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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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이 창래 작가의 소설 맞나?'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과 분위기도, 문체도 달랐다. 

내가 처음 읽은 이 창래의 책은 1999년에 발표한 <A gesture life>였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은 1995년 발표한 <Native speaker>인데 미국의 한국인 2세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고 나중에 일부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략 이 즈음부터 이 작가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기다리던 끝에 나온 <The surrendered> 는 두툼한 부피의 책을 나오자 마자 구입해서는, 결코 쉽지 않은 내용때문에 오래 걸려 읽고도 (번역본이 나오기 전) 완전 팬이 되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6.25전쟁 피난 열차로 시작하는 첫 장면과 죽음을 앞에 둔 여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만나는 쓸쓸한 끝장면만은 눈으로 본듯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타국에서의 일년> 이 나오기 바로 전작인 <만조의 바다 위에서>에서 작가는 큰 변화를 시도한 듯, 중국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가상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2014년이니 <타국에서의 일년> 이 나오기 10년 전이다. 확실히 다작의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작품을 낼때마다 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재의 변화뿐 아니라  글 쓰는 스타일도 전작과 많이 다름을 느꼈다. 문체의 유려함, 다양한 등장 인물, 풍부한 비유법 등은 어딘가 더 차원이 높아지는 듯. 

그는 내가 그의 준비된 위성이 되기 위해 던바와 대학 생활을 쉽게 버리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471쪽)

(여기서 '던바'는 가상의 지명)

주인공인 틸러에게 인생 일대의 큰 사건의 계기를 제공하는 중국인 혈통의 퐁 로우가 틸러를 처음 본 순간부터 틸러의 앞날을 알아보는 순간을 말하는 문장이다. 준비된 위성이라는 표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성이 된다는 표현. 

이민의 역사를 가진 등장 인물이 소재가 되고 주제에도 관련이 있음은 이번에도 전작들과 같았다. 주인공 틸러는 1/8이 한국인이라 외모로는 거의 백인에 가깝다. 틸러를 자기의 새로운 사업에 끌어들이는 퐁 로우는 중국인 혈통의 거물 사업가. 틸러가 타국에서 일년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와 임시적 가족 처럼 지내게 되는 밸이라는 여자도 중국인 혈통이다. 

틸러는 대학도 아직 졸업하기 전의 젊은이로 세상을 헤쳐나갈 길이 창창한 나이이지만 개방적인듯 하면서 내성적인 면이 있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깊은 면이 있다. 말이나 행동이 아직 어른 보다는 청소년 스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세상 어떤 한 자락을 붙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도 있다.

태평해보이는 바깥의 껍질을 뚫고 실제의 인간적 다양성으로 들어가 보면 불안과 우쭐함, 세속적인 모습과 경건한 모습, 엉망진창인 모습과 꼼꼼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크고 작은 문제에 관해 때로는 단단하고 때로는 무른 편협함이 두드러졌다. (502쪽)

세상의 허무를 느껴오던 틸러의 엄마는 틸러가 어릴 때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어린 틸러와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간다. 그후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하며 혼자 남은 아들 틸러를 아주 조심스럽게 키운 것 같다. 심하게 억압하지도, 나무라지도 않았지만 대신 소통이 잘 되는 부자 사이는 아니었다. 이러한 틈은 자유와 함께 방황을 낳기도 하는 법. 경제적으로 궁핍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틸러에게 간섭은 없지만 방황을 가져다준다.

틸러는 접시닦이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중국인 사업가 퐁 로우를 만나게 되는데 퐁 로우는 대번에 틸러를 알아본다. 위에 인용한 것 처럼 틸러가 자신의 위성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여기에 쉽게 동조하고 그를 따라가는 틸러는 (이런 것 보면 아직 무모함이 가시지 않은 젊은이다운 면모) 퐁 로우가 시작하는 새로운 건강 음료 사업에 일조를 해줄 것을 권유받고, 그것이 살고 있던 미국을 떠나 멀리 중국, 마카오 땅을 밟게 되는 시작이 된다. 아버지에게는 학교에서 연수를 간다고 둘러치고 떠나서 보낸 일년은 떠날 땐 전혀 예상치 못한 경험과 흔적, 인생 변곡점을 안겨주는데,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 '타국에서의 일년'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옥 경험을 하고서 미국의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음식 값이 없어 곤경에 빠져있는 여자 밸과 그의 아들 빅터를 만나게 되는데, 뚜렷한 행선지가 불분명하다는 공통점때문에 그냥 스쳐가는 인연을 넘어 한 곳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살게 되는 것은 이 소설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전사한 남편의 이전 행적때문에 추적을 당하며 사는 밸과 밸이 어린 아들과 틸러는 그렇게 아무 관계도 아니면서 또 특별한 관계를 이루며 한 집에 거주한다. 밸과 틸러는 서로 연인 역할이 되기도 했다가 보호자 역할이 되주기도 하면서. 상대방의 과거를 캐묻지 않으면서 가족처럼 위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루어 가는 것은, 안정된 생활을 꿈꾸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조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뿌리 내리고 싶어하지만 이들은 늘 불안하다. 오랫 동안의 정신적 불안에 길들여진 이들은 때로 극단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지 서로 살펴야 한다. 애착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의 정체도 모호한 채로, 자기를 보호하는지 상대를 보호하는지도 모호한 채로 말이다.

아직도 세상은 위험한 곳. 밸의 자살 시도를 겨우 막아내고, 틸은 밸을 계속 예의 주시하지만 이제 그것은 긴장감이라기 보다 초탈한 모습이다. 그렇게 틸러가 사는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려 노력 중이다. 우연한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까지 의식하지 않으려고, 심지어 편히 눈을 감고 있으려고 한다. 삶이 혓바닥에 화끈한 박하를 올리도록 놔두듯이, 아니, 어떤 식으로든 행운이 따른다면 가장 아삭아삭하고 즙이 많은 주사위 크기의 수박 조각을 올릴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을 태워 버리려고 집 뒤의 테라스로 숨어드는 대신, 호미를 쥐고 돌투성이 땅에서 우리가 고른 텃밭에 거칠게 덤벼든다. 밸과 비즈에게 다양한 가을 채소를 심으라고 시킨 밭고랑의 잡초를 제거한다.

나는 그저 두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으로 하게 되는 생각이 밤사이 얼마나 많은 싹이 텄는지에 관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685-687쪽)

(번역자를 거치긴 했지만 문장의 스타일과 표현이 색다르지 않은지. 나만의 느낌인지.)


마지막으로 번역가가 작품 뒤에 남긴 말에서, 원문을 읽는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평이한 문장보다는 이전 문장에 만족하기 전에는 절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밀도 높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창래 작가의 작품의 특징을 말하면서 그런 곳에서 특히 신경을 많이 썼음을 털어놓고 있다. 평균적으로 한 문장에 70단어 이상을 담고 있다고.


다음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작년에 나왔으니 앞으로 몇년은 더 기다려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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