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왜 집인줄 알아? 집 밖이 전쟁터라면 집은 안식처이어야 한다구. 그런데 어떻게 집이 더 전쟁터같아? 왜 사람을 그냥 쉬게 두질 않고 닥달이야?"

남편 말에 기가 막혔다. 집은 자기에게만 쉴 곳이어야 하나? 자기에게 안식처가 되게 하기 위해 여자인 나에게는 일터가 되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당신이야 하루 종일 집에 있잖아. 그런 사람이 뭐 따로 안식처가 필요해. 하루 종일 안식이면서."

전업주부의 아킬레스의 건이다.

"그래, 쉬어. 쉬라고. 누가 말려."

이것 저것 챙기다보면 마음이 누그러들까봐 그 옷차림 그대로, 지갑과 휴대폰만 들고 나왔다.

갈곳을 대자면 열곳도 넘는다. 하루 이틀이었나. 집을 나오는 상상을 하는 날이. 아니, 상상에 그치지 않고 마치 가상현실 속을 체험하듯이 마냥 쏘다니고 다시 가상현실이 아닌 그냥 맹맹한 현실 속으로 나와야 했던 날이.

 

지금과 다르게 직접 강의실마다 발도장 찍고 다니며 수강신청을 하던, 고리짝 같은 시절이었다. 내 전공과 전혀 상관없이 심리학 과목을 꼭 듣고 싶던 나는 겨우 한 두 자리밖에 여유가 없다는 말에 새벽같이 가서 그 과목 신청을 하고 돌아오는길이었는데 아차 싶었다. 서두르다가 결국 내가 듣고 싶은 교수의 심리학이 아닌, 엉뚱한 교수의 과목을 신청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시간은 벌써 한참 흘렀는데 오던 길을 마구 뛰어, 8월의 그 뜨거운 햇빛 아래 쓰러지지 않은게 다행일 정도로 뛰어가 수강신청 정정을 하고 나니 몸은 온통 땀 범벅에, 몇걸음도 더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직 카페들이 문을 열기엔 이른 시간. 두리번 거리다가 들어간 곳이 에뛰드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에뛰드. 쇼팽의 피아노연습곡 에뛰드? 발레의 에뛰드?

들어가니 물론 손님은 아무도 없고 주인도 있는지 없는지 인기척이 없다.

"여기요~"

하고 사람을 찾으니 그때서야 젊은 남자가 물잔을 들고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

대학 다니며 아무 추억거리도 없고, 아니 못만들고 졸업해서 그 시절에 대한 애정도 없고, 그 곳이 아직 남아있으리라고 기대도 안하면서 왜 거기가 가보고 싶었을까.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골목골목을 찾아가는 길.

상점들은 바뀌었을지 몰라도 골목 구조는 그대로였기 망정이지 아니면 길눈 어두운 나는 많이 헤매었을뻔 했다.

'엇, 저기야 저기!'

간판은 에뛰드가 아니었지만 자리는 분명 그 에뛰드 자리였다.

'베르세우스'

자장가라는 뜻의 프랑스어.

요즘 카페는 자장가와 어울리게 쉴 곳의 장소라기보다는 단기임대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와서 잠깐 자기 할일을 하고 가는 곳이라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바로 알았다.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는걸.

"어떻게 오셨나요~?"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묻는 여자의 인상은 여자라기 보다 여인이라고 해야 더 어울렸다. 가늘한 몸매에, 전혀 튀지 않는 옷차림인데 그게 오히려 튀어 보였다. 녹색, 그러니까 식물의 잎 같은 진초록이 아니라 톤다운된 녹색, 올리브그린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색 치마, 흰색 블라우스, 미색 가디건.

나중에 보고서 알았다. 베르세우스라는 간판 옆에 작게 ASMR 이라는, 봐도 지나쳤을 단어가 조그맣게 써있다는 것을. 

ASMR (Automonous sensory meridian responses). 이걸 유튜부 동영상으로만 봤지 실제로 이런 샵이 있는줄은 몰랐다.

"책을 읽어드릴까요? 아니면 얼굴 마사지를 받으시겠어요? 귀청소를 해드릴까요?"

 

엄마 품속이 이랬을까? 내가 지금 왜 여기 있고, 어디서 왔다는 것 조차 다 잊었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옷, 불만이라는 이름의 옷, 열등감이라는 이름의 옷, 미움이라는 이름의 옷, 기대라는 이름의 옷. 걸치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진 듯한 느낌.

'이게 쉼이야. 이런게 안식이지.'

여자의 손길에, 여자의 목소리에 나를 맡기고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 있는 동안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도움을 받는 기분도 좋지만 이런 도움을 주는 일도 참 좋을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보람있는 일이겠는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 샵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후3시에 출근하여 10시까지 일했다. 퇴근하는 남편과 얼굴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덤이었다. 내가 집에 들어갈때까지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인 날이 더 많았지만 그건 이전부터 일상이었으니까.

남자 손님보다 여자 손님, 나이가 지긋한 분보다는 젊은 여성들이 훨씬 많다는 것은 의외였다.

일 시작하고 일주일쯤 된 날이었다. 드물게 남자 손님 목소리가 나기에 내다보고는 다시 뒷걸음질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았지만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카운터 여자의 물음에 개미소리만한 그의 대답을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쉴 수 있으면 돼요. 무슨 도움이든간에, 편히 쉬고 갈 수 있으면 됩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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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7-09-2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짝이야.ㅎㅎ
당연히 픽션이지요~~
선입견은 왠지...

hnine 2017-09-25 22:49   좋아요 0 | URL
ㅋㅋ 안식을 찾는 아내와 안식을 찾는 남편. 결국 서로에게서 못찾고 다른 곳에서 찾는다는 얘기가 갑자기 생각나길래 10분 만에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따지지도 않고 휘리릭 써봤어요 재미삼아서요 ^^

2017-09-26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2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7-09-2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수백개 눌러드리고싶습니다.
제마음을 들며다보신 줄 알고 깜놀 했습니디~

hnine 2017-09-26 22:53   좋아요 0 | URL
푸른희망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을 읽어주신것만해도 감사한데, 공감해주셨다니 더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충분히 쉬지 못하는 일상을 역시 보내고 계시구나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좀 그렇기도 하네요.
ASMR이라는 것을 들으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던 중, 이게 차라리 지금 그 누구보다 나에게 안식을 주는구나 생각이 들었답니다. 부부 사이라면 서로 의지가 되고 안식이 되고 그럴거라 기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찬물을 끼얹었는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