생긴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야말로 요즘 말하는 범생이 샘플 중 하나였다. 우리 반 반장이었으며 시험 보면 늘 일등. 그건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 만큼이나 보통의 일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제 너 긴장해라는 의미였을거다.

‘누가 전학을 오나?’

과연 아침 조회가 끝나고 1교시 시작하기 직전, 선생님은 잠깐 나가시더니 한 여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 나는 뚫어져라 그 아이를 쳐다 보았다. 나의 눈길을 제일 먼저 끈 것은 그 아이가 입고 있던 빨간 원색 원피스였다. 흰색 땡땡이 무늬,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 아래로 착 깔리는 주름. 그 때까지 나는 물론이고, 내 또래 누구도 그런 원피스 입은 것을 본적이 없다. 벌써 어딘가 달라 보이는 조숙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연두색 스카프에서 더 확실해졌다. 길지 않은 스카프를 옆으로 살짝 둘러 맨 모습, 자연스런 고수머리가 아니라 파마를 했음에 틀림없는 웨이브 진 머릿결, 그녀가 쓰고 있던 짙은 밤색 안경과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보는 나를 제압시키는데는 5초면 충분했다.

“이름은 박, 계, 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전혀 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짧고 똑 떨어지는 말투의 자기소개. 쇳가루가 날릴 것 같은 또랑또랑한 목소리. 담임선생님이 너와 라이벌이 될 거라고 한 저 애가 나랑 같은 나이, 초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 분단 뒷줄 어딘가에 그녀의 자리가 정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는 나의 가슴이 왜 그리 콩닥콩닥 뛰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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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제 소설습작도 하시는 거죠?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걸요.^^
저의 초등 3학년을 떠올려 봅니다. 조금은 조숙하고 생각이 많았던 내성적이지만
뜨거운 불을 안고 있었던 여자아이.
전학 온 아이로 긴장을 했던 경험, 제겐 중학교 2학년 때였다지요.
서울에서 전학온 착하고 새하얗고 덧니가 이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던 아이,
그 당시 유일하게 아파트라는 데서 사는 아이였어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아이가 신고 다녔던, 발등에 가로로 끈이 있던 검정 에나멜구두가 어찌 부럽던지.
하얀색 커버양말에..^^ 우리도 다들 그런 모양의 검정 구두 신고 다녔는데 그애가 신은 건
디자인이나 광택이 달랐어요. 눈에 쏙 들어왔다지요.^^

hnine 2012-07-06 20:38   좋아요 0 | URL
우히히...나이 먹으면 창피한게 없어진다지요 ㅋㅋ
비슷한 추억이 누구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그때는 아파트도 흔하지 않았고, 검정에나멜 구두도 흔하지 않았지요. 저는 주로 운동화를...
추억에 허구를 보태서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비로그인 2012-07-0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더 써주세요, 더 써주세요!
라이벌 소녀를 더 지켜보고 싶어요 :)

hnine 2012-07-07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말없는 수다쟁이님으로부터 더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일단 시작했으니 더 쓰긴 쓸겁니다~ ^^

파란놀 2012-07-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교사가 '맞수' 아닌 '동무'라고 이야기했다면, 둘은 사이좋은 어깨동무로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두 아이가 아이다운 마음이라 한다면, 교사가 무어라 하건 서로 죽 잘 맞는 멋진 동무로 사귀었겠지요?

hnine 2012-07-07 23:41   좋아요 0 | URL
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봐주세요~ ^^

하늘바람 2012-07-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궁금한데요.
범생이 나이님 앞에 나타난 맞수라~
기대됩니다

hnine 2012-07-08 20:44   좋아요 0 | URL
글중의 '나'는 제가 아니랍니다. 이거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어요 ㅠㅠ
 
열여덟, 너의 존재감 르네상스 청소년 소설
박수현 지음 / 르네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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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재 감.

자존감은 알겠으나, '존재감'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퍼지게 되었을까.

존재감이 뭘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그것을 남이 알아주는 것. 이렇게 확대된 의미가 요즘 사용되는 '존재감'이라는 말에 살짝 들어가있지 않나 생각된다. 내가 지금 여기 살아 숨쉬고 먹고 잠자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보고 듣고 하는 모든 행위들만으로는 존재의 증거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뭔가 내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박수현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낯설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소개글과 올라와 있는 리뷰들을 읽어보니 구성도 독특하고 그저 그런 식상한 내용만은 아닐 것 같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읽고 보니, 이야기의 배경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고등학교 2학년, 열 여덟 살 이순정. 부모의 이혼.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느 날 느닷없이 엄마 집으로 합세하게 된다. 생활고에 시달려 밤 늦게 들어오는 엄마는 집에 와서도 술에 쩔어 있는 날이 많다. 이 아이가 주요 인물들 중 첫번째. 김예리라고 나중에 이름을 밝히는 '그림자'가 두번째 인물. 이순정과 같은 반인데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이 많고 꿈이 불확실한 아이이다. 세번째 강이지. 나서기 좋아하고 끼어들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이 아이는 돈 때문에 늘 싸우는 부모님과 아직 어린 동생 셋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의 중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게 하고 있는 네번째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세 여고생의 담임 선생님인 쿨쌤. 개학도 하기 전 일주일 미리 나와 자습을 하고 있는 미래의 자기 반 아이들 앞에 나타나 "내가 누구게?" 부터 하는 선생님이다. 미혼에 키 크고 몸매 통통. 학생들에게 '이년'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선생님. 공부만 하지 말고 쉬는 시간엔 운동장에서 뛰어 놀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매우 비현실적인 선생님. 담당 과목은 정치이지만 반 아이들에게 마음 일기장 쓰는 법을 가르쳐 준다. 마음이랑 생각은 다른거란다.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 마음이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돌멩이가 날라올 때, 앗, 돌이다! 피해야겠다! 이러는건 '생각'이고, 무섭다는 건 '마음'이라고. 즉 즉각적인 느낌, 기분을 여기서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반면 생각은 좀 더 이성적인 것, 기분보다는 대책, 행동의 방향, 지시 같은 것. 생각에 앞서 우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솔직한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무척 중요해서, 내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어야 남이 나에 대해 하는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부분에서 '음, 이 책 좀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체와 대화가 상당히 발랄하고 재미있다. 저자가 혹시 방송작가 출신이 아닌가 다시 봤을 정도로. 여기 나오는 쿨쌤은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사촌동생이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 동생 분이 무척 발랄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이 책에 관한 자료를 검색해보니 저자와 이 사촌동생이라는 분이 함께 학생들에게 강연을 한 자료도 있었다.) 그렇게 신나는 노랫가락 같던 사촌 동생이 학교 선생님이 되고서 점점 힘든 기색을 내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프다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이 괴롭고 힘들고 급기야 몸까지 아프기 시작했다고. 아이들과 선생님의 마음이 통한 것이다. 사촌 동생은 아이들과 마음 나누기라는 방법으로 서로 치유하기를 시도하고, 그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말한다. 요즘 아이들에 대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은 순전히 오해였다고. 아무데서나 욕설을 툭툭 던지고 버르장머리 없고 귀하게만 자라서 아쉬울 것도 없고 아픔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이 아이들의 마음을 한 겹 들춰 보면 세상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고, 어른들만 그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엄마를 걱정하고 아빠를 여려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더라고. 그래, 청소년이라고 다를까. 청소년이 어른된다고 무슨 다른 종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도 어른들도 거기서 거기, 같이 끙끙 앓는 존재들이다. 누가 자신있게 누구를 가르치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을까. 가르치고 지시하려 들지 말고 이렇게 차라리 서로 들어주고 나누는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서사가 지지부진 해진 점, 시작에 비해 식상한 결말. 그래서 별점은 넷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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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7-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을 피하거나 무섭다 하는 것은 생각이나 마음이 아니에요. 느낌이자 지식이지요.

생각이란,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거나 사랑하거나 꿈을 꿀까 하고, 스스로 짓는 길이에요.
마음이란, 내 목숨을 돌보면서 지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내 참모습'이고요.

이 책을 쓴 분이든 다른 사람들이든, '생각'과 '마음'을 잘 느끼면서 알면 좋겠어요.

돌이 날아올 때에 피해야겠다 하는 것은 '지식'으로서, 몸에 아로새기는 것이고,
무섭다 하는 것 또한 '지식'이면서, 이 지식을 몸으로 '느끼는' 것인 줄
잘 새겨야 할 텐데요.

아이들은 맨 처음에 무서움도 두려움도 없어요. 어른들이 지식으로 아이들한테 가르치니
무섭거나 두렵다 하고 느끼지요..

hnine 2012-07-05 20:09   좋아요 0 | URL
필요하니까 어른들이 가르치는 것이고, 그래서 '지식'은 필요한데 문제는 내 마음을 느끼고 알아차리기 전에 '지식'으로 대응하려고 하니 내 마음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아닐까해요.
아이들은 정말 맨 처음 무서움, 두려움이 없더라고요. 벌레를 보고도 신기해서 아이는 다가가는데 옆에서 엄마가 무서워 피하면 그 다음부터 아이도 그 벌레를 보면 피하는 것을 종종 봐요.
 
부끄럽지 않은 밥상 - 농부 시인의 흙냄새 물씬 나는 정직한 인생 이야기
서정홍 지음 / 우리교육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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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게 넘치는 세상. 그래서 골라 먹게 되고 때로는 먹는 것을 일부러 자제하기도 해야하는 세상.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을 보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중요한 사실이 일깨워지는 기분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된 것은. 한 알의 쌀이 이렇게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 이론적으로 모르지 않겠지만 그것을 얼마나 오래동안 떠올리지 않으며 살아왔는지. 그 생각으로 우선 부끄러웠다. 그동안 나의 밥상은 부끄러운 밥상이었던 셈이다.

나는 저자 서정홍을 동시를 쓰는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소개를 보니 시인 앞에 한 마디가 더 붙어 있다 '농부 시인'. 원래 생명공동체운동, 우리밀 살리기 운동,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등의 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2005년에는 도시에서 하던 이런 활동들을 모두 후배에게 물려주고 산기슭 작은 산골 마을로 들어가 직접 흙집을 짓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런 과정에서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 그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란 한마디로 말해보자면 농사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시골에는 젊은 농부들은 없고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쉬셔야 할 연세의 노인들만 남아서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고 한다. 흙에다 땀 뿌리며 온몸으로 해야하는 농사 없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책으로, 머리로 깨우치는 것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겠으나 직접 몸으로 겪으며 깨우치고 '실천'할 각오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농사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부터가 큰 가르침이 아닐지. 노인들만 남다시피한 마을에서, 그나마 노쇠하여 그중 한분이 돌아가시는 날의 쓸쓸함, 농부는 이 시대의 성직이라는 그의 말이 그대로 마음에 와닿는다. 갈수록 사람들이 농부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돈이 안 되기'때문이다. 돈 되는 것에만 너도 나도 달려들지, 중요한 일에 달려들지 않는다.

그는 농부만큼 자유롭고 행복한 직업은 없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한테 잘 보이기 위해 애써 구두를 닦거나 비싼 옷을 입고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농부는 하늘만 믿고 살기 때문에 하늘한테만 잘 보이면 되는 것이다. (200쪽)

슬픔을 잊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땀 흘려 일하는 것이라고,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어지간한 슬픔 따위는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니, 우리는 농사를 통해 먹거리만 얻는 것은 아닌가보다.

건강하다는 것,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는 것,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의 어떤 노고가 이 한알의 쌀 속에 들어가 있는지. 밥상을 대할 때 경건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이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강하지만 조용하고 다듬어진 목소리로 전달하는 모든 페이지가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빠르게 넘어간다. 밥상을 차리거나 대할 때 부끄러움에 대해 떠올릴 수 있게 하는데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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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7-0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홍 님은 '집안일'과 '아이키우기'를 많이 맡아서 하던 '노동자'였다가 '시인'이 되었고, 이제는 노동자를 그만두고 '흙일꾼'으로 살아가며 시를 쓰는 시골 아저씨가 되었답니다. 다른 도시 노동자들도 시인 아저씨처럼 흙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홀가분하게 시를 쓰며 삶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hnine 2012-07-05 05:57   좋아요 0 | URL
'나락 속의 우주'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쌀 한 톨에서 우주를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요즘 많이 아쉽지요. 직접 내 땅에서 내 손으로 내 먹거리를 키워본다는 것은, 작정하고 시골로 내려가지 않더라도 꼭 해볼만한 일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생각을 새로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밥상 앞에서, 잠들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서, 부끄럽지 않고 정직한 마음, 경건한 마음이 될 수 있는 삶을 꾸리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2-07-05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을거리 풍부한 시대에 우리는 오히려 까다롭게 고르고 따져서 먹어야하는
의무가 생긴 것 같아요. 풍요 속의 빈곤,은 먹을거리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인님이 별 다섯을 준 책이라니, 무한신뢰가 갑니다. 담아갈게요^^

hnine 2012-07-05 14:01   좋아요 0 | URL
이분의 정직하고 흙냄새, 사람냄새 나는 시들을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이분의 에세이도 그 시를 꼭 닮았더라고요.
결국 사람은 자연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고, 실천에 옮겼더군요. 생각과 실천의 거리가 멀기만 한 보통 사람들에 비해, 본인은 부인하더라도 보통 사람은 아닌것 같아요.
귀농학교도 여신다는데 한번 참여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블루데이지 2012-07-0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과 같은 생각이요..무한신뢰와 동시에 장바구니로 얼릉담아버리는....ㅋㅋ
hnine님의 글을 읽으니 갑자기 왜 저희 아빠가 생각날까요?

hnine 2012-07-05 14:11   좋아요 0 | URL
이분의 동시집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세요. 이 책은 표지 사진도 예쁘지요? 책 내용은 예쁘기보다는 정직하고, 꿋꿋하고, 존경스럽고...막, 그래요 ^^
블루데이지님 아버님께서도 혹시 저자분처럼 소신을 실천하시며 사시는 분 이실까요? 언제 아버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

순오기 2012-07-0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농사는 짓지 않아도, 음식을 준비하거나 먹기에 앞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요.
이런 책을 읽으면 더 고마움을 갖게 될 거 같아요.
예전에 비해 요즘 사람들이 잘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예전에 자연이 오염되지 않은 상태의 먹거리들이 훨씬 질 좋은 거였답니다.

hnine 2012-07-05 14:14   좋아요 0 | URL
밥상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 요즘은 이게 없어요. 전 기독교는 아니지만 식사전에 기도부터 하는 이유를 알것 같아요.
갈수록 생명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도 그렇고...학교나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풀 한포기라도 내 손으로 직접 키워보게 하면 열 마디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마음에 와닿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