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쉬어도, 그 무엇을 사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정희재 지음 / 갤리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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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동안 내 책상 앞에는 "Flexibility is the answer." 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내가 직접 써서 붙여놓은 것이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없고 꽉 막힌 나를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일이 계획한대로 되어가지 않으면 노선을 변경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만 두고 싶어한다. 지각할 것 같으면 아예 결석을 해버린다. 잘 할 자신 없으면 아예 시작을 안한다. 이런 나의 성격을 고쳐보고 싶었었다. 좀처럼 고치기 어려운게 성격이라지만 그래도 인식하고 있는 이상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은 일고 있다고 본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지금은 그냥 생긴대로 살자는, 융통성도, 그 무엇도 아닌, 자포자기성? 이런 주의에 가까운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어차피 내 생각대로,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가보자는 것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라면 이것은 굳이 "권리"라고 까지 할 것도 없이 당연한것 아닌가? 하지만 요즘은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어떤 것이 나의 참모습이고 어떤 것이 과연 나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 또는 결정인지 모르고 사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파이팅!", "힘내!" 라는 구호보다 "잠깐 쉬어", "밥 먹고 해"라는 말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조언이 아닐까. (97쪽-'더 노력해라'라는 말을 거부할 권리)

다른 사람들은 과연 남들이 '화이팅'외쳐주는 소리에 얼마나 더 기운을 낼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내 경우엔 별로이다. 어떤 땐 무자비하고 무책임하게 들리기도 한다. 정 트리오의 어머니인 이원숙 여사 얘기가 생각난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유학 시절 너무 힘이 들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어머니 이원숙 여사에게 바이올린을 이제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큰 맘 먹고, 어머니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각오로 말은 하면서도 어머니가 허락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는데, 뜻밖에 어머니로부터 나온 대답은, '그래, 네가 그렇게 힘들다면 그만 하자.' 정경화는 그 말에 오히려 정신이 번쩍 나서 다시 바이올린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그래도 죽을 힘을 다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습관적으로 하는 '파이팅'보다 훨씬 힘이 되는 것이다.

가면우울증이란 속마음은 우울한데 겉으로는 쾌활한 척해야 하는 간극에서 오는 마음의 병이다. (113쪽-사교적이지 않을 권리)

지난 여름, 오랜만에 본 지인으로부터 얼굴이 많이 상했다는 말을 들었다. 농담삼아 "갱년기 우울증인가보죠" 라고 했더니 말할때보면 전혀 그래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보이지 않느라고 힘든가봐요." 그렇게 대답했던 적이 있다. 왜 우리는 늘 웃어야 하는가.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우리들의 마음은 병들어간다.

대부분의 정신적인 문제는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답입니다. (156쪽-끝까지 가볼 권리)

노동없는 삶은 부패한다고 까뮈가 말했다. 생각을 줄이고 행동을, 매일 일부러라도 땀을 흘려 몸을 움직여야할 이유이다.

'정보를 지닌 개인들'이 단 5퍼센트만 있어도 200명에 이르는 군중들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머지 95퍼센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무리를 따라간다. (182쪽-광고를 보지 않을 권리)

대학교1학년 교양영어 교재에서 'passionate a few (a few passionate 이었던가?)' 라는 말이 나왔는데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랐다. 번역본에는 열정적 소수라고 나와있었고 수업 시간에도 비슷하게 해석을 하고 넘어갔던 것 갔지만 그 의미가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이 세상은 다수에 의해 움직여가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인 소수, 그 몇 명에 의해 움직여간다는 것은 내게 충격이었다. 리드하는 그 소수 그룹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따라가는 나머지 그룹에 속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는 특히 더 심하지 않나? 한번 유행하기 시작하면 온 나라를 그 상품, 그 유행이 휩쓴다.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상해보인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을 꺼내드는 나는 가끔 특이한 사람이 된다. 무엇을 사든 끝내 외로워질 것이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까지만 썼어도 공감했을텐데 오히려 그 다음 구절이 더 마음에 들어온다.

그러나 정말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뭔가가 있고 감당할 만하다면 한 번쯤 확 저지르는 것까지 억압할 필요는 없다. 집착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제공하는 좋은 것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세상 한가운데에서 수도자처럼 살기는 애당초 쉽지 않은 일. 다만, 소비가 주는 일시적인 만족감, 광고가 주는 애달픈 찰나의 환상을 거리를 두고 지켜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 자유의지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니까. (185쪽-광고를 보지않을 권리)

그래, 융통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포용력. 중요한 것은 내 자유의지라는 말도 마음에 든다.

인류 최초의 철학자는 걷는 이었을 것이다. 생존을 벗어난 걷기, 아무런 목적도 지니지 않는 걷기에 중독된 사람은 사색에 잠길 수 밖에 없다. 그이는 오로지 걷는다는 한 가지 행위에 몰입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음미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동료의 채근과 못마땅한 시선을 뒤로한 채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그이는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때로는 가슴이 터질 듯 충만하고, 때로는 허수경 시인이 노래했듯 '의전하게 차오르는 눈물'을 눈가에 매달면서. (202쪽-게으르게 산책할 권리)

걷기에 대해서라면 나도 100% 공감이다. 우울해도 걷고, 화가 나도 걷는다. 머리가 복잡할때도 걷는다. 심심해도 걷고 답이 떠오르지 않을때도 걷는다. 걷는 것 자체는 별로 힘들지 않다. 그보다는 걷기 위해 몸을 일으켜 문 밖을 나서기까지가 더 힘들다.

씻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자는 일 외에

어떤 기대나 계산 없이, 희망도 절망도 없이

자발적으로 매일 빠지지 않고

조금씩 하는 '그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준다. (224쪽-이자크 디네센)

난 이런 말이 너무 좋다.

삶을 긍정하는 시퍼런 기상 (247쪽)은 눈이 띄는 대단한 행위나 행동에 있지 않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 속에 있다. 남의 말에 내 인생을 잣대질 하지 말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나는 자유이다. 그 어떤 시련이나 고통도 자유로운 나를 해치지는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도 잘 대접하고 예의를 다하면 언젠가는 떠나간다. 부정적인 감정도 깨달음과 지혜를 준다. 그러나 치러야 할 수업료 역시 만만치 않다. (250쪽)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내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잘 대접하라는 말. 그것이 지나갈때까지 침착하게 잘 들여다보라는 말.

 

읽으면서 포스트잇 붙여좋은 곳을 다 옮겨적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동생이 읽어보라고 사주었지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늑장부리다 읽기 시작한 책.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뜻밖에 나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책이다. 아주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고난 후의 만족감이다.

동생,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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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월하기로 한다고?
    from so 2013-01-27 12:21 
    팜므느와르님이 쓰신 글을 어느새 아껴 읽고 있는데 그분의 글은 신문의 칼럼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신문과는 달리 주로 밤에 그분의 글을 읽게 되는 데 그날 하루 나의 일상을 지켜보고 쓰신 글 같은 글을 만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나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거나 어제처럼 "어머 어쩜~~~나도 그 경험 했어요."라며 막 수다를 떨고 싶은 느낌이 들게 하는데 아침에 눈 뜨자마자 팜님의 글을 다시 읽고 간지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먼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 문정희 산문집
문정희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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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라는 이름. 한국 시단에서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시인으로서의 삶을 일찍 시작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많이 쓰기도 했다. 대외적인 활동도 부지런히 하는 시인이다. 50대에 이르러서까지 시인으로서의 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듯 하니 거칠 것 없는 활보는 계속 될 것 으로 예상되는 시인.

그런 시인으로서의 문정희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도끼' 삼아 녹녹치만은 않았을 생을 부여잡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늘 나를 궁금하게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시인 문정희에게 그것은 '문학'이었다. 자신을 자신으로 유지시켜주는 것, 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헤치고 나가게 해주는 수단, 끝까지 놓지 않고 손에 꼭 쥐고 가야하는 물건. 도끼.

책의 내용은 기대만큼 무겁진 않았다 (!). 열심히 활동하는 시인이니 외유의 경험도 많을 터. 거기서 얻은 감상과 나름대로의 깨우침이 얼마나 많았으랴. 책 첫장의 작가의 말에 이 책은 고독과 자유와 방황, 그리고 만남과 감각에 대한 산문이라고 했는데 너무나 뻔한 단어들의 나열이기에 눈여겨 보지 않았다가, 책을 다 읽고 보니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겠다. 고독의 댓가로 치루어야 하는 자유. 고독하지 않은 동안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자유를 누리는 동안은 고독에 운다. 세계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가진 '만남', 삶이라는 여정 속의 '만남'. 저자에게 그 중 제일은 미당 서정주와의 만남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시인의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져 있으니 절대 지루할 리 없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거침없이, 보통사람들의 감각으로는 힘든 감정의 색깔을 시원하게 터뜨려 주는 저자의 문학성은 대단하지만, 뭔가 익어갈수록 그 표현이 화려하고 시원시원하기보다는 더 절제되고 단순해지는, 깊이 있고 무게가 있지만 결코 장황하지 않은, 그런 멋은 느끼지 못했다. 내가 바라는 문학은, 글은, 그렇게 읽혀지는 문학이고 글인가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10/10 정도 초감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시인이 되는 것일까? 남들보다 확실히 더 예민한 수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을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타고난나고들 하지 않나. 그리고 이것을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초감도 감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시인들의 글을 읽으며 해소한다.

"누가 승리를 말할 수 있으랴-극복이 전부인 것을!"

살면서 이런 생각을 안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릴케 정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너무 스르륵 읽혀서, 기대한만큼만 느낄 수 있었기에, 별점을 세개 주고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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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터는 단 한 가지 방법 블랙 로맨스 클럽
앨리 카터 지음, 곽미주.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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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아마존 청소년 소설 베스트셀러
워너 브라더스, 드류 배리모어 감독으로 전격 영화화!"

 

이런 찬사를 받고 있고, 제목도 특이하고, 올라온 평들도 대체로 좋다.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미국에선 2010년에, 우리 나라에서 번역본은 작년에 나왔고, 원제는 Heist society (훔치기 클럽?). 원제이 비해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번역본 제목도 재미있다.

미국에서 명문 기숙 학교에 다니고 있는 열 다섯 살 소녀 카타리나 비숍. 배후 조작에 의해 어느 날 학교에서 빠져나와 어떤 사건에 가담하게 된다. 바로 미술작품을 훔치는 사건이다. 물론 혼자 터는 것은 아니고 고만고만한 다른 아이들 다섯 명과 함께, 그리고 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의 특징은 모두 가족들이 이미 이런 훔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어릴 때부터 보면서 자라서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일이 새삼스럽지 않고 익숙하다는 것이다.

카타리나 (줄여서 '캣')는 아버지가 훔치지 않은 미술품이 아버지가 훔친 것으로 오해를 받자 그 오해를 풀어주기로 결심한다. (여기서 나의 궁금증. 캣은 아버지가 정말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지. 나는 끝까지 그게 의심스럽던데 말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일까?)

함께 가담하기로 한 다섯 명의 아이들의 구성은 대부분 친척, 그리고 캣에 의해 길거리 캐스팅된 아이가 한명 있다. 십대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이들의 대화가 보통 십대들 같지 않다. 은유, 함축 등의 수준이 웬만한 어른들 뺨 친다고 할까? 번역이 잘 되었더라면 훨씬 더 이런 점을 잘 살렸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사실 번역에 대해 유감이 많다. 두 번역자의 공동 번역인데, 지루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에 몰입하기가 참 힘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같은 부분을 여러번 읽기도 하고 앞 내용을 다시 들춰보기도 하고. 충분히 책장이 휙휙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드류 배리모어가 주인공이 아니라 감독으로 이것을 영화로 만든다니. 책을 읽은 후 영화로 보면 책만큼 재미가 덜 하다는게 보통이지만 이 영화만은 책보다 재미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번역본 보다는.

마지막까지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비실리 로마니'는 과연 누구일까? 캣의 아버지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캣은 어떻게 확신하는가 하는 의문과 똑같은 정도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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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귀신 창비청소년문학 46
남상순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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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남상순 작가는 신인 작가가 아니다. 청소년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도 아니다. 1992년에 문화일보로 등단,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적도 있는 작가이다. 이제는 제목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이 작품을 읽기 전, 다른 작가들과 함께 한 단편집에서 그녀의 작품을 처음 읽었고, 나쁘지 않은 느낌을 받았었다.

200쪽이 조금 못되는 장편 소설인데 제목을 보면 심각하고 진지하기보다는 발랄하고 유쾌한 내용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게 한다. '자양로 56길 20번지는 빈 집이다' 라는 첫장의 제목처럼 주인공인 고등학생 여자 아이가 경상도에서 서울로 막 올라와 자양로 56길 20번지를 찾아 다니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앞으로 그림을 전공으로 하고 싶은 이 아이는 서울의 큰아버지댁에 머물며 미술 학원을 다니게 되는데 경상도 사투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그냥 사투리를 숨기지 않고 말하는 등, 말하기의 갈등, 다시 말하면 적응의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된다.

여기에 주인공의 심리에 부응하는 배경으로 큰아버지집 동네의 빈집이 나온다. 잘 지어져 한때 한 가족이 살던 이 곳이 빈집으로 버려지기 까지의 과정, 그곳에 산다는 사투리 귀신의 이야기들이 도입되어 사투리와 표준말, 내것과 남의 것, 변화와 적응의 문제들을 연관시켜본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내내, 어색하기 그지없다. 왜일까.

뚜렷한 캐릭터를 갖지 않는 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주인공과 또래 친구들은 물론이고, 노란나무 대문집 할머니, 영교, 영교의 동생, 자살한 색시, 수퍼 아줌마, 큰어머니, 큰집의 세 사촌들. 이들이 모두 꼭 필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갸우뚱 하게 된다. 많은 수의 인물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등장한 인물들의 특징을 더 분명히 살려주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도 더 잘 드러날 수 있어야 했다. 많이 아쉽다.

또한, 주인공의 사투리가 과연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경상도에서 올라왔으니 경상도 사투리여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사투리가 모두 섞인 것 같다.

그동안 한번도 언급이 없었던 '연'을 마지막 결말에 갑자기 등장시켜 모든 문제점의 해결점으로 삼는 것은 또 어찌나 어색한지.

고등학생들의 대화 속에 요즘 아이들의 말투와 단어는 잘 들어가 있다. 작가가 많이 신경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작품 전체의 일관성 없음과 뻥뻥 뚫린 듯한 구성은, 고등학생들의 일기나 에피소드 여러개를 모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여 탄생한 작품이 아닌가 하는 쪽으로까지 상상하게 한다.

창비에서 나온 작품인데, 작가에게도, 출판사에게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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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앉아 창 밖으로 길 건너 상점들을 내다본다

손님도 없는데 치킨 집 남자는 나름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역시 주인 혼자 지키고 있는 옷가게

그 옆 미장원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다

손님이 없어 쓸쓸해하면 안되는데

생각하다가

창 밖으로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는 행위 자체가

쓸쓸함, 그것임을 알았다

 

 

2013.1.17

 

 

 

 

 

 

 

 

 

 

 

 

 

 

사람들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산을 보곤 하는 것이 모두 외롭다는 것은 알았어도

저 빈 잔디밭을 굴러가는 비닐봉지같이

비닐봉지를 밀고 가는 바람같이 외로운 줄은 알았어도

알았어도

다시 외로운,

새로 모종한 들깨처럼 풀없이 흔들리는

외로운 삶

 

 

 

- 장석남 詩集 <젖은눈>에 실린 '자화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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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1-1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삶은 어찌보면 외로움의 연속일수도......
문득 문득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분주함속의 외로움, 쓸쓸함이여!

hnine 2013-01-18 05:12   좋아요 0 | URL
쓸쓸함을 느끼는게 이상한게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삶이라는 것이 외로움의 연속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씩 느끼는 충만함과 따뜻한 감정에 더 감사하게 되더라고요. 고독은 정말 군중 속에서 느낄 때가 많지요.
세실님은 쓸쓸함을 너무 오래 끌고 가지 않는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잠깐씩만 느끼면 좋겠어요.

이진 2013-01-1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손님없는 가게를 보면 왠지 측은한 마음이 찾아들곤해요.
장사는 잘 될까, 혹 쓸쓸하시진 않을까...
어쩌면 저를 보는 거 같아서 그런 걸지도요...
나인님 좋은 밤 되세요!

hnine 2013-01-18 05:16   좋아요 0 | URL
좋은 밤 되라고 해주셨는데 4시도 안되어 잠이 깼습니다. 어제 밤 좀 일찍, 10시쯤 아이 옆에서 잠이 들었거든요.
저희 집이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에 있다보니 주위에 새로 생긴 상점들이 많아요. 주민 수에 비해 너무 많은 상점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저 많은 카페들, 저 많은 음식점들, 학원들...잘 되어야 할텐데, 괜한 걱정을 할때가 많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쓸쓸할 때 음악도 찾아듣게 되고, 글도 끄적거리게 되고, 이런 저런 생각도 하게 되고...우리들의 감성은 오히려 풍부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요. 좋은 점도 있구나~ ^^

같은하늘 2013-01-1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워도 좋으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싶어요.
방학중인 두 아들들과 보내는 하루가 참말로 힘드네요. -.-;;

hnine 2013-01-18 05:21   좋아요 0 | URL
우리들 심리가 이렇다니까요. 사람들과 부대낄땐 좀 혼자 있었으면, 막상 혼자 있을 땐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해요. 그런데 그게 내가 나서서 만들지 않으면 그냥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아이 하나도 저는 힘든데, 두 아들들 데리고 쉽지 않으시지요. 이제 좀 더 크면 그렇게 엄마를 찾지 않는답니다.

프레이야 2013-01-1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젖은눈, 이 시집을 나인님 소개로 샀던가요, 제가요? 기억이 가물거려요. 암튼 시는 좋아요. 나인님의 단상은 더 좋구요. 손님없는 가게 분주한 주인장,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전 왠지 따스하네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hnine 2013-01-18 22:34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시집을 한번 페이퍼에 올린 적이 있긴 하지요. 누구 소개로 구입하셨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영광일겁니다 ^^
오늘 서울 다녀왔는데 한강이 꽝꽝 얼었더라고요. 집을 나서면 한강을 건너야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집이 한강 중간에 있어서요 ㅋㅋ) 그때에는 아무 느낌없이 보던 한강인데 오랜만에 보니 참 크고 넓다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고요. 추운 날, 글이라도 따스하게 느껴지셨다니 그 말씀이 또 저를 따뜻하게 합니다.

꿈꾸는섬 2013-01-18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오랜만이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근데 쓸쓸하신거에요? 전 요새 쓸쓸함을 즐기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고 외롭거나 쓸쓸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더라구요.^^

hnine 2013-01-18 22:37   좋아요 0 | URL
꿈섬님, 무소식이 희소식임을 믿고 있었어요. 제 자리에서 모두들 열심히 살고 계시리라, 한동안 안보이시는 서재 친구분들 생각할때마다 그리 생각했지요. 저도 잘 지내고 있었답니다. 쓸쓸한건, 뭐 늘상 느끼는 일이고요. 저의 혈액형은 "쓸쓸형"인가봐요 ^^
독서지도 공부도 계속 하시나요? 읽으신 책도 많으실텐데 시간 나실때 조금씩 조금씩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