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알라딘에만 해도 책 읽기에 고수이신 분들이 많고 그분 들 앞에선 감히 내세우기도 망설여지지만 나도 1,200편의 리뷰 만큼의 시간을 책과 함께 보내온 입장이다보니, 올해 초 이 책을 쓴 저자분의 소개글이나 영상을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궁금증이 생기는건 당연했다. 나처럼 평범한 분일까, 아니면 범상치 않은 분이실까. 책 아니면 안되는 일생 일대 고비가 있으셨던 것일까, 과연 그렇다면 그 고비를 넘는데 책이 어떻게 어느 만큼 도움이 되었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말이다.

원래 읽으려던 책은 출판사는 다르지만 이 책과 거의 동시에 나온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였다.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읽기 쓰기의 감각'이라는 소개글이 따라붙은, 다소 어려운 제목의 책이었는데 도서관에서 알아보니 마침 대출중이기도 했고, 본격적인 책 얘기는 아니지만 개인사를 다룬 <미오기전>을 읽어도 그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겠다 싶어 <미오기전>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이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 책으로까지 나오게 된 이력을 갖고 있는 만큼 글은 재미있다. 고상하고 어려운 단어 없다. 그냥 죽죽 읽어내려가면 된다. 미오기傳이라고 해서 시대 순으로 자세한 개인의 역사만 쓴 것도 아니고 일상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유머스럽게 엮었다고 보면 된다. SNS에 올리기에 딱 좋은 형식과 내용이랄까.

저자 본인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 얘기까지, 어쩌면 글을 잘 쓰는 능력보다 얘기를 재미있게 잘 하는 능력이 더 돋보일 정도라고 할까.

나보다 약간 연배가 위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배고픔을 기억하는 어린 시절에 남존여비의 강력한 영향 속에 배우고 성장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놀라웠다. 드라마 아들과 딸을 연상시키는 가정환경에서 그나마 책 읽기를 좋아했음은 구원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커서 칙칙하고 어둡고 무거운 성격의 어른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반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나의 기질은 명랑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저자, 글이 그런 기질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었다.

개인사를 글로 쓸때 자칫 잘못하면 한풀이, 넋두리가 되기 쉽다는데, 저자는 유머 코드를 최대한으로 살려 쓴 덕분인지, 그렇지는 않았다. 동시에, 진지하고 깊은 통찰이 들어가있는 그런 글도 아니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처음 집을 때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명랑 에피소드가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책 읽는게 뭐 특별한 일입니까? 책 읽는다고 어디 들어앉아 있지 않았어요. 책은 그저 생활 속에 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 책과 거의 쌍둥이처럼 출판된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도 읽게 될지 모르겠지만 많이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알라딘 리뷰로 만나는 대단하신 독서가 몇몇분들이 떠오른다. 이분들이 책을 내신다면 못지 않을텐데.

책을 낼 시간에 차라리 책을 몇권 더 읽겠다고 하실까? 

혼자 생각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8-0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그렇게 되셨군요. 저는 아직 안됐을 것 같기도 합니다. 워낙 리뷰를 드문드문 올리는지라. 뭐든 꾸준히 루틴이 만들어낸 자산이 아닐까 합니다. 수고 많으셨구요, 앞으로도 새로운 1200 편을 응원합니다.
전 이책 중국의 마오하고 헷갈립니다. ㅋ

hnine 2024-08-04 18:21   좋아요 1 | URL
좋든 싫든 일단 읽은 책은 리뷰를 올리고 나야 다 읽은 것 같은 습관때문에 읽은 책 수 만큼의 리뷰가 되었네요. 앞으로 새로운 1200편...ㅋㅋ...
중국의 마오라 하면 마오 쩌뚱을 말씀하시나요? 제가 이렇게 무지하다니까요.

카스피 2024-08-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00편의 리뷰라니 대단ㅎ시네요^^

hnine 2024-08-04 18:23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1200편이면 대단한 축에도 못끼지요.
1200편이라는 숫자보다는, 그만한 세월을 여기서 보냈다는게 저는 더 감회가 깊어요. 정이 들었어요.

nama 2024-08-05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었는데요, 이 책 <미오기전>도 읽을까 하다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왠지 비슷한 내용일 것 같기도 하고, <감으로...> 이 책도 용두사미격으로 읽었거든요. 뒤로 갈수록 집중이 안되더라구요.

hnine 2024-08-06 12:15   좋아요 0 | URL
어릴때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낙천적이고 유머로 풀어내는 성격이 아니면 버텨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은 재미있게 쓰셨지만 실제 성격은 글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고 단단하신 분이 아닐까 하는. 책 얘기든, 자기가 살아온 얘기든, 제가 처음 기대했던대로 진지 모드로 적어내려갔다면 SNS 상에서 유명해지지도 사람들 사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는 이 창래 작가의 소설 맞나?'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과 분위기도, 문체도 달랐다. 

내가 처음 읽은 이 창래의 책은 1999년에 발표한 <A gesture life>였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은 1995년 발표한 <Native speaker>인데 미국의 한국인 2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나중에 일부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략 이 즈음부터 이 작가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기다리던 끝에 나온 <The surrendered> 는 두툼한 부피의 책을 나오자 마자 구입해서는, 결코 쉽지 않은 내용때문에 오래 걸려 읽고도 (번역본이 나오기 전) 완전 팬이 되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6.25전쟁 피난 열차로 시작하는 첫 장면과 죽음을 앞에 둔 여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는 쓸쓸한 끝장면만은 눈으로 본듯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타국에서의 일년> 이 나오기 바로 전작인 <만조의 바다 위에서>에서 작가는 큰 변화를 시도한 듯, 중국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2014년이니 <타국에서의 일년> 이 나오기 10년 전이다. 확실히 다작의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작품을 낼때마다 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재의 변화뿐 아니라  글 쓰는 스타일도 전작과 많이 다름을 느꼈다. 문체의 유려함, 다양한 등장 인물, 풍부한 비유법 등은 어딘가 더 차원이 높아지는 듯. 

그는 내가 그의 준비된 위성이 되기 위해 던바와 대학 생활을 쉽게 버리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471쪽)

(여기서 '던바'는 가상의 지명)

주인공인 틸러에게 인생 일대의 큰 사건의 계기를 제공하는 중국인 혈통의 퐁 로우가 틸러를 처음 본 순간부터 틸러의 앞날을 알아보는 순간을 말하는 문장이다. 준비된 위성이라는 표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성이 된다는 표현. 

이민의 역사를 가진 등장 인물이 소재가 되고 주제에도 관련이 있음은 이번에도 전작들과 같았다. 주인공 틸러는 1/8이 한국인이라 외모로는 거의 백인에 가깝다. 틸러를 자기의 새로운 사업에 끌어들이는 퐁 로우는 중국인 혈통의 거물 사업가. 틸러가 타국에서 일년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와 임시적 가족 처럼 지내게 되는 밸이라는 여자도 중국인 혈통이다. 

틸러는 대학도 아직 졸업하기 전의 젊은이로 세상을 헤쳐나갈 길이 창창한 나이이지만 개방적인듯 하면서 내성적인 면이 있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깊은 면이 있다. 말이나 행동이 아직 어른 보다는 청소년 스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세상 어떤 한 자락을 붙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도 있다.

태평해보이는 바깥의 껍질을 뚫고 실제의 인간적 다양성으로 들어가 보면 불안과 우쭐함, 세속적인 모습과 경건한 모습, 엉망진창인 모습과 꼼꼼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크고 작은 문제에 관해 때로는 단단하고 때로는 무른 편협함이 두드러졌다. (502쪽)

세상의 허무를 느껴오던 틸러의 엄마는 틸러가 어릴 때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어린 틸러와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간다. 그후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하며 혼자 남은 아들 틸러를 아주 조심스럽게 키운 것 같다. 심하게 억압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지만 대신 소통이 잘 되는 부자 사이는 아니었다. 이러한 틈은 자유와 함께 방황을 낳기도 하는 법. 경제적으로 궁핍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틸러에게 간섭은 없지만 방황을 가져다준다.

틸러는 접시닦이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중국인 사업가 퐁 로우를 만나게 되는데 퐁 로우는 대번에 틸러를 알아본다. 위에 인용한 것 처럼 틸러가 자신의 위성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여기에 쉽게 동조하고 그를 따라가는 틸러는 (이런 것 보면 아직 무모함이 가시지 않은 젊은이다운 면모) 퐁 로우가 시작하는 새로운 건강 음료 사업에 일조를 해줄 것을 권유받고, 그것이 살고 있던 미국을 떠나 멀리 중국, 마카오 땅을 밟게 되는 시작이 된다. 아버지에게는 학교에서 연수를 간다고 둘러치고 떠나서 보낸 일년은 떠날 땐 전혀 예상치 못한 경험과 흔적, 인생 변곡점을 안겨주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 '타국에서의 일년'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옥 경험을 하고서 미국의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음식 값이 없어 곤경에 빠져있는 여자 밸과 그의 아들 빅터를 만나게 되는데, 뚜렷한 행선지가 불분명하다는 공통점때문에 그냥 스쳐가는 인연을 넘어 한 곳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살게 되는 것은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전사한 남편의 이전 행적때문에 추적을 당하며 사는 밸과 밸이 어린 아들과 틸러는 그렇게 아무 관계도 아니면서 또 특별한 관계를 이루며 한 집에 거주한다. 밸과 틸러는 서로 연인 역할이 되기도 했다가 보호자 역할이 되주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과거를 캐묻지 않으면서 가족처럼 위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루어 가는 것은, 안정된 생활을 꿈꾸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조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뿌리 내리고 싶어하지만 이들은 늘 불안하다. 오랫 동안의 정신적 불안에 길들여진 이들은 때로 극단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지 서로 살펴야 한다. 애착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의 정체도 모호한 채로, 자기를 보호하는지 상대를 보호하는지도 모호한 채로 말이다.

아직도 세상은 위험한 곳. 밸의 자살 시도를 겨우 막아내고, 틸은 밸을 계속 예의 주시하지만 이제 그것은 긴장감이라기 보다 초탈한 모습이다. 그렇게 틸러가 사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려 노력 중이다.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까지 의식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편히 눈을 감고 있으려고 한다. 삶이 혓바닥에 화끈한 박하를 올리도록 놔두듯이, 아니, 어떤 식으로든 행운이 따른다면 가장 아삭아삭하고 즙이 많은 주사위 크기의 수박 조각을 올릴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을 태워 버리려고 집 뒤의 테라스로 숨어드는 대신, 호미를 쥐고 돌투성이 땅에서 우리가 고른 텃밭에 거칠게 덤벼든다. 밸과 비즈에게 다양한 가을 채소를 심으라고 시킨 밭고랑의 잡초를 제거한다.

나는 그저 두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하게 되는 생각이 밤사이 얼마나 많은 싹이 텄는지에 관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685-687쪽)

(번역자를 거치긴 했지만 문장의 스타일과 표현이 색다르지 않은지. 나만의 느낌인지.)


마지막으로 번역가가 작품 뒤에 남긴 말에서, 원문을 읽는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평이한 문장보다는 이전 문장에 만족하기 전에는 절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밀도 높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창래 작가의 작품의 특징을 말하면서 그런 곳에서 특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털어놓고 있다. 평균적으로 한 문장에 70단어 이상을 담고 있다고.


다음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작년에 나왔으니 앞으로 몇년은 더 기다려야 할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처님 말씀 중에, 생각을 할바엔 잠을 자라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최대로 간결하게 표현된 문장일텐데, 생각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1828년생 러시아 태생 톨스토이는 20대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36세에 <전쟁과 평화>, 45세에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하는 등, 작가로서의 명성과 존경을 확보한 작가이며 학자였다. 50대에 이르러 그는 이런 작가로서 명성과 지위, 학문의 성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삶의 수수께끼 같은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다른 문제들과 달리 삶 자체에 대한 이런 의문은  추상 학문, 실험 학문, 어떤 분야의 학문을 파고들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상태로 하루 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학문이, 지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학문이 보여주는 밝은 면에 이끌려서 그 쪽으로 가면 갈수록, 내가 제기한 삶의 의무에 대한 대답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문이 내 앞에 펄쳐 보여준 드넓은 지평이 아무리 밝고 매력적인 것이었고, 학문의 온갖 무한한 지식 속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력했을지라도 그 지식이 명료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은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는 더욱더 동떨어져 있는 것이어서, 내게는 점점 더 불필요한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48쪽)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진리 탐구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들 어차피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식에 담쌓고 농사 지어 양식만 해결하며 평생을 사는 농부의 삶이나, 학문에 매진하고 좋은 글을 쓰고 중요한 발견을 하여 명성과 존경을 받으며 사는 삶이나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에 목표와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톨스토이 이전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왔고,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지금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한 자락에 이르러 한번씩 빠져드는 문제이다. 그럼 이 문제는 쓸모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여기고 생각 멈춤해버릴 수 있기에는 여전히 물러나지 않는 물음이다. 톨스토이의 집요함과 의지는 인생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당장 죽어도 아무것도 달라질게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죽지 않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톨스토이는 네 가지 방법을 들었다.

첫째는 무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톨스토이 자신은 이미 인식해버렸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두번째 방법은 쾌락주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누리고 사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오늘이 아니면 내일 또는 언젠가 찾아와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파괴해버릴 병과 늙음과 죽음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세번째 방법은 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으로,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위적으로 삶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삶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에 희롱당하고 농락당하는 상황을 거부한다는 것으로서 톨스토이도 한때 취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네번째 방법은 '약함'에서 비롯된다. 삶은 악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 매달리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실행에 옮겨 삶을 스스로 끝낼 결단력과 강단이 부족하여 그래도 삶에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시간 끌기식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문제 자체에 대한 얘기가 계속되다가 처음으로 그가 반짝 하고 떠오르는 것을 써놓은 것이 책의 중간 쯤에 나온다.


나, 그러니까 내 이성은 삶이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성보다 더 지고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이 가장 지고한 것이라면 이성은 나의 삶을 만들어 낸 창조주일 것이다. 이성이 없으면 나의 삶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삶의 창조자인 이성이 어떻게 삶을 부정할 수있겠는가? 또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만일 나의 삶이 없다면 내 이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이성이 삶의 아들이다. 삶의 모든 것이고 이성은 그 열매다. 그런데도 이성이 삶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63쪽)


즉 삶이 부조리라는 것을 이성에 의해 추론해냈고 이성이 가장 최고의 지성이어서 모든 추론의 바탕이 된다면 이 이성은 어디서 왔는가. 이성이 작동하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성은 삶의 아들, 이성은 삶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이성이 삶을 부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성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읽을 때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철학적인 문제에서 종교의 문제로 넘어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기 때문이다. 그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단숨에 무마하려고 설마? 그의 고백록이 결국 내 맘 속에서 또 한권의 종교서로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는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습니다.  (70쪽)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쪽)


그는 이후로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지 못한채 하루 하루 그냥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그 문제가 이성 너머의 세계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무조건적이고 반이성적인 세계로 치부했던 신앙에 대해 마음을 열고 스스로 그쪽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내가 염려했던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은 아니었다. 신앙에 귀의하기로 하면서도 그는 종교 (톨스토이의 경우 '러시아 정교회')의 어떤 의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어 괴로와하기도 한다. 

그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종교를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지, 어떻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선택했는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보고 그들을 관찰한다. 

그 결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와 같은 계층, 즉 더 똑똑하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의 의미를 평온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삶에 접목시키기 보다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발견한다. 오히려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이나 지식계층과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에게 질병이나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운명이고 그들의 힘으로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모두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그 어떤 의심이나 반항도 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우리의 모든 활동들, 우리의 토론들, 우리의 학문, 우리의 예술이 내게 새롭게 비쳐갔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고 그런 것들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땀 흘려 일해서 삶을 생산해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참되게 살아가는 길로 보였습니다. 그런 삶에 대해 부여한 미가 참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86쪽)


톨스토이가 고백록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이후 그의 삶은 달라진다. 어떻게 종교 속에서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가 끊임없이 탐색하여 이런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발표할 뿐 아니라, 신앙에 관한 그의 견해를 체계화하여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개혁자로서의 삶도 마다하지 않게 하여, 교회의 부도덕성과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의 형태를 취하여 교회에서 출교 당하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에 대해 했던 고민들은 그만의 고민이 아니었고, 그가 도달한 결론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위에 톨스토이가 언급한 네가지 중 한 방식을 취하며 사람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느냐 보다 의미있는 것은, 그런 문제를 피하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고자 끝도 안보이는 길을 걸어가며 생긴 발자욱들이 남기는 족적이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일 것이고 나 역시 답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답에 가까운 것이라도 찾으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배움의 자리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이 어떤 결론이라도 얻을지, 헤매기만 하다 생을 마칠지 누구도 모르지만, 내가 현재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찾아가는 시간과 노력이 곧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서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렇게 걸어가는 길 자체도 소중하다고.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간도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4-07-2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올까 모르겠어요.
요즘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TV로 연결되어 있어 유튜브를 시청하는데 전문가들의 강의가 많아 발품을 팔 필요가 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배울수록 오히려 제가 아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울 게 너무 많아요. 인터넷도 그렇고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대를 사는 것이 때로는 행운처럼 여겨집니다.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글 한 줄도 못 썼을 듯합니다.^^

hnine 2024-07-25 04:42   좋아요 1 | URL
분량이 그리 길지 않아서 오디오북으로도 가능할 것 같아요. 50대쯤 되면 자잘한 고민이나 걱정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젊을 때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놓고 답을 못찾아 더 헤매이게 되고, 남은 날에 대한 방향을 못잡겠고, 그러던 중 이 책을 만났어요. 저는 특별한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이 외부로부터 일방적인 이끌림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고뇌하고 탐구 끝에 얻어낸 결론이라는게 더 의미가 있고 그런 시간들이 곧 톨스토이의 인생 한 부분을 이루었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 책도 밑줄 많이 그으며 읽은 책이랍니다.
 
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지수라는 이름은 소설을 위한 필명. 그는 이미 조중걸이라는 본명으로 여러 권의 인문학 서적을 낸 인문학자이다. 예술학, 논리학, 철학 등을 공부하여 이 분야의 인문학서를 주로 발표해온 경력을 알고나니, 그가 쓴 장편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의 소설일까 궁금했다. 

저자에 대해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등장 인물 모두가 작가의 아바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인생 경로나 성격이 자꾸 작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만 화자로 나오는 경찰관이 40대 여성의 실종사건을 맡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이외의 모든 분량은 실종 여자가 남긴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경찰관은 원래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경찰직으로 방향전환을 했다고 나온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공부하다 만 철학에 미련을 갖고 있는, 어딜 보나 경찰관 같지 않은 경찰관이다.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철학으로 이끌린다. (15쪽)

사건 속 실종자는 40대 여자 교수. 남편 그리고 막 수능을 치른 아들도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 말한 경찰관이 수사를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방을 수색하던 중 금고 속에 보관된 열 한권의 노트와 PC에 저장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자그마치 20년 동안의 기록인데다가 범상치 않은 문체, 철학과 미학에 관한 방대한 내용, 계속되는 한 남자와의 대화체 서술, 그 남자의 사진 등 흥미로운 내용에 빠져들어 심상치 않은 기록들임을 알게 된다. 며칠에 걸쳐 끝까지 다 읽는 경찰관이 그 내용을 추려 소개한 것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책의 마지막 대여섯 쪽 경찰관의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실종된 여자가 남긴 20년 동안의 이 기록이 곧 이 소설 전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자의 기록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인문대생이었지만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때문에 교양으로 미대에서 '현대예술, 감상과 이해' 라는 과목을 신청해서 듣기로 하는데 첫 수업에서 만난 담당 교수는 처음 보았을때 교수로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마치 학생 같은 외모의 젊은 교수였다. 외양보다 더 독특했던 것은 그의 강의 내용과 강의 방식이었다. 예술에 대한 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철학을 얘기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왜 철학이 필요한가,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 예술과 철학과 논리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 세계에 몰입하게 된 여자는 교수와 단독으로 스터디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까와지며 더욱 더 예술과 철학에, 또 그 교수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몰입되고 그의 세계로 들어간다.


선과 악은 지식에 의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이해 불가능한  것은 결국 악이 되는 것. (54쪽)


현대철학의 심미적 반영이 현대예술이야. 모든 시대의 예술이 당시의 이념 위에 기초하듯이 현대예술도 현대의 세계관 위에 기초하지.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몬드리안, 리히텐슈타인, 워홀 등의 미술가가 현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예술가들이야.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심미적 표현이 이들의 예술이야. (93쪽)


그런가?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등의 예술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이것은 작가의 생각인지, 아니면 인용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수가 없지만 철학과 예술이 별개의 분야가 아니라 이렇게 연관지어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 여자는 (이 책에서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A 라고만 표시된다) 교수를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교수가 꼭 학자는 아니라서 교수라고 불리는게 불만이라는, 교수의 요구에 의해서이다. 


두꺼운 철학책은 이를테면 원근법과 입체처럼 구시대의 유물이야. 육백 쪽의 순수이성비판이 팔십 쪽의 논리철학논고로 바뀌었을 때 현대가 온 거야. 현대 회화는 그 두꺼움을 제거하며 시작돼. 쿠르베는 진정한 천재야. 들라크루아의 두꺼움은 그에게서 사라져. 이제 표층의 시대가 온 거야. 새로운 길은 평면에의 길이야. 새로운 비아 모데르나는 원근법을 저버리며 시작돼. 마사치오는 폐위되고 이제 세잔이 왕이야. (184쪽)


역시 예술과 철학의 연관성이다. 이제 예술과 철학은 더이상 다른 세계가 아니다. 


신념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신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다. 신념은 유행일 뿐이야. 오늘까지 모순되는 많은 신념이 있었어. 오늘의 신념도 곧 부끄러움이 될 거야. 이것은 신념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야. 신념은 가져야 해. 그러나 그 신념은 자기 인식적이어야 해. 

지금 나는 그 신념에 물들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오늘 그것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위는 아니다. 단지 우리는 어디론가 움직여야 하고 그것은 지금 판단의 어느 방향을 지시해줄 뿐이다. 그러나 그 별들이 언제고 태양은 아니다. (201쪽)


교수의 말을 A는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나름대로 정리해가면서 받아들인다. 이렇게 영특하게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여자 A를 교수도 각별히 생각하며 이 둘의 관계가 발전해나간다.


밑줄을 그으며 읽다보면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지 예술 철학서적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여러번.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무어나 된 듯이 생각하는 인품은 삶을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만들고 스스로를 오만 속에서 몰락해 가게 만듭니다.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인가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올바른 요소를 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올바름을 향해 분투하고 있는 그 순간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듯이 노력하고 있는 그 순간만이 유의미할 뿐입니다. (238쪽)


이렇게 읽자마자 공감이 되는 부분에 밑줄을 그을 때는 더욱 그렇다.


사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뛰어난 서사가 이 소설의 장점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과 같은 전공을 한 교수를 주요 인물로 삼아 그동안 인문서를 집필하면서 제한을 받았던 그의 생각과 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또한번 지식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실패한 선택이란 없어. 선택을 뒷받침하지 못한 실패한 의지만 있을 뿐이야. (263쪽)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의지의 실패라면, 그게 더 참담하지 않을까. 그건 환경과 조건 탓을 배제한 오로지 나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교수와 여자 A ㅡ이 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의 어떤 선택이 의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인지, 이 소설의 제목 앞 괄호 속 문구 까지 더하면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 마지막 외출 이다. 모호하다.


작가에겐 한권의 소설이 더 있다. 이 소설보다 15년이나 먼저 나온 <나스타샤>라는 장편소설이다. 그 작품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이설의 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를 읽었고,


작가 후기에 소개된 이 노래 Nel Blu Dipinto di Blu를 알게 되었다. (원래 알고 있던 노래이긴 하지만)



https://youtu.be/XSFIVyyrgl4?si=qm_XtcArM5ays2ib



 


여러 버전으로 불려진 이 노래를 듣다가 최근에 이 노래가 삽입된 미국 드라마를 알게 되어 보기 시작했다.




From Scratch (TV series) - Wikipedia

 

From Scratch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조지타운 로스쿨에 재학중이던 에이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펼쳐보고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술 학교에 등록한다. 택사스에서 나름 잘 사는 집의 딸이지만 보수적인 변호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느라 재정적인 도움 전혀 없이 타국에서 혼자 힘으로 다 해결해야 하는데, 역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셰프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이탈리아 시칠리에서 피렌체로 온 남자 리노를 만난다. 

여덟개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는데 에피소드 1에서 노래 Nel Blu Dipinto di Blu 가 나온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물론이고, 후반으로 가면 남주인공 리노의 고향인 시칠리 마을이 많이 나온다. 영어를 못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이탈리아어도 막 나오고, 막연하지만 언젠가 가보리라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 이후로 혼자 이탈리아어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는 나에겐 살짝 살짝 아는 단어가 들릴때마다 느끼는 작은 즐거움까지 더해져서,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에피소드 8까지 다 보았다.

둘의 결혼식때 에이미의 엄마가 결혼 생활을 Shoes에 비유하여 한 결혼식 축사는 정말 공감.

결혼 생활이란 한 신발을 신고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여정. 계속 걷다 보면 신발 속에 돌도 들어갈 것이고 그 돌이 자잘할때도 있지만 꽤 커서 걷기 힘들 정도일 때도 있을 것이다. 발이 아파 계속 걷기 어려워질 때 그 돌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냥 걸을려고 하면 결국 발도 상하고 걷는 것도 계속 못하게 될것이다, 신발을 풀러 돌을 제거하고 걷는 것이 옳다...그런 요지.


'깊은 사랑을 받게 되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이 말도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7-11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드라마 저도 봐야겠어요. 다행히 구독중인 넷플에서 가능하군요!!

hnine 2024-07-11 10:55   좋아요 1 | URL
저도 넷플에서 봤어요.
이 드라마에 대한 것을 어디서 본것 같은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게 봤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 소설이 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