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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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그렇다. 사랑하던 누군가를 먼저 보낸다는 일은 뭔가 내게서 한뭉텅이가 증발되어 날아간 후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다. 사라진 뭉텅이도, 그것이 있던 자리도, 어느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분명 느껴진다.

봄밤. 슬픈 일은 봄에 일어나면 더 슬프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삼인행>

짧은 한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느낌. 두명의 남자와 한 여자라는 구도도 낯설지 않다.

1박2일 짧은 여행을 지루하지 않고 꽉찬 느낌의 단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니 권여선이란 작가 자신이 지루하지 않고 꽉찬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길떠난 세사람 각각의 관계와 여행의 목적 등이 분명하지 않게 묘사되었음에도 그것이 큰 흠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의 더 중요한 걸 포기하고 체념한 마당에, 가고자 하는 맛집엔 꼭 들러서 원하는 걸 먹어야 한다는 이들의 의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는건 이런거라고? 아니면 이래선 안되는거라고.

세사람중 '주란'과 '규'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고 '훈'은 처음엔 방관자인것처럼 보이다가 뒤로 갈수록 주란이 빠지고 훈과 규의 관계로 이야기의 촛점이 옮겨진다. 아마 셋중 어느 한사람을 방관자로 두지 않고 공평하게 비중을 두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이모>

친이모가 아니고 시이모이다. 그만한 거리감이 이 소설속 인물에게서 느껴진다. 나와 비슷한 사람 깉기도 하고 아주 다른 사람 같기도 한 인물. 아무것도 소유하기 싫어하는 삶이란 어쩌면 그만큼 상실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그것을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서.

 

<카메라>

무슨 설정이 이런가. 폐지된지 2년이 넘은 라디오 프로그램 팀원들의 만남. 매우 구체적이고, 경험담 없이 시작하기 어려웠을 설정이다. 이 팀원들중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헤어진 여인의 누나. 116쪽의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란 어떤 얼굴일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 문정씨. 놓아야 살 수 있어요." (135쪽)

이래서 사는게 어려워지는거다. 꽉 쥐고 놓지 말아야 살 수 있는 때가 있고, 꽉 쥐지 말고 놓아야 살 수 있는 때가 있다는것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게 각각 언제인지를 아는 것,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인데, 그건 살면서 시간과 함께, 경험과 함께, 시행착오는 필수로 경험하면서 배워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카메라 용도 중에는 감시 기능이 있다. 감시 카메라. 남을 감시하는 일.

우연한 실수가 필연처럼 삶을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이 단편소설의 단골주제중 하나라면, 왜 헤어졌는지, 관희는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관주와 문정은 어떤 연인이었는지, 다 쳐내고 주제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본다.

 

<역광>, <실내화 한켤레>

역광은 내용과 제목 사이가 보통 독자의 수준으로 메꾸기엔 너무 멀고, 실내화 한켤레는 한사람의 질투, 파괴성을 얘기한다는 것 부터가 약간 TV 드라마식 구성 수준을 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층>

층을 무시해버리고 살수 있든 없든 이 사회에 층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회에 존재하는 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는 층.

 

오래 전, 한국 소설을 몹시 사랑하던 시절,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지나쳤을리가 없다. 그런데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게 분홍리본의 시절이었나 아니면 다른 책이었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읽다가 자꾸 정신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리는데 그만 뭐가 문제냐, 나랑 안 맞는거냐, 나중에 읽지, 하고 제껴 놓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시도한 이 소설. 그런데 단편 중에 어디에도 주정뱅이는 없네! 그러니까 결국 책 제목의 주정뱅이는 작가가 자신을 일컬은 말이라고 봐야하나? 그녀의 알콜 사랑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므로.

책 뒤에 해설을 신형철 평론가가 썼다. 그런데 어쩌나. 본책 읽을 때보다 더 감탄하며 해설을 읽었으니.

작품 속 인물들을 <견뎌내는 자>의 뜻으로서 Homo patience라고 묶어말하는데야 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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