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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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현대소설을 잘 못 읽는다. 일단 이름이 잘 안외워지고, 짤막짤막한 문장들이 익숙하지 않고, 주제가 따로 없나 하는 느낌이 들게 빙 에둘러 묘사하는 방식에 적응이 잘 안되어서이다 (개인 취향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싫어하진 않으면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도 없고,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 읽는 경우는 순전히 순간적인 기분에 의해서라고 봐야한다. 글자 큼지막하고 두께는 얇은 그런 책일까? 했는데 배송되어 온 것을 보니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무결 무늬의 표지와 속지가 무척 예쁘다. 브라운색 모노톤의 그림도 분위기 있고.

일본어 모르니 츠바키가 동백나무라는 것은 물론 몰랐다해도, '문구점'! 그냥 이유없이 정감있는 이름.

저자인 오가와 이토는 첫소설이자 베스트셀러가 된 <달팽이 식당>으로 알려진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라고 한다. 나는 물론 읽어보지 못했고 이 책을 구입하고 난 후 작가 소개를 보고 알았다.

현대 소설에도 기승전결 구조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엔 딱히 기승전결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물 흐르듯, 어느 한 시기의 일기장을 뜯어내어 책으로 만든 것처럼 그렇게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큰 사건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사건도 없진 않다. 간판은 문구점이라고 달고 있지만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은 편지 의뢰와 함께 사연도 하나씩 들고 오는 셈이다. 그런 사연들과, 그 사연에 대처하는 주인공 포포와, 포포의 이웃들이 모여 책 한권의 내용을 이루었다. 편지를 의뢰하러 오는 사람들은 물론 글자를 몰라서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뭐라고 써야 할지, 하고 싶은 말을 오해없이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쓰는데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대하는 주인공과 그일에 대해 훈련시킨 그녀의 할머니이다. 편지 내용에 따라 사용하는 펜의 종류가 달라지고 종이의 종류가 달라진다. 글자체는 물론이고 가로쓰기를 하느냐 세로쓰기를 하느냐를 결정하여야 하고, 편지 봉투에 붙이는 우표까지 아무것이나 붙이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 속에 작성된 편지는 실제로 책 뒤에 글씨체 그대로 첨부되어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마쿠라 지역의 지도까지.

이책의 옮긴이는 번역하다 말고 궁금함을 참지 못하여 결국 일본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소설 속의 지역을 다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가마쿠라 지역엔 츠바키 문구점을 제외한 모든 장소와 상점과 거리가 그대로 있더란다.

아주 작고 평범해보이는 일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잘 다듬어 곱게 포장까지 하여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일본 사람들의 습성을 반영하기도 하고, 이 작가의 스타일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람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좀 무거운 책들 읽는 중간 중간, 이런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든 삶이 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해피엔딩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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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02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모메 식당도 그렇고 이 책도 따뜻한 이야기를 안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츠바키가, 동백나무라는 뜻 외에, 사람이름으로 쓰는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뒤마의 춘희도 아마 츠바키히메라고 쓰는 것 같은데요.(그치만 갑자기 자신이 없어져요.^^;)

오늘이 3일째인 추석연휴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편안하고 좋은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hnine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hnine 2017-10-02 21:27   좋아요 1 | URL
아, 츠바키를 이름으로도 쓰는군요.
말씀하신대로 따뜻하고 섬세하고 보들보들한 소설이었어요 ^^
책 뒤에 실제 편지글이 별도의 종이에 인쇄되어 첨부되어 있는데 일본 글자를 따라 써보고 싶어지더군요.
서니데이님 댁은 추석 지나면 완전 새단장 변신하겠어요. 긴 연휴이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 지났나 싶겠지요?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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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그렇다. 사랑하던 누군가를 먼저 보낸다는 일은 뭔가 내게서 한뭉텅이가 증발되어 날아간 후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다. 사라진 뭉텅이도, 그것이 있던 자리도, 어느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분명 느껴진다.

봄밤. 슬픈 일은 봄에 일어나면 더 슬프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삼인행>

짧은 한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느낌. 두명의 남자와 한 여자라는 구도도 낯설지 않다.

1박2일 짧은 여행을 지루하지 않고 꽉찬 느낌의 단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니 권여선이란 작가 자신이 지루하지 않고 꽉찬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길떠난 세사람 각각의 관계와 여행의 목적 등이 분명하지 않게 묘사되었음에도 그것이 큰 흠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의 더 중요한 걸 포기하고 체념한 마당에, 가고자 하는 맛집엔 꼭 들러서 원하는 걸 먹어야 한다는 이들의 의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는건 이런거라고? 아니면 이래선 안되는거라고.

세사람중 '주란'과 '규'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고 '훈'은 처음엔 방관자인것처럼 보이다가 뒤로 갈수록 주란이 빠지고 훈과 규의 관계로 이야기의 촛점이 옮겨진다. 아마 셋중 어느 한사람을 방관자로 두지 않고 공평하게 비중을 두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이모>

친이모가 아니고 시이모이다. 그만한 거리감이 이 소설속 인물에게서 느껴진다. 나와 비슷한 사람 깉기도 하고 아주 다른 사람 같기도 한 인물. 아무것도 소유하기 싫어하는 삶이란 어쩌면 그만큼 상실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그것을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카메라>

무슨 설정이 이런가. 폐지된지 2년이 넘은 라디오 프로그램 팀원들의 만남. 매우 구체적이고, 경험담 없이 시작하기 어려웠을 설정이다. 이 팀원들중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헤어진 여인의 누나. 116쪽의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란 어떤 얼굴일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135쪽)

이래서 사는게 어려워지는거다. 꽉 쥐고 놓지 말아야 살 수 있는 때가 있고, 꽉 쥐지 말고 놓아야 살 수 있는 때가 있다는것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게 각각 언제인지를 아는 것,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인데, 그건 살면서 시간과 함께, 경험과 함께, 시행착오는 필수로 경험하면서 배워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카메라 용도 중에는 감시 기능이 있다. 감시 카메라. 남을 감시하는 일.

우연한 실수가 필연처럼 삶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단편소설의 단골주제중 하나라면, 왜 헤어졌는지, 관희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관주와 문정은 어떤 연인이었는지, 다 쳐내고 주제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본다.

 

<역광>, <실내화 한켤레>

역광은 내용과 제목 사이가 보통 독자의 수준으로 메꾸기엔 너무 멀고, 실내화 한켤레는 한사람의 질투, 파괴성을 얘기한다는 것 부터가 약간 TV 드라마식 구성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층>

층을 무시해버리고 살수 있든 없든 이 사회에 층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는 층.

 

오래 전, 한국 소설을 몹시 사랑하던 시절,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지나쳤을리가 없다. 그런데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게 분홍리본의 시절이었나 아니면 다른 책이었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읽다가 자꾸 정신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리는데 그만 뭐가 문제냐, 나랑 안 맞는거냐, 나중에 읽지, 하고 제껴 놓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시도한 이 소설. 그런데 단편 중에 어디에도 주정뱅이는 없네! 그러니까 결국 책 제목의 주정뱅이는 작가가 자신을 일컬은 말이라고 봐야하나? 그녀의 알콜 사랑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므로.

책 뒤에 해설을 신형철 평론가가 썼다. 그런데 어쩌나. 본책 읽을 때보다 더 감탄하며 해설을 읽었으니.

작품 속 인물들을 <견뎌내는 자>의 뜻으로서 Homo patience라고 묶어말하는데야 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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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학번인 내가 대학생일때도 내가 다니던 대학에 평생교육원이라는데가 있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해서는 입구에 세워진 신식 건물을 보며 저기가 뭐하는데인가 했었다. 학생 나이는 훨씬 지난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가방을 들고 교정 내를 다니는 것 보면 학교 교수님도 아니고, 마치 나들이 온 양 곱게 차려 입으신 분들이 그 건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서 평생교육원으로 강의 들으러 오신, 학생 아닌 학생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땐 저렇게 한가하게 한두 과목 강의 들으러, 저렴하지도 않은 수강료 내고 학교 나들이 하는, 대부분 졸업생 출신 아주머니들 보면 딴 세상 사람들 같았고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공부가 하고 싶어서 오는 거 맞아? 이런 심통 맞은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평생교육원이라는데 다니기 시작한지 벌써 3학기째이다. 그것도 같은 제목의 강의를, 한 교수님으로부터 계속 듣고 있다. 내 원래 전공도 아니고 2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까지 가는데도 이 강의를 듣고 오는 날은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내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따위의 평소 고민을 다시 흔들어 재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교수님은 영문과 교수님이신데 정년퇴직하신지 3년 되셨다고 하고, 정년퇴직과 함께 서울을 떠나 지방에 집을 지으시고 텃밭을 가꾸고 책 읽으시고 쓰시면서 지내시는데 일주일에 딱 하루 이 강의하러 서울의 옛 근무처로 오시는거다.

이번주 강의에선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한 것이 수업 내용이었는데, A C Bradley 란 사람이 <Shakespearean Tragedy> 란 책에서 비극이 예술로 되기 위해선 다음 세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첫째, pity  (연민의 감정): 작품 속 주인공을 보며 저런 일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 참 불쌍하구나 하는 느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fear (두려움의 감정): 나에게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일어나야 한다. 세째, catharsis (정화): 극중 비극을 경험함으로써 정신을 정화하는 효과를 주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를 더 제시하셨다. 윌리엄 예이츠의 시 "Lapis Lazuli (청옥 부조)"에서 인용한 대목으로 배우가 우느라 대사를 망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비극을 연출하고는 무대뒤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인 삶이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운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 선 배우는 흐느끼느라 자신의 대사를 망쳐서는 안된다.

앞의 세가지 조건으로는 그냥 수업 내용이었다. 그런데 네번째 조건을 첨가하신 노교수님의 안목과 경험과 살아온 지혜때문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는 세상은 갈때와 같지 않다.

 

학생들에게 강의할때보다 평생교육원의 지긋한 학생들에게 강의할때 더 보람을 느끼신다고 교수님께서 언젠가 그러셨다. 요즘 학생들은 시험을 안보면 공부를 안한다고. 그런데 평생교육원 학생들은 시험도 안보는데도 수업 시간에 보면 지난 시간에 강의한 내용을 다 알고 앉아있다고 하셨다. 같은 내용을 강의해도 학생들은 아직 세상 산 경험이 적어서 그런제 잘 이해하는 눈빛이 아닌데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하면 인생 경험이 꽤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느껴지신다고.

 

교수님은 언제까지 강의를 하실 수 있으실지 모르지만, 나 역시 언제까지 강의를 들으러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되도록 오래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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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2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h님! 참 부지런 하십니다.
옛날에 저도 졸업하고 한동안 평생교육원 기웃 거렸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저도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그래야 할 텐데 이러고 있습니다.ㅠ

삶이 예술적으로도 아름다운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 선 배우는 흐느끼느라
자신의 대사를 망쳐서는 안된다.
정말 멋진 말이네요. 저도 기억하고 살겠슴다.^^

hnine 2017-09-28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저보다 한학기 먼저 이 강의를 듣기 시작한 친구가 권해서 알게 되었어요. 집이 멀어서 권해보긴 하지만 듣는다고 하려나 했다는군요. 그런데 저는 친구가 너도 이 강의 들을래? 라고 묻자 마자 5초도 안기다리도 ‘응! 나도 들을래!‘ 이랬답니다.
때로는 문학 수업인지, 철학 수업인지, 이해가 어려울때도 있지만 교수님께서 최대한 이해가 쉽게 설명해주세요.
우리는 모두 무대위에 선 배우. 우리 인생은 진행되고 있는 연극. 우리의 대사를 망치지 말고 연극을 완결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이런 말을 어떤 철학서도 아닌, 시인의 시에서 선별해내었다니 과연 영시 전공한 영문학자 다우시지요.

페크pek0501 2017-09-2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 평생교육원에 문학 강의 들으러 다녔었어요. 강의도 좋았지만 수업 뒤에 문우들과 어울려 밥 먹고 차 마시는 시간을
즐겼었어요. 그때 사귄 친구를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시절이었어요.
마음껏 즐기시길요...

hnine 2017-09-29 17:02   좋아요 0 | URL
저는 집이 멀다는 핑계로 끝나면 바로 튕기듯 일어나 집으로 온답니다. 이제 3학기째 듣다보니 얼굴도 다 알고 결석한 것도 금방 아는 정도인데 말입니다.
수업은 못알아듣는 내용도 많아서 지지난 수업엔가 sonnet 에 대해 배우는데 sonnet이라면 세익스피어 소넷만 겨우 알고 있는 제게 Petrachan sonnet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금시초문. 한글로 소리나는대로 받아적었다가 나중에 검색해보고 알았어요 ㅠㅠ
아직도 그때 함께 수업들으시던 분들과 연락하며 지내신다니 사람들과 관계가 좋으신가봐요. 저는 그걸 잘 못해서 친구가 별로 없어요 ㅠㅠ
 

 

"집이 왜 집인줄 알아? 집 밖이 전쟁터라면 집은 안식처이어야 한다구. 그런데 어떻게 집이 더 전쟁터같아? 왜 사람을 그냥 쉬게 두질 않고 닥달이야?"

남편 말에 기가 막혔다. 집은 자기에게만 쉴 곳이어야 하나? 자기에게 안식처가 되게 하기 위해 여자인 나에게는 일터가 되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당신이야 하루 종일 집에 있잖아. 그런 사람이 뭐 따로 안식처가 필요해. 하루 종일 안식이면서."

전업주부의 아킬레스의 건이다.

"그래, 쉬어. 쉬라고. 누가 말려."

이것 저것 챙기다보면 마음이 누그러들까봐 그 옷차림 그대로,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나왔다.

갈곳을 대자면 열곳도 넘는다. 하루 이틀이었나. 집을 나오는 상상을 하는 날이. 아니, 상상에 그치지 않고 마치 가상현실 속을 체험하듯이 마냥 쏘다니고 다시 가상현실이 아닌 그냥 맹맹한 현실 속으로 나와야 했던 날이.

 

지금과 다르게 직접 강의실마다 발도장 찍고 다니며 수강신청을 하던, 고리짝 같은 시절이었다. 내 전공과 전혀 상관없이 심리학 과목을 꼭 듣고 싶던 나는 겨우 한 두 자리밖에 여유가 없다는 말에 새벽같이 가서 그 과목 신청을 하고 돌아오는길이었는데 아차 싶었다. 서두르다가 결국 내가 듣고 싶은 교수의 심리학이 아닌, 엉뚱한 교수의 과목을 신청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시간은 벌써 한참 흘렀는데 오던 길을 마구 뛰어, 8월의 그 뜨거운 햇빛 아래 쓰러지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로 뛰어가 수강신청 정정을 하고 나니 몸은 온통 땀 범벅에, 몇걸음도 더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직 카페들이 문을 열기엔 이른 시간. 두리번 거리다가 들어간 곳이 에뛰드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에뛰드. 쇼팽의 피아노연습곡 에뛰드? 발레의 에뛰드?

들어가니 물론 손님은 아무도 없고 주인도 있는지 없는지 인기척이 없다.

"여기요~"

하고 사람을 찾으니 그때서야 젊은 남자가 물잔을 들고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

대학 다니며 아무 추억거리도 없고, 아니 못만들고 졸업해서 그 시절에 대한 애정도 없고, 그 곳이 아직 남아있으리라고 기대도 안하면서 왜 거기가 가보고 싶었을까.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찾아가는 길.

상점들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골목 구조는 그대로였기 망정이지 아니면 길눈 어두운 나는 많이 헤매었을뻔 했다.

'엇, 저기야 저기!'

간판은 에뛰드가 아니었지만 자리는 분명 그 에뛰드 자리였다.

'베르세우스'

자장가라는 뜻의 프랑스어.

요즘 카페는 자장가와 어울리게 쉴 곳의 장소라기보다는 단기임대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와서 잠깐 자기 할일을 하고 가는 곳이라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로 알았다.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는걸.

"어떻게 오셨나요~?"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묻는 여자의 인상은 여자라기 보다 여인이라고 해야 더 어울렸다. 가늘한 몸매에, 전혀 튀지 않는 옷차림인데 그게 오히려 튀어 보였다. 녹색, 그러니까 식물의 잎 같은 진초록이 아니라 톤다운된 녹색, 올리브그린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색 치마, 흰색 블라우스, 미색 가디건.

나중에 보고서 알았다. 베르세우스라는 간판 옆에 작게 ASMR 이라는, 봐도 지나쳤을 단어가 조그맣게 써있다는 것을. 

ASMR (Automonous sensory meridian responses). 이걸 유튜부 동영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이런 샵이 있는줄은 몰랐다.

"책을 읽어드릴까요? 아니면 얼굴 마사지를 받으시겠어요? 귀청소를 해드릴까요?"

 

엄마 품속이 이랬을까? 내가 지금 왜 여기 있고, 어디서 왔다는 것 조차 다 잊었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옷, 불만이라는 이름의 옷, 열등감이라는 이름의 옷, 미움이라는 이름의 옷, 기대라는 이름의 옷.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진 듯한 느낌.

'이게 쉼이야. 이런게 안식이지.'

여자의 손길에, 여자의 목소리에 나를 맡기고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 있는 동안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도움을 받는 기분도 좋지만 이런 도움을 주는 일도 참 좋을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 샵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후3시에 출근하여 10시까지 일했다. 퇴근하는 남편과 얼굴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덤이었다. 내가 집에 들어갈때까지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인 날이 더 많았지만 그건 이전부터 일상이었으니까.

남자 손님보다 여자 손님, 나이가 지긋한 분보다는 젊은 여성들이 훨씬 많다는 것은 의외였다.

일 시작하고 일주일쯤 된 날이었다. 드물게 남자 손님 목소리가 나기에 내다보고는 다시 뒷걸음질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카운터 여자의 물음에 개미소리만한 그의 대답을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쉴 수 있으면 돼요. 무슨 도움이든간에, 편히 쉬고 갈 수 있으면 됩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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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09-2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이야.ㅎㅎ
당연히 픽션이지요~~
선입견은 왠지...

hnine 2017-09-25 22:49   좋아요 0 | URL
ㅋㅋ 안식을 찾는 아내와 안식을 찾는 남편. 결국 서로에게서 못찾고 다른 곳에서 찾는다는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길래 10분 만에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따지지도 않고 휘리릭 써봤어요 재미삼아서요 ^^

2017-09-26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7-09-2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수백개 눌러드리고싶습니다.
제마음을 들며다보신 줄 알고 깜놀 했습니디~

hnine 2017-09-26 22:53   좋아요 0 | URL
푸른희망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을 읽어주신것만해도 감사한데, 공감해주셨다니 더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충분히 쉬지 못하는 일상을 역시 보내고 계시구나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좀 그렇기도 하네요.
ASMR이라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던 중, 이게 차라리 지금 그 누구보다 나에게 안식을 주는구나 생각이 들었답니다. 부부 사이라면 서로 의지가 되고 안식이 되고 그럴거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찬물을 끼얹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엄마 반성문 - 전교 일등 남매 고교 자퇴 후 코칭 전문가 된 교장 선생님의 고백
이유남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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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있는 부모에게 당신은 지금 자식을 사랑하고 있는가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할 부모 있을까?

하지만 좀 심하다 싶은 저 표지 그림 같은 것이 부모라는 입장이다. 늘 반성 모드. 못해준 것이 없을까. 해줘서 오히려 해가 된 것은 아닐까. 이래도 반성, 저래도 반성의 이유가 된다.

나도 부모이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정말 듣기 싫었던 말중 하나는 내 의견을 무시하고 부모 일방적으로 지시하면서 꼭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똑같은 잔소리 반복하면서도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러면 나는 속으로 '아닌데, 그 말로 내게 보탬되는거 하나 없는데' 부모 마음 편하라고 시키면서, 그 이상 정답은 없다는 듯이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꼭 해야할 잔소리인지. 자식이 그렇게 안 하면 정말 큰 일 날 일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몇번을 오싹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었던 환자가 협심증 단계에서 자기 증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치료받아 살아난 경우라고나 할까. 저자의 상황을 보면 그 정도로 급박한 상황까지 갔었다는 뜻이다. 완벽주의에, 뭐든지 열심인 엄마. 자식을 위해서라면 퇴근해서 몸이 천근만근되어도 최선을 다했던 엄마로 살아온 저자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돌은 커녕 본인은 위로를 받아도 시원찮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텐데.

부모가 무식하다는 것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석사 박사 학위가 있으면 뭘 합니까? 자기 자식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아이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면 무식한 부모, 무자격 부모인 것이지요. (59)

부모의 유효기간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라는 말도 공감한다. 초등학교 3학년으로 부모 역할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기를 지나면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는 것 보다 친구를, 또래를, 그 집단 속에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부모는 한발짝 물러나 좀 더 멀리서 자식을 지켜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가? 갑자기 되는가? 우리 나라 부모들은 자식을 결혼시켜놓고도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해볼까 호시탐탐 기회를 옅보는데. 도움이라는 명분으로. 내가 안도와주면 누가 도와주냐는 명분으로. 부모의 유효기간이 초등 3학년까지라는 말은 뒤집어보면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는 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도 된다. 아, 어려운 일이다.

아이들이 뭘 하겠다고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179)

하다못해 속옷 한장을 고를때도 아이가 이걸 사겠다고 집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네가 뭘 알아 하고 무시하는 적은 없었는지.

논술교육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거대기'를 자주 함으로써 전두엽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논술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180)

이건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할땐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라면 하라든지, 다 너를 위해서라든지, 그건 근거가 아니다.

부모가 이혼하는 진짜 이유는 싸움의 '내용'이 아니라 싸우는 '방식'때문 (212)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사이좋은 부모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전에 읽은 다른 책에서도 그랬다. 싸울 일이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냐면서, 잘 되는 가정과 파국으로 가는 가정 사이에는 갈등 상황을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들의 시각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고 잔잔하게 이야기하는 습관 (217)

추상적이고 막연한 어떤 지침보다 이런 소소한 것부터 고쳐야 한다. 목소리를 키우지 않는 것. 한가지 덧붙이자면 자식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지 않고 끝까지 다 듣고 말하는 것.

더 좋은 팁도 알려준다.

충고를 하거나 제안을 하고 싶을 때는 먼저 아이의 말부터 들어보고 "내가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좋은 생각이 났는데 말해줘도 되겠니?" 라고 반드시 아이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227)

자식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꼭 가르치려드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다. 지금 화났지? 속상하니? 라고 넘겨 짚어 묻는 대신 지금 기분이 어떠니? 라고 묻는 것도 권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에게 엄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고 했더니 다수의 학생들이 "멘토" 또는 "조언자"라고 했다고 한다. 멘토나 조언자가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마도 자식에게 하나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고 많은 엄마들이 자기 일을 줄이고 자기 시간을 포기하면서 자식을 위해 헌신했으리라.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멘토나 조언자보다는 자식 말을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고 싶다. 어디에도 하지 못할 말을 엄마만은 들어주겠지 할 수 있는 그런 엄마. 맨 먼저가 아니라 맨 나중에 찾는 사람으로서의 엄마. 그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진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식 인생, 자기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지. 그러라고 격려나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만큼 힘들었을까. 병원을 드나들며, 벼랑에 선 자식을 눈 앞에서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삶을 이어나간 것만해도 대단하다 싶다.

사랑은 많은 경우 구속의 탈을 쓰고 있다.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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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09-25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고 잔잔하게 이야기하는 습관‘.....요즘 노력하고 있어요.
비단 아이뿐 아니라 직장생활에서도...
˝내가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좋은 생각이 났는데 말해줘도 되겠니?˝ 라고 반드시 아이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명심해야 겠군요.
노력 많이 하시는 나인님^^ 응원합니다!

hnine 2017-09-25 16:14   좋아요 1 | URL
일단 자식을 둔 이상 어떤 엄마가 되느냐는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데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 같아서 늘 염두에 두게 됩니다. 극한적으로 말하면 늘 반성문 쓰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고요.
우리 나라의 많은 부모들이 이 책의 저자처럼 못해서 안간힘 쓰지 않는지, 모두 읽어보라고 하고 싶었어요. 강연 내용을 딸이 받아쓴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건 휘리릭 금방 읽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