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읽을 거리를 찾아 집안 여기 저기 뒤지다가 아버지의 책들 중에서 발견해 낸, 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그 소설집에 오 정희의 <완구점 여인>이 있었다. 그리 긴 소설이 아니었으므로 금방 읽기는 했지만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좋다, 나쁘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기쁘다, 슬프다, 역시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모호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그 느낌은 오랫 동안 오 정희라는 작가에 대한 나의 감정이기도 했다.
몇 년전 작가가 오랜만에 펴낸 우화집 <돼지꿈>을 읽었고 예전에 읽었던 <유년의 뜰>을 다시 읽으면서 점차 그녀에 대해, 그녀의 소설들에 대해 조금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동안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가져다 준 이해의 폭 덕분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도서관의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가을 여자>. 날짜를 보니 작년 9월에 나왔는데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알았더라면 지금까지 안 읽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전작 <돼지꿈>과 비슷한 형식의 짧은 글들이 스물 다섯 편 실려 있다.  제목의 '가을 여자' 란 인생의 가을 쯤에 이른 여자를 말하는 것이라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스타일이 어디 가는가. 짧은 글 속에서도 여지없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120% 다 전달하고 만다. 조용한 목소리로, 일부러 요란한 사건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일상의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그녀만의 예리한 시선과 관조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때로는 반전으로, 때로는 어이없는 황당함으로, 때로는 마음을 알싸하게 물들이는 감상으로, 세상은 그렇게 기쁘기만 한 것도,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흔들림 없이 말해 주고 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레이스 뜨기로 두 아이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 앞에 나타난 청년 ('그 가을의 사랑'), 그녀만이 할 수 있을 마무리라고 생각되는 '복사꽃 그늘 아래서',  아들의 다이어리에 쓰여진 알파벳 약자를 추리하면서 서로 소 닭 보듯 하던 남편과 다시 마음을 주고 받게 된다는 '간접 화법의 사랑' 같은 이야기는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쓰여진 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생'에서의 어머니, '긴 오후'에서의 시어머니는 앞서 산 세대의 뒷모습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감정 표현이라고는 하는 법이 없던 어머니가 버스를 놓쳐가면서까지 느닷없이 방생을 하고 있는 모습,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진 뿐 아니라, 아들, 며느리, 손자의 사진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시모의 보자기를 발견하는 며느리의 심정,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보는 기분이었다. '요즘 아이들'에서는 오랜 만에 큰 맘 먹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하고 비싼 식당을 찾았으나 서로 겉돌기만 하는 대화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상해서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흔한 소재일 것 같은 이야기를 참 실감나게도 그려놓았다. 사추기나 로맨스 그레이와 같은 뜻이면서 더 격이 있지 않냐는 '서정시대'에서의 반전은 서정적인 감상을 한번에 뒤집어 놓고, 중년 가장의 심리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병아리'와 그 다음의 '꽃핀 날'은 이 책에 실린 글중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두 편이다.

   
  남의 밑에서 밥 먹는 월급쟁이들이 거개가 다 그렇듯, 사내라면 한 가지씩은 타고 나기 마련이라고 공인된 성질머리 죽이고 더러운 꼴, 아니꼬운 꼴 꿀꺽꿀꺽 삼키며 근무를 끝내고 만원전철에서 삼십 분, 다시 만원버스에서 삼십 분 시달려 서울의 외곽 지대까지 오는 동안 그가 오직 원하는 것은 휴식 뿐이었다 (216쪽)  
   

 그렇게 오로지 휴식을 바라며 들어온 집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병아리 소리는 남자로 하여금 식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들고, 동네 초등학교 앞에서 사왔다고 애지중지하며 병아리를 보살피고 있던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당장 베란다로 내가라는 아빠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방 안에 데리고 들어와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감상이 읽는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마지막 글 '꽃핀 날'에서 여자는 늦게 일어나 동동거리던 와중에 문득 유리문 너머로 목련 꽃망울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숨이 막힐 듯한 전율을 느끼지만, 결국 식구들 아침밥을 제대로 못먹여 불평 속에 출근, 등교를 시키고 난후 다시 바라본 목련은 더 이상 몇 분 전의 그 목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뭔가를 깨닫는 장면이다.

   
  집 안은 갑자기 가위눌린 듯 조용해졌다. 솥 안에 새까맣게 눌어붙은 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다가 난데없이 후룩 누물이 떨어졌다. 슬프다거나 참담하다거나 따위 자극적인 감정의 작용이 없는데도 그랬다. 눈물이 어린 눈에 환시처럼, 착시현상처럼 피어오르던 목련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 굳이 그 꽃을 찾아보려 해도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꽃이 피어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이 내 존재의 한순간과 만나 섬광처럼 부딪치고 사라졌다. 인생에의 꿈이나 그리움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 (227쪽)  
   

작가의 이 통찰력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녀의 소설 속에는 이제 소설로만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통찰과 관조가 들어있다. 그래서 소설을 위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삶의 경륜이 녹아있는 '수필적'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짧은 우화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닐지. 가을을 가을답게 하는 이 책을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역시 오 정희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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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3-2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도 급관심이군요.
아주 오래 전 읽어 본 것 같은데 작가에 대한 기억의 흔적이
내게 남아 있지 않네요. 기억하겠습니다.^^

hnine 2010-03-29 06:46   좋아요 0 | URL
오 정희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지요.
요즘 신세대 작가들과는 다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분명한 세계가 있다고 할까요.

꿈꾸는섬 2010-03-2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정희 선생님 작품 정말 좋아요.^^

hnine 2010-03-30 00:15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서재에서 안그래도 이 책에 대한 페이퍼 봤어요.
생활의 흔적이 끈끈하게 묻어나오는 글들이지요. 모든 얘기들을 작가가 직접 겪은 일처럼 담담하게 쓰면서 말이어요.

글샘 2010-04-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라딘의 리뷰 당선 덕분에 오정희 님의 글을 만나게 돼서 감사합니다. ^^ 알라딘도, 나인님도...

hnine 2010-04-12 11: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글샘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늘 무덥다. 오늘은 또 이 아이들과 나 사이,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 아이들과 자연 사이에 무슨 일들이 벌어질까. 하루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이 통제 불능의 2학년 놈들.
아침에 현아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대길이가 장난삼아 내일 학교 안 오는 토요일이라고 했단다.
1학년 대성이가 아이들이 실내화 신고 밖에 나갔다고 이르러 왔다.
세희 눈이 퉁퉁 부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세희더러 서울로 가라고 해서 울었단다. 대길이 말에 의하면 2시간 정도 울었다고 한다. 세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냐, 나 한 50분 정도 울었어"라고 말한다.
이 조손 가정의 힘든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오늘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김 용택의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전문이다.
짧은 글이지만 마음이 움직여, 좀 더 붙들고 싶어져 옮겨 적어보았다.  

표지가 이 계절과 참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책 속의 그림들도 예뻐서 글이 더 좋은지 그림이 더 좋은지 모를 책이다. 지난 날들을 생각하면 저자는 가만가만 눈물이 고여온다고.

가만가만 고여오는 눈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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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4월에 구입하려고 보관리스트에 올린 책이에요.
참말이지 저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hnine 2010-03-28 15:03   좋아요 0 | URL
사지 말고 있으세요. 다 읽고 보내드릴께요.

순오기 2010-03-28 23:50   좋아요 0 | URL
어맛~ 또 보내주신다고요.
이런 시집은 다린군이 읽어야 되니까 보관하셔야 될 듯한데...^^

hnine 2010-03-29 07:58   좋아요 0 | URL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순오기 2010-03-2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내주신 책 금요일에 잘 받았어요. 막내는 바로 읽었고요.^^
자기들 블로그에 리뷰를 쓴다더니 다른 책읽기에 빠져 아직 안 썼네요...

hnine 2010-03-28 15:04   좋아요 0 | URL
그렇게 빨리 읽어주다니, 보내준 사람 입장에서는 감사할 일이네요.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가봐요.
 

 

실용적인 마술 

 

                     성  미정 

 

미녀의 나신 절단하기
손수건으로 비둘기 만들기
신문지를 지폐로 만드는 마술은
질릴 만큼 했다 

 

이젠 좀 더 실용적인 마술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의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안마해 주기
배추로 김치 만들기
오천 원으로 푸짐한 밥상 차리기 

 

실용적인 마술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눈속임이 아니라 사랑의 힘 

 

실패했다고 야유할 사람은 없지만
한달간 맛없는 김치를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할 것
그렇다고 실용적인 마술을 겁낼 필요는 없다
김치를 씻어 쌈을 싸 먹거나 전을 해먹는
마술에 도전해 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오늘도 무궁무진한
실용적인 마술의 세계에 빠져 있다
실용적인 마술이 손에 익어
마술이 아니라 생활이 될 때까지
그녀의 실용적인 마술은 계속될 것이다 

 

 


매일 벌어지는 일상사에 리듬을 실을 수 있는

이런 시인을 친구로 두고 있으면 참 좋겠다 

적어도 이 시인의 시를 가까이 할 수 있으니 

그것도 좋다 

내 생활에도 그 리듬이 흘러들어오길 

마술이 생활이 될 때까지 

마술사가 되는 그 날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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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8 0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3-28 06:48   좋아요 0 | URL
하루 종일 흐리긴 했지만 그래도 바람타고 산책이 그리워지는 날씨였어요. 인사동, 좋았겠네요. 청와대 길은 아직 한번도 걸어보질 못했는데...
이 시인의 시는 아마 제가 이렇게 생활의 한복판을 살아보지 않고 오직 한가지 제 일에만 매달리는 삶을 살고 있다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매일 해치워야 하는 일거리 앞에서 '마술'을 떠올리는 시인의 마음이 애틋하기도 하고 귀여운 구석도 있고, 그랬네요.
 

 

언젠가 한번은 찾아온다는 모자를 벗기는 바람 

   

                                                    성  미정

 

그 바람은 불꽃처럼 뜨겁고
회오리처럼 난폭할 거라고
순식간에 모자를 불태우거나 날려버릴 거라고
늘 상상했는데 

 

바람이 내게로 왔을 때
바람은 숨소리처럼 작았고
봄볕처럼 부드러웠는데
그래서 바람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바람은 모자 속에 스며들어
서서히 머리를 따스하게 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바람이 찾아온 걸 알고
모자를 벗었는데 

 

내 늙고 지친 모자를 쉬게 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모자를 벗기는 바람
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시 속의 바람의 의미를 생각하자니,
그것은 사랑을 뜻하는 것도 같고,
자꾸 읽다보니 생을 마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도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경의를 표하며 맞을 수 있기 위해
나는 그저
늙고 지치도록
정성과 눈물을 다하는
삶이어야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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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3-2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부리지 않고 따스한 싯구네요.
나인님의 글귀는 더욱이요.^^

hnine 2010-03-28 09:40   좋아요 0 | URL
마침 프레이야님의 서재에서 언젠가 본 것 같은 어떤 구절을 찾아 헤매다 온 참이어요. 그게 어떤 구절이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
멋부리지 않고 따스한 것들이 그리운 일요일 아침입니다.

프레이야 2010-03-28 19:11   좋아요 0 | URL
오홋~ 그게 어떤 구절이었을까나요?
궁금ㅎㅎ 그나저나 찾으셨어요?
전 홍차 한 잔 해요.^^

hnine 2010-03-29 07:59   좋아요 0 | URL
^^
 

외지에서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던 때, 오늘 같은 휴일 오전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학교에 갈 일도 없고 읽을 우리 소설 한 권 없고 신문, 잡지 더구나 없고, 도 닦는 흉내를 내느라 그랬는지 내 방에는 TV도, 인터넷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가끔 혼자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훌쩍 떠나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그저 방안에서 음악만 내처 들었다가, 밖으로 나가 휘 한바퀴 둘러보고 들어오거나 친구나 가족들로부터 받은 편지나 카드를 읽고 또 읽곤 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어쩌다 하루가 아닌, 그곳에 혼자 머무르던 3년 반동안 대부분의 주말과 학교가 문을 닫는 휴가 기간을 이렇게 보내면서, 혼자 사는 삶에 대해 예행 연습을 해본 셈이다. 15년 전 이야기이다.

어제 남편이 일이 있어 강원도 어느 지방 (떠나는 순간까지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면서.) 에 가야한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워낙 금요일엔 나도 다른 일이 없는 날인데, 아이와 남편이 짧으나마 여행을 가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서주니 이런 날이 일년에 몇번이나 있겠는가. 책 읽으며 오전 시간을 다 보내고 점심으로 호박과 양파만 채썰어 부침을 해먹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혼자 먹는데 간단히 빵도 아니고 평소에 즐겨 먹는 것도 아닌 부침을 하고 있다니. 밖을 내다보니 바람은 많이 부는데 햇살은 봄햇살이었다. 버스 타고 나가 영화를 보았다. 백화점 윗층에 있는 영화관이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서 여유있게 백화점 구경이라도 할까 둘러보아도 도무지 별로 눈길을 끄는 것들이 없어 그냥 집으로 왔다. 탐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이 백화점에 있는 물건을 다 가지고 있는 것 만큼 부자인가봐 생각하며. 

저녁이 되자 남편이 전화 하고 아이가 전화 하여 심심하지 않냐고 한다. "전~혀"라고 대답하긴 뭐해서 그냥 심심하지 않다고만 했다. 사가지고 온 호두 껍질을 벗기며 TV를 보다 잠을 잤다. 

오늘 아침, 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났다. 이불을 그냥 한쪽으로 쭉 밀어놓고 사과부터 먹고.
욕실 천장 시트지를 바르러 오기로 한 9시 30분까지는 최소한 집에 있어야 한다. 빨래를 개키고, 구멍 난 양말을 기우며 TV를 보았다. 보고 싶은 프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켠 TV에서 '풍경이 있는 아침' 인가 하는 영상 프로그램이 마침 나오고 있는데 전라도 우도, 고창 일대를 취재하고 김 세원이 나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귀화하여 작은 미술 갤러리를 열고 11년 째 살고 있다는 어느 화가 (아, 그 갤러리 이름이 벌써 생각이 안난다.), 고기 잡는 할아버지 이야기, 비구니만 거주하는 절의 주지 스님의 차 이야기 등등, 잠시 바느질 하던 손을 허공에 둔채 한참을 화면에 시선을 두기도 했다.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다. 강원도엔 지금 눈이 오고 쌀쌀하다며 여긴 날씨가 어떠냐, 아침은 먹었느냐, 잠은 잘 잤냐, 내 남편 맞나 하는 질문들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곳 잠자리가 별로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 있다 와도 된다고 내가 장난을 쳤다.  

방으로 들어와 성미정의 시집을 펴고 읽었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제목부터 참 소박하지 않은가? 폐부를 꿰뚫는 어휘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보면 매일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하고, 그렇게 나와 비슷한 일상을 사는 것 같으면서 이렇게 소탈하며 또 소탈하지만은 않은 시들을 쓸 수 있었는지. 

참 한가로운 주말이다. 15년 전엔 이런 날을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15년 전 그날들을 추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상이 좀 짐스럽고 불평스럽더라도 오늘의 이 여유로움을 여유로 느끼게 해주는 15년 전의 경험과, 지금의 내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욕실 천장 일 하시는 분이 거의 다 오셨다고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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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ood morning, hnine님! 평화로운 풍경이군요. 저도 어제 숙취로 꾸물거리는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 이른 점심 먹이기 전 잠깐 한갓진 시간이에요.
주말 잘 보내시기를~

hnine 2010-03-27 13:52   좋아요 0 | URL
평화로움과 심심함은 아주 작은 간격만 있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평화로움이지요.
지금은 슬슬 오늘 저녁 식구들이 들어와서 먹을 밥상을 뭘로 차려야 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네요.

숟가락 2010-03-2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은하고 아름다운 글이네요.^^ 물기를 머금고 소쿠리에 담겨 있는 채소 같아요. 아침에 좋은 글을 읽고 오랜만에 Return to Love도 들어서 기분 좋은 토요일이 될 듯해요. 고맙습니다-*

hnine 2010-03-27 13:50   좋아요 0 | URL
숟가락님, 저 음악 알고 계셨군요. 저는 어제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어요.
오늘은 집에서 꼼짝 안하고 있는 중인데도 시간이 참 잘 가네요.
서울이라면 지금 덕수궁 미술관엘 가겠어요. 아니면 인사동에, 아니면 숟가락님 서재에서 본 방산시장에... ^^

sweetrain 2010-03-27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외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방에는 티비도 없고 인터넷도 안되고 심지어 거울도 없어요...

저는...가끔씩, 제가 과연 나중에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많이 두렵기도 하네요.

hnine 2010-03-27 17:02   좋아요 0 | URL
혼자 있다보면 생각은 생각대로 많아지지요. 저도 그런 생각 했었어요. 행복한 가정까지 아니더라도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생활이 내게도 올까.
미래는 누구도 장담 못하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요.
혼자 기숙사 생활 하던 그 당시에는 무척 외로왔지만 그러면서 얻은 것도 많은 것 같아요.

상미 2010-03-27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것만으로도 신나지...
근데 그거 길어지면 심심하다.

hnine 2010-03-27 17:03   좋아요 0 | URL
맞아. 지난 여름에 다린이랑 남편이 여행가있는 동안 정말 얼마나 적적하던지.
이런 날은 1박 2일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

비로그인 2010-03-28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 컨.. 가끔 했던 곡인데요. 반갑네요

저 중간에 조가 바뀌는 부분은 조금 손가락이 어렵기도 해요 ^^

hnine 2010-03-28 06:4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도 아시는 곡이군요.

곡 제목처럼 바람결님도 언젠가는 Return to aladdin...아시죠? ^^

순오기 2010-03-2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박 2일 정도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은 정말 좋지요.
애들 크면 집에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하답니다.^^

hnine 2010-03-28 15: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식구들이 다 있어도 한가로운 시간이 널널한, 그런 때가 오는군요.
오늘도 순오기님의 짧은 댓글 한 줄에서 모르던 것을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