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유혹과의 대결이라는 우리 동화에서 드문 주제를 흥미롭고 성공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민호를 통해 촘촘하게 잡아낸, 유혹에 처한 인간의 심리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어떤 조력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어린이를 설정한 것도 믿음직스러웠다.

 

 

- '심사평 중에서' 김화영, 황선미, 김경연 -

 

 

 

 

 

 

 

 

 

2011년 제17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비룡소)으로 작년에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서 홍보도 많이 되고 리뷰도 많이 올라왔던 작품이다. 평들도 좋았고 집에도 가지고 있으면서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위의 심사평에서 '드문 주제'라는 것에는 바로 동의하기 어렵지만 '어떤 조력자의 도움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로서의 어린이를 설정'했다는 것은 동의한다.

글짓기를 잘 못하는 민호에게 어느 날 빨강 연필이 생기고, 그 연필을 가지고 쓰면 글이 술술 나오게 된다. 일종의 마법의 연필인 셈인데 문제즞 그렇게 쓰여진 글이 꼭 민호의 생각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그것을 알게된 민호는 고민하던 중, 민호가 갑자기 글짓기를 잘 하게 된것을 의심하던 재규에게 빨강 연필을 뺏기고 만다. 처음엔 그 연필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민호는 빨강 연필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한다 (책에서는 불에 태우는 것으로 나오는데 현실인지 꿈속인지 확실하지 않다). 책 표지 그림은 바로 이 빨강 여닐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의 효주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데 무슨 의미인지 아이들이 이해할까 의문이다.

 

마법을 지닌 물건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되고, 처음엔 그것의 도움을 받게 되지만 그 유혹과 결국은 대결해야하는 주인공. 이런 이야기는 심사평과 달리 드문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 주인공 아이의 깨달음, 결심, 노력, 의지에 의해 그것을 떨쳐버린다는 설정은 심사평과 같이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이고, 수상작이 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빨강 연필의 도움을 받은 민호의 글짓기 중 알려진 이야기의 패러디가 몇편 소개되는데 내가 읽어도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위에도 어디 이런 빨강 연필 없을까?

 

 

 

 

 이 책 역시 집에 언제부터 있었는데 아이만 읽고 들춰 볼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제목이 그냥 '내동생'이 아니라 '또다른내동생'이다. 입양된 동생을 말하는데 읽다보니 이 아이 역시 입양된 아이.

작가는 자기 동생 내외가 입양한 세 조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입양 가정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주 눈에 보듯이 나타나있다. 입양아와 부모 사이의 문제, 또 입양아가 둘 이상일때 그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문제, 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일 경우 더해지는 문제, 입양에 대해 엄마와 아빠의 입장의 차이등. 아이들 책이라고 하지만 언젠가 읽은 입양에 관한 책 못지 않게 여러 정보를 전달해준다. 그만큼 작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기보다는 작가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읽는 아이들에게 입양아와 장애아의 문제를 왜곡하지 않고 전달해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장애아와 입양아, 그것도 셋이나 한 집에서 키우다 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니 그럴 때 어른이 나서서 해결되는 문제들도 있지만 아이들 역시 치고받는 다툼과 갈등의 시기 끝에 나름대로 해결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지만 힘든 시기를 겪어나가면서 평정을 찾는 과정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어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그 시기동안 성급하게 해결을 보고 앞당겨 안정을 만들어보려는 어른의 간섭이 잠시 기다려주는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아이에게 물어보니 이모가 사주신 책이라고 하는데 작가 이름도 생소하고 책 속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뻔한 내용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이런 책들이 왜 필요한지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준 책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도 좋지만 이렇게 논픽션 성격을 띤,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 하는 역할도 있었구나 새삼 깨우치게 했다.

(검색하다보니 이 책의 저자인 강민숙 작가의 남편과 딸도 동화작가라고 한다.)

 

2013년 한해 동안은 어린이책을 지금보다 더 많이 읽어볼 계획을 세워본다. 느낌이 좋던 나쁘던, 읽은 후엔 짧게라도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고, 어린이책 후기는 마이리뷰가 아닌 마이페이퍼 속의 전용 카테고리에 쓸 것인데 이것 역시 지금 하고 있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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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5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6 0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2-12-26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문학상은... 거의 판타지라야 평론을 좋게 받고 상도 타지 싶어요.
아직 한국 어린이문학은 좀 수준이 많이 낮아요...

그래도 이런저런 '상'하고는 동떨어진 자리에서 즐겁고 씩씩하게
한길 걷는 사람 많으니, 우리가 그런 분들 눈여겨보고 사랑하면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hnine 2012-12-26 10:41   좋아요 0 | URL
환타지에 대한 아이들의 열광이 대단하거든요. 지금 동화를 쓰는 작가 세대는 아무래도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는 세대이므로 우리 나라 작품 찾는 아이들이 적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문학성, 감정 표현의 섬세함 등은 우리 작품들의 강점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전문가 아닌,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물론 그가 어느 정도 나이대의 작가라는 것을 알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실제 나이보다 글에서 풍기는 연배가 더 들어보일 때도 있고, 반대로 실제 나이보다 글에서 풍기는 느낌은 훨씬 젊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 작가의 경우, 적어도 이 책에서 짐작되는 그의 나이는 딱 그 나이 정도였다. 글을 읽으며 작가의 나이에 그렇게 특별히 예민하게 추측해보는 편은 아닌데 지금 이렇게 운을 띄는 이유는, 아마도 처음의 기대보다 조금 못미치는 실망감을 둘러둘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 치고 김연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그의 소설을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이름은 귀에 익었을 작가.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작가의 글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아마도 작품보다 작가가 더 궁금했었나보다. 그래서 모르는 새 그만큼 기대도 높았기 때문일까? 에세이는 좀 더 있다가 냈으면 더 깊은 맛이 나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슥슥 넘어가는 페이지, 그다지 집중하지 않아도 읽어갈 수 있었다라는 것은 적어도 내 경우엔 오래 기억에 남을 책은 아니라는 얘기.

주제가 꼭 무겁고 독특한 것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용에서는 좀 더 자기 색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작가이니까 물론 문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군데군데 재치와 감성이 엿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인상에 남을 정도는 아니어서 아쉬웠다. 하루키의 에세이의 경우 보통 두부, 와인, 옆집 이웃 등,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소재의 글임에도 읽다보면 어느 새 그 만의 독특한 시각과 해석에 신선한 자극을 받으며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20, 30대, 흉내낼 수 없는 빛나는 감성이 반짝반짝 빛나는 글이 아니라면, 한 분야의 경륜이 무르익어, 그것이 세상을 보는 일관성있는 사고체계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깊은 맛이 나는 글이던지. 샐러드처럼 상큼하던지, 묵은지처럼 깊은 맛이 나던지. 통통 튀던지 진중하던지. 이 모든 구분을 무색하게 할 만큼 개성이 드러나든지.

덜 익은 김치를 맛보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래도 그 중 제일 공감이 되었던 부분이라면, 개인적인 안좋은 일들로 거의 1년이라는 시간동안 경험하고 있던 어둡고 긴 터널에서 뜻하지 않게 빠져나오는 계기가 된 것은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살과 건기의 바람을 만나는 순간이었다는 252쪽의 내용이었다. 몸이 열리는 순간 마음도 열리게 되더라는 그의 경험담이었다. 절망과 좌절, 두려움, 공포 대신 땀과 거친 숨결의 세계가 그를 구원했다는 말이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시선을 제일 오래 붙잡은 문장이 아닐까 한다. 오래 달리는 댓가로 숙면을 보장하는 단순한 삶.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할까? 나도 경험해보니 어느 정도는 맞더라고 고개 끄덕이면서.

40대 초반이라는 나이는 확실히 아직 젊은 나이인가보다. 그래서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이 충분히 많지만 그래서 또 그의 생각과 결론에 푹, 맘 놓고 빠져들기도 어려운.

애매한 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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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12-24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은 문장력과 재치로 쓸 수 없다고 느껴요.
제가 이분 글을 읽은 느낌으로는,
아직 '사랑'과 '삶'과 '꿈'을 '이야기'로 삭혀서
드러내거나 나누는 길하고는 좀 먼 자리에 있지 않나...
싶어요

hnine 2012-12-24 07:24   좋아요 0 | URL
아직 이분의 다른 책들을 읽지 않았기때문에 조심스럽게 쓴다고 썼습니다만...

하늘바람 2012-12-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참 좋은데~

님 어느새 한해가 또 가네요
늘 새해가 되면
님께 더 다가가야지 했는제 올해는 바쁘고아프단 핑계로 더더욱 자주 못 왔던 것같아요
늘 한결같이 계셔주셔서 마음 든든해요
새해엔 정말 더 많이 ~
건강하시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hnine 2012-12-24 15:13   좋아요 0 | URL
올해도 하늘바람님에게 잊지 못할 한 해가 되었지요? ^^
두 아이들 모두 씩씩하게 잘 키우시고, 그러다보면 작품에 대한 소재가 여기 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을까요? 구름빵의 백희나 작가도 작품의 소재를 얻은 때는 주로 출산후 바깥출입도 잘 못할 때였다고 하더라고요.
하늘바람님으로부터도 즐겁고 기쁜 소식 많이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2-12-24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 초반이라는 나이는,
언니의 표현대로 나이인거 같아요.... 정확한 문구가 와닿아요.

김연수님의 책을 한번 읽다가 포기했는데, 다른 분들의 평에 또다시 사선
아직 못 읽었어요... 지난번 읽을 때는 뭐랄까, 제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이제는 좀 나을까 기대합니다, 제가 변했으니까요.

나인언니, 즐거운 연말되세요.

hnine 2012-12-24 15:18   좋아요 0 | URL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저 또한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좀 싱겁게 읽혀졌나봐요. 요즘의 40대 초반이면 옛날의 30대. 아직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 깊은 맛이 우러나기보다는 팔팔한 기운이 넘쳐나는 나이라고 봐줘야 할 것 같네요.
그야말로 망중한. 잘 쉬셔야 잘 달리실 수 있겠지요? 저는 그냥 느림보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멈추지만 말고 가렵니다 ^^ 그러고보니 저 책에도 나오네요. 이기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계속 하는 한 지지는 않은 거라고요.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한번 들자 멈추기가 어려웠다. <체스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마음이 점점 알싸해진다고 해야하나, 인간의 어떤 행동, 결과가 발생하기까지 내면에서 작용했을 인간 심리의 또 한면을 보는 재미가 있었고,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마음 속 울음을 울어야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이름은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한번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해서 이 책을 골라들었는지 모른다. 순전히 직관이다 많은 경우 그렇듯이.

체스는 혼자서 둘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바둑이나 장기가 그렇듯이, 보통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두게 되어 있다. 이 작품에도 두 사람의 체스 플레이어가 나오는데 두 사람 모두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그 한 사람은 체스의 세계적인 거장 첸토비치. 그는 어려서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라는데 열 네살이 될때까지 글자를 읽는 것도 셈을 하는 것도 서툴기만 하고 성격도 괴팍한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체스에만은 놀랄 정도의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후로 그의 인생은 체스로 일관되면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된다. 거장이 된 그가 체스 경기를 위해 미국에서 아르헨티나로 가던 중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 작품에서 이름도 없이 B박사라고 나오는 이 사람은 25년 동안 한번도 체스를 두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체스의 거장 첸토비치와 다른 이의 체스경기를 지켜보던 중 놀라운 예견력으로 훈수를 두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작품의 묘미는 이 B박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체스를 두어본 적도 없이 체스 경기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페이지 많은 부분이 이 사람이 그 내력을 설명하는 것에 할애되어 있는, 일종의 액자소설 형식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그 당시 역사, 정치, 사회, 인간 내면 탐구에 대한 작가의 모든 사상이 결집되어 있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뒤의 해설을 읽어보니 첸토비치와 B박사가 상징하는 것은 내가 느낀 것 외에도, 파고 들면 들수록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1941년, 작가가 아내와 동반자살 하기 1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 한다.

<체스이야기>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뒤따라 나오는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작품은 약간 신파조의 제목때문에 앞 작품 만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정말 끝까지 읽을 때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편지가 어느 날 유명 소설가 R에게 전달된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없는 이 편지를 쓴 사람은 아마 아이가 죽지 않았더라면 자기도 죽을 결심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자신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오랜 세월 혼자 안고 살던 사실을 굳이 편지를 써서 남자에게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1분도 걸리지 않았을 시간, 우연한 순간에 앞집에 사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소녀는 그 이후로 그 남자만을 사랑하며 산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것 처럼 그 남자로부터도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마음 졸이고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 그런 적극적이고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치 동양적인 짝사랑마냥 혼자 마음 속에서 키워가는 사랑이다. 몇번의 시도도 하긴 하지만 남자에게 그 표현은 그 남자 주위의 많은 여자들이 해오던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고, 많은 다른 여자들에게 대하듯이 매혹적이고 애정이 담긴 매너로 여자를 대하며 하룻밤 사랑을 나눈다. 제발 자기를 알아주기를 고대하던 그녀는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숙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까지 오로지 그 소설가 생각만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아이까지 나아 키우며 수년이 흐르고,  다시 그 소설가를 만나게 되지만 그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처음에 그랬듯이 자기에게 접근해오는 어느 여자에게 하듯이 깍듯하고 매혹적으로 대한다. 오히려 소설가의 하인은 여자를 알아보는데 소설가는 끝까지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절망한 여자는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고 그에게 어떤 부담도 주지 않기를 고수하며 그의 분신인 아이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고 의지하며 살아 오는 그녀에게 아이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었다. 살아야할 이유를 잃었다.

어쩌면 이야기 줄거리 자체는 특별하지 않을지 모르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심리를 어찌나 잘 묘사했는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자의 심정에 푹 빠져들게 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어디 빙산의 일각에 비유할까. 빙산보다 더 크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인간도 모르는 인간의 심리는 극한 상황에 이르기 전까진 알 수가 없다. 절대적인 고립 상황 ('체스이야기') 혹은 절대적인 사랑 ('낯선 여인의 편지')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 소설가가 보여준다. 소설을 읽는 이유이고 재미라 할 수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랐다는 작가가 이렇게 인간의 내면 심리를 파고드는 이야기에 뛰어난 것은 아마 그때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그 역시 보통이 아닌 상황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쓰고 보니 '절대적인 사랑'도 인간의 극한 상황이라고 보는 것 맞나? 내가 쓰고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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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12-23 0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내 마음'을 읽을 줄 안다면,
이웃이나 동무가 어떤 마음일까 하고
슬기롭게 헤아릴 수 있어요.
 
여명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7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내 경우, 영화만 하더라도 프랑스 영화에는 쉽게 빠지기 어려웠다. 매우 원초적인 것을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하면 아주 심오한 내면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와는 다른 식으로 감성을 풀어내고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워낙 지배적이어서 다른 소감이 차지할 여지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거기다가 작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1873년에 태어나 1954년까지 살았던 프랑스의 여자작가로서, 세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동성애, 근친상간적인 사랑 등,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이 책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그런 순탄지 않은 경험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에서 더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를 통한 유년기로의 회귀는 근원에 대한 작가의 강박적인 추구를 나타낸다. 콜레트는 어머니와 하나로 용해되어 원초적 나르시시즘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유년기로의 역행을 추구한다. 동트기 전의 새벽시간은 근원을 탐구했던 콜레트에게 있어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새벽은 자신의 원형이자 모델인 어머니가 부여한 선물이다. (194쪽, 작품해설 중에서 인용)

 

'여명'은 새롭게 생명력이 움트는 시간,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는, 사실은 밝은 태양보다 더 힘이 꿈틀거리는 시간이다. 자신의 모델이기도 했던 어머니, 자신의 근원지인 어머니. 이 두가지가 나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다. 평범하지 않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돌아와 작가의 머리속을 채운 생각은 결국 자기 근원에 대한 것이었다.

 

새벽 동이 터오고, 바람은 잦아들었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어둠 속에서도 새로운 향기가 느껴진다. 아니면 내게만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일까? 나만 이 세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가능하다. (중략) 새벽이 온다. 그 어떤 악마도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을, 새벽의 창백함을, 새벽 푸른빛의 미끄러짐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174쪽)

 

나 자신, 새벽이 아니었다면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어디서 얻었을까 싶을 때가 있다. 비록 몇 시간 후면 그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릴지언정, 하지만 그 뒤에 또 하나의 새벽이 오고 있다는 것은 위안이고 희망이다.

 

연하의 남자 비알은 콜레뜨를 좋아하지만 비알을 좋아하는 엘렌의 마음을 알고 있는 콜레뜨는 비알의 연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꼭 중간의 엘렌때문은 아니다. 비알의 고백과 그의 존재가 콜레뜨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최소한 콜레뜨로부터는 그 어떤 욕망도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콜레뜨는, 어쩌면 실제 작가 자신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남자의 나이가 두려워서,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누를 타입은 아니다. 두번의 이혼으로 이제 시선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이제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시작하고 싶어. 알겠어, 비알? 열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사랑이란 것과 무관하게 죽고 싶어. 그건 참 멋진 일이야...... 당신은 잘 몰라. 당신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 이해해주겠지?

 

 이제 삼십 년 동안 지겹도록 나를 괴롭혔던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그렇게 살려고 해. 근사한 일이지. 너무 근사해." (136쪽)

 

밤에 시작한 콜레뜨와 비알의 대화가 끝날 즈음, 밤은 끝나고 새벽이 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이다.

번역서이기 때문에 그 느낌이 감소되어 전달되었음이 분명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표현들이 문장 여기 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특히 새벽에 대한 묘사는 색채와 시각, 촉각, 청각 등 감각을 넘나들며 아름답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 예이다. 새벽을 방황하는 친구로 표현하면서 자기가 그 과정에 참여하자 숲이 되고 물보라가 되고 별똥별이 되고 오아시스가 된다는, 그런 표현을 누구나 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역시 새벽에 집착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새로이 태어나는 쾌락을 누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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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2-12-1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각을 넘나드는 표현.....hnine님 같은 책이겠네요^^^

hnine 2012-12-19 11:53   좋아요 0 | URL
감각을 넘나드는 표현이라고 하니 미사여구가 돋보이는 그런 책 같이 들리기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뭐라 해야하나, 소설은 아니지만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잠깐 나갔다 왔는데 날씨가 꽤 쌀쌀하네요. 이제 저는 투표하러 가러고요. 일찌감치 다녀오셨다지요? ^^

oren 2012-12-1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이력이나 소설 속 이야기들도 흥미롭고, 열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죽고 싶다는 얘기도 참 인상적이네요. '쾌락의 쑤석거림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년'을 노쇠기에 접어든 소포클레스가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기뻐했고, 키케로가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즐거움을 이야기한 대목도 떠오릅니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다'던 쇼펜하우어의 글도 떠오르고요.
* * *
사람들은 흔히 청년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여기고 노년기는 비애의 시기로 생각한다. 만일 행복을 격동과 감동으로만 본다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청년기에는 바로 그 격동과 감동 때문에 기쁨보다 고통에 더 많이 시달린다.

그러나 노년기에는 그러한 격렬한 감동이 가라앉고, 청년기에 그토록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일들도 명상적인 색채를 띠며 다가온다. 노년기에는 인식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인식 그 자체에는 고통이 없다. 물론 감동이나 감격 그 자체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노년기가 되어 향락을 누릴 기회가 거의 없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향락이나 고통은 같은 성질의 형태로, 향락은 소극적이고 고통은 적극적이라는 차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하면 소극적인 향락에 대해 집착할 이유가 없게 된다.

모든 향락은 욕망을 달래는 데 지나지 않아 욕망이 소멸하면 향락도 사라진다. 마치 식사 뒤에 식욕이 없어지거나,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졸음이 오지 않는 이치와 같아 향락의 기회가 없다고 탄식할 이유는 없다.
- 쇼펜하우어

hnine 2012-12-19 20:27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도 했군요 ^^ 이론적으로는 정말 그래야하는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생각하면 역시 좀 의기소침해지는건 사실이예요. 노년에 이르러서도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모습은 정말 피하고 싶은데 이 대목에선 또 정열과 욕망의 기준이 헛갈리기도 합니다.
위의 소설은 작가의 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요. 이력이 좀 평범하지 않은 작가이지요.

프레이야 2012-12-1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제가 그어둔 밑줄과 같아서 더 반가워요. ^^

hnine 2012-12-19 20:29   좋아요 0 | URL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지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이 세상엔 그런 소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어요.
삼십년동안 사랑으로 괴롭힘당하지 않은 사람의 노년은 다른 결론일까요?
 

 

다음 날 아침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또다시 병을 이겨냈다는 기쁨에,

할 일이 또하나 생겼다는 사실에,

흐르는 물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모습에,

재난과의 싸움에서 잠시 휴식할 수 있다는 생각에... (44쪽)

 

이럴 때 당신은 얼마나 부자처럼 느꼈던가요, 라는 물음이 나온다.

우리는 어떤 때 부자처럼 느끼는가?

부자가 되는 느낌이라기보다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때와 비슷한 것 같아 내 경우를 적어본다.

-아침에 눈을 뜸과 동시에, 어제의 모든 실수, 모자람, 사건들을 딛고 또 새로운 하루가, 새로운 기회가 내게 주어졌구나 라는 생각에 느닷없이 누구에겐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희망이 없다, 변할게 없다, 점점 나빠진다 등등, 부정적인 생각에 묻혀 힘들게 힘들게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거기서 박차고 나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행복하다. 눈물나게.

-나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데 서툰 나는 누가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주어질 때, 그때서야 나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녀는 모았다. 재난도 상처도 다 찾아내어 차곡차곡 쌓았다. 상처란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참 후에야 얻게 되는 흔적이다. "아! 그는 내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나!" 라고 말할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준다'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받은 것들을 조금씩 조화롭게 정리하며 언제 받았는지, 얼마나 받았는지 헤아려본다. 받은 보물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녀는 뒷걸음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처럼. 그녀는 뒷걸음친 후 다시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다시 뒷걸음치면서 터무니없고 수치스런 이야기들은 자신이 있던 먼저의 자리로 밀어내고, 어둠에 묻힌 추억들은 밝은 곳으로 끄집어낸다.  (45쪽)

 

모을 수 있구나. 재난도 상처도.

모아서 이렇게 조화롭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뒷걸음치기, 밀어내기, 끄집어내기의 표현이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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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17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이 소설, 블랑카님의 리뷰로 마음에 들어서,
읽고는 가슴에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리뷰를 보니 다시 반가워요.
요즘 왜 이리 풀어내지 못하는 말들이 많은가 몰라요.^^ 제가요.

hnine 2012-12-17 20:59   좋아요 0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을 선뜻 읽을 생각을 한건 순전히 알라딘 서재에 들락달락 거린 덕이지요.
아직 반 정도 밖에 못 읽었어요. 표지 디자인이 무거워서 그런지 부피도 꽤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두꺼운 책은 아니더군요.
풀어내지 못하는 말들...저도 그래요. 그러다가 제가 풀어내지 못하고 있던 말을 누군가가 아주 정확하게 짚어낸것을 글이나 말에서 발견할 때의 시원함과 동시에 살짝 열등감이란...

blanca 2012-12-1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너무 좋았어요. 나인님의 페이퍼로 다시 그 아름다운 대목들을 되새기게 되네요

hnine 2012-12-17 21:01   좋아요 0 | URL
아직 다 못읽었지만 지금까지의 느낌은 이 책은 스토리를 따라 읽는데서 재미를 찾기보다 이렇게 숨어 있는 표현들, 묘사의 뛰어남, 이런 것을 찾는 것에서 더 즐거움을 느끼는 류의 책 같아요. 얼른 읽어야지요~ ^^

스파피필름 2012-12-17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 hnine님, 연말이 다가옵니다. 늘 그러한 연말이지만, 한해 잘 마무리 지으시고 또 밝은 새해를 맞기를... 빌어봅니다.

hnine 2012-12-17 21:05   좋아요 0 | URL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것이 있지요? 우리 나라에서 많이 알려져있지 않은 작가라는데 저도 처음 접하는 작가랍니다. 그래서 비교적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읽을 수 있네요.
한 해 마무리라...저 오늘 서울 다녀오는 고속버스 속에서 생각했답니다. 마무리는 생을 마칠 때쯤 딱 한번만 해야겠다 매년 하기 귀찮아서요 ^^ 스파피필름님 말씀은 무슨 뜻인지 압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잊지않고 이렇게 들러주시니 더 마음이 따땃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