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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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 중에, 생각을 할바엔 잠을 자라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최대로 간결하게 표현된 문장일텐데, 생각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1828년생 러시아 태생 톨스토이는 20대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36세에 <전쟁과 평화>, 45세에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하는 등, 작가로서의 명성과 존경을 확보한 작가이며 학자였다. 50대에 이르러 그는 이런 작가로서 명성과 지위, 학문의 성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삶의 수수께끼 같은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다른 문제들과 달리 삶 자체에 대한 이런 의문은  추상 학문, 실험 학문, 어떤 분야의 학문을 파고들어도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상태로 하루 하루 살아나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학문이, 지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학문이 보여주는 밝은 면에 이끌려서 그 쪽으로 가면 갈수록, 내가 제기한 삶의 의무에 대한 대답으로부터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문이 내 앞에 펄쳐 보여준 드넓은 지평이 아무리 밝고 매력적인 것이었고, 학문의 온갖 무한한 지식 속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력했을지라도 그 지식이 명료하면 할수록, 그런 지식은 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는 더욱더 동떨어져 있는 것이어서, 내게는 점점 더 불필요한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48쪽)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진리 탐구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들 어차피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식에 담쌓고 농사 지어 양식만 해결하며 평생을 사는 농부의 삶이나, 학문에 매진하고 좋은 글을 쓰고 중요한 발견을 하여 명성과 존경을 받으며 사는 삶이나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에 목표와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톨스토이 이전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왔고,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지금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한 자락에 이르러 한번씩 빠져드는 문제이다. 그럼 이 문제는 쓸모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여기고 생각 멈춤해버릴 수 있기에는 여전히 물러나지 않는 물음이다. 톨스토이의 집요함과 의지는 인생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당장 죽어도 아무것도 달라질게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죽지 않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톨스토이는 네 가지 방법을 들었다.

첫째는 무지. 삶의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톨스토이 자신은 이미 인식해버렸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두번째 방법은 쾌락주의.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누리고 사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오늘이 아니면 내일 또는 언젠가 찾아와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파괴해버릴 병과 늙음과 죽음을 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세번째 방법은 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고 결단력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으로,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위적으로 삶을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삶을 끝내버리는 것이다. 무의미한 삶에 희롱당하고 농락당하는 상황을 거부한다는 것으로서 톨스토이도 한때 취하고자 했던 방법이다.

네번째 방법은 '약함'에서 비롯된다. 삶은 악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 매달리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삶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실행에 옮겨 삶을 스스로 끝낼 결단력과 강단이 부족하여 그래도 삶에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시간 끌기식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이렇게 문제 자체에 대한 얘기가 계속되다가 처음으로 그가 반짝 하고 떠오르는 것을 써놓은 것이 책의 중간 쯤에 나온다.


나, 그러니까 내 이성은 삶이 비합리적이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성보다 더 지고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이성이 가장 지고한 것이라면 이성은 나의 삶을 만들어 낸 창조주일 것이다. 이성이 없으면 나의 삶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삶의 창조자인 이성이 어떻게 삶을 부정할 수있겠는가? 또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만일 나의 삶이 없다면 내 이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이성이 삶의 아들이다. 삶의 모든 것이고 이성은 그 열매다. 그런데도 이성이 삶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63쪽)


즉 삶이 부조리라는 것을 이성에 의해 추론해냈고 이성이 가장 최고의 지성이어서 모든 추론의 바탕이 된다면 이 이성은 어디서 왔는가. 이성이 작동하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성은 삶의 아들, 이성은 삶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이성이 삶을 부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성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쯤 읽을 때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철학적인 문제에서 종교의 문제로 넘어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기 때문이다. 그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단숨에 무마하려고 설마? 그의 고백록이 결국 내 맘 속에서 또 한권의 종교서로 넘어가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지식인들과 현자들이 이성에 기초해서 제시한 지식은 삶의 의미를 부정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류 전체는 삶의 의미는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지식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은 내가 거부할 수 없었던 그것, 즉 신앙이었습니다.  (70쪽)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인류 전체가 소유해 온 또다른 종류의 지식, 곧 이성에 기초하지 않은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류 전체에게 삶의 의미를알게 해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라는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내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쪽)


그는 이후로 이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지 못한채 하루 하루 그냥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그 문제가 이성 너머의 세계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무조건적이고 반이성적인 세계로 치부했던 신앙에 대해 마음을 열고 스스로 그쪽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한다. 하지만 내가 염려했던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은 아니었다. 신앙에 귀의하기로 하면서도 그는 종교 (톨스토이의 경우 '러시아 정교회')의 어떤 의식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어 괴로와하기도 한다. 

그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종교를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지, 어떻게 삶의 부조리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선택했는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얘기해보고 그들을 관찰한다. 

그 결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자기와 같은 계층, 즉 더 똑똑하고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의 의미를 평온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삶에 접목시키기 보다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여전히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발견한다. 오히려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은 일생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갔지만 부자들이나 지식계층과 달리 자신의 삶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들에게 질병이나 슬픈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운명이고 그들의 힘으로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모두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그 어떤 의심이나 반항도 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우리의 모든 활동들, 우리의 토론들, 우리의 학문, 우리의 예술이 내게 새롭게 비쳐갔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고 그런 것들 속에서는 그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땀 흘려 일해서 삶을 생산해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참되게 살아가는 길로 보였습니다. 그런 삶에 대해 부여한 미가 참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86쪽)


톨스토이가 고백록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이후 그의 삶은 달라진다. 어떻게 종교 속에서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는가 끊임없이 탐색하여 이런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발표할 뿐 아니라, 신앙에 관한 그의 견해를 체계화하여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개혁자로서의 삶도 마다하지 않게 하여, 교회의 부도덕성과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의 형태를 취하여 교회에서 출교 당하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에 대해 했던 고민들은 그만의 고민이 아니었고, 그가 도달한 결론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위에 톨스토이가 언급한 네가지 중 한 방식을 취하며 사람에 따라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결론에 도달했느냐 보다 의미있는 것은, 그런 문제를 피하거나 덮어버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고자 끝도 안보이는 길을 걸어가며 생긴 발자욱들이 남기는 족적이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일 것이고 나 역시 답 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답에 가까운 것이라도 찾으려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배움의 자리를 기웃거리고 있다. 나름대로이 어떤 결론이라도 얻을지, 헤매기만 하다 생을 마칠지 누구도 모르지만, 내가 현재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찾아가는 시간과 노력이 곧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서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렇게 걸어가는 길 자체도 소중하다고.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간도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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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7-24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올까 모르겠어요.
요즘 유튜브를 많이 봅니다. TV로 연결되어 있어 유튜브를 시청하는데 전문가들의 강의가 많아 발품을 팔 필요가 없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배울수록 오히려 제가 아는 게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울 게 너무 많아요. 인터넷도 그렇고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대를 사는 것이 때로는 행운처럼 여겨집니다. 톨스토이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글 한 줄도 못 썼을 듯합니다.^^

hnine 2024-07-25 04:42   좋아요 1 | URL
분량이 그리 길지 않아서 오디오북으로도 가능할 것 같아요. 50대쯤 되면 자잘한 고민이나 걱정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젊을 때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져놓고 답을 못찾아 더 헤매이게 되고, 남은 날에 대한 방향을 못잡겠고, 그러던 중 이 책을 만났어요. 저는 특별한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이 외부로부터 일방적인 이끌림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고뇌하고 탐구 끝에 얻어낸 결론이라는게 더 의미가 있고 그런 시간들이 곧 톨스토이의 인생 한 부분을 이루었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 책도 밑줄 많이 그으며 읽은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