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엔 어쩌면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처음 눈치 챈 것은 내가 열 살 되던 해이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내가 다니던 학교, 하필이면 우리 반에,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그렇게 나타났다. 그녀가 전학 오던 날 아침, 정년을 앞두고 있어 우리가 할머니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슬쩍 지나치듯이  말씀하셨다.

“오늘 네 라이벌 감 될 만한 아이가 새로 생기겠다.”

라이벌이라는 말도 생소한데 그 '라~' 어쩌구 하는 아이가 새로 생긴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야말로 요즘 말하는 범생이 샘플 중 하나였다. 우리 반 반장이었으며 시험 보면 늘 일등. 그건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 만큼이나 보통의 일이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이제 너 긴장해라는 의미였을거다.

‘누가 전학을 오나?’

과연 아침 조회가 끝나고 1교시 시작하기 직전, 선생님은 잠깐 나가시더니 한 여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 나는 뚫어져라 그 아이를 쳐다 보았다. 나의 눈길을 제일 먼저 끈 것은 그 아이가 입고 있던 빨간 원색 원피스였다. 흰색 땡땡이 무늬,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 아래로 착 깔리는 주름. 그 때까지 나는 물론이고, 내 또래 누구도 그런 원피스 입은 것을 본적이 없다. 벌써 어딘가 달라 보이는 조숙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목에 두르고 있던 연두색 스카프에서 더 확실해졌다. 길지 않은 스카프를 옆으로 살짝 둘러 맨 모습, 자연스런 고수머리가 아니라 파마를 했음에 틀림없는 웨이브 진 머릿결, 그녀가 쓰고 있던 짙은 밤색 안경과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보는 나를 제압시키는데는 5초면 충분했다.

“이름은 박, 계, 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전혀 떨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짧고 똑 떨어지는 말투의 자기소개. 쇳가루가 날릴 것 같은 또랑또랑한 목소리. 담임선생님이 너와 라이벌이 될 거라고 한 저 애가 나랑 같은 나이, 초등학교 3학년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 분단 뒷줄 어딘가에 그녀의 자리가 정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있는 나의 가슴이 왜 그리 콩닥콩닥 뛰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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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6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제 소설습작도 하시는 거죠?
첫 문장부터 사로잡는걸요.^^
저의 초등 3학년을 떠올려 봅니다. 조금은 조숙하고 생각이 많았던 내성적이지만
뜨거운 불을 안고 있었던 여자아이.
전학 온 아이로 긴장을 했던 경험, 제겐 중학교 2학년 때였다지요.
서울에서 전학온 착하고 새하얗고 덧니가 이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던 아이,
그 당시 유일하게 아파트라는 데서 사는 아이였어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아이가 신고 다녔던, 발등에 가로로 끈이 있던 검정 에나멜구두가 어찌 부럽던지.
하얀색 커버양말에..^^ 우리도 다들 그런 모양의 검정 구두 신고 다녔는데 그애가 신은 건
디자인이나 광택이 달랐어요. 눈에 쏙 들어왔다지요.^^

hnine 2012-07-06 20:38   좋아요 0 | URL
우히히...나이 먹으면 창피한게 없어진다지요 ㅋㅋ
비슷한 추억이 누구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그때는 아파트도 흔하지 않았고, 검정에나멜 구두도 흔하지 않았지요. 저는 주로 운동화를...
추억에 허구를 보태서 한번 만들어보려고요.

비로그인 2012-07-0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더 써주세요, 더 써주세요!
라이벌 소녀를 더 지켜보고 싶어요 :)

hnine 2012-07-07 17:12   좋아요 0 | URL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말없는 수다쟁이님으로부터 더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일단 시작했으니 더 쓰긴 쓸겁니다~ ^^

파란놀 2012-07-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교사가 '맞수' 아닌 '동무'라고 이야기했다면, 둘은 사이좋은 어깨동무로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두 아이가 아이다운 마음이라 한다면, 교사가 무어라 하건 서로 죽 잘 맞는 멋진 동무로 사귀었겠지요?

hnine 2012-07-07 23:41   좋아요 0 | URL
둘 사이가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봐주세요~ ^^

하늘바람 2012-07-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궁금한데요.
범생이 나이님 앞에 나타난 맞수라~
기대됩니다

hnine 2012-07-08 20:44   좋아요 0 | URL
글중의 '나'는 제가 아니랍니다. 이거 수필이 아니고 소설이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