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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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라는 이름은 소설을 위한 필명. 그는 이미 조중걸이라는 본명으로 여러 권의 인문학 서적을 낸 인문학자이다. 예술학, 논리학, 철학 등을 공부하여 이 분야의 인문학서를 주로 발표해온 경력을 알고나니, 그가 쓴 장편소설은 과연 어떤 내용의 소설일까 궁금했다. 

저자에 대해 아주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니 등장 인물 모두가 작가의 아바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인생 경로나 성격이 자꾸 작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만 화자로 나오는 경찰관이 40대 여성의 실종사건을 맡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이외의 모든 분량은 실종 여자가 남긴 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경찰관은 원래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경찰직으로 방향전환을 했다고 나온다.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공부하다 만 철학에 미련을 갖고 있는, 어딜 보나 경찰관 같지 않은 경찰관이다.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다시 철학으로 이끌린다. (15쪽)

사건 속 실종자는 40대 여자 교수. 남편 그리고 막 수능을 치른 아들도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 위에 말한 경찰관이 수사를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그녀의 방을 수색하던 중 금고 속에 보관된 열 한권의 노트와 PC에 저장된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자그마치 20년 동안의 기록인데다가 범상치 않은 문체, 철학과 미학에 관한 방대한 내용, 계속되는 한 남자와의 대화체 서술, 그 남자의 사진 등 흥미로운 내용에 빠져들어 심상치 않은 기록들임을 알게 된다. 며칠에 걸쳐 끝까지 다 읽는 경찰관이 그 내용을 추려 소개한 것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책의 마지막 대여섯 쪽 경찰관의 에필로그를 제외하고는 실종된 여자가 남긴 20년 동안의 이 기록이 곧 이 소설 전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여자의 기록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인문대생이었지만 평소 미술에 대한 관심때문에 교양으로 미대에서 '현대예술, 감상과 이해' 라는 과목을 신청해서 듣기로 하는데 첫 수업에서 만난 담당 교수는 처음 보았을때 교수로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마치 학생 같은 외모의 젊은 교수였다. 외양보다 더 독특했던 것은 그의 강의 내용과 강의 방식이었다. 예술에 대한 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철학을 얘기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왜 철학이 필요한가, 선과 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 예술과 철학과 논리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 세계에 몰입하게 된 여자는 교수와 단독으로 스터디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까와지며 더욱 더 예술과 철학에, 또 그 교수가 가지고 있는 아우라에 몰입되고 그의 세계로 들어간다.


선과 악은 지식에 의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이해 불가능한  것은 결국 악이 되는 것. (54쪽)


현대철학의 심미적 반영이 현대예술이야. 모든 시대의 예술이 당시의 이념 위에 기초하듯이 현대예술도 현대의 세계관 위에 기초하지.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몬드리안, 리히텐슈타인, 워홀 등의 미술가가 현대를 대표한다고 할 만한 예술가들이야.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심미적 표현이 이들의 예술이야. (93쪽)


그런가? 비트겐슈타인 철학이 칸딘스키, 말레비치, 미로, 피카소 등의 예술 작품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이것은 작가의 생각인지, 아니면 인용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수가 없지만 철학과 예술이 별개의 분야가 아니라 이렇게 연관지어짐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제 여자는 (이 책에서 여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A 라고만 표시된다) 교수를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교수가 꼭 학자는 아니라서 교수라고 불리는게 불만이라는, 교수의 요구에 의해서이다. 


두꺼운 철학책은 이를테면 원근법과 입체처럼 구시대의 유물이야. 육백 쪽의 순수이성비판이 팔십 쪽의 논리철학논고로 바뀌었을 때 현대가 온 거야. 현대 회화는 그 두꺼움을 제거하며 시작돼. 쿠르베는 진정한 천재야. 들라크루아의 두꺼움은 그에게서 사라져. 이제 표층의 시대가 온 거야. 새로운 길은 평면에의 길이야. 새로운 비아 모데르나는 원근법을 저버리며 시작돼. 마사치오는 폐위되고 이제 세잔이 왕이야. (184쪽)


역시 예술과 철학의 연관성이다. 이제 예술과 철학은 더이상 다른 세계가 아니다. 


신념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신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거다. 신념은 유행일 뿐이야. 오늘까지 모순되는 많은 신념이 있었어. 오늘의 신념도 곧 부끄러움이 될 거야. 이것은 신념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니야. 신념은 가져야 해. 그러나 그 신념은 자기 인식적이어야 해. 

지금 나는 그 신념에 물들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오늘 그것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위는 아니다. 단지 우리는 어디론가 움직여야 하고 그것은 지금 판단의 어느 방향을 지시해줄 뿐이다. 그러나 그 별들이 언제고 태양은 아니다. (201쪽)


교수의 말을 A는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나름대로 정리해가면서 받아들인다. 이렇게 영특하게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이해하는 여자 A를 교수도 각별히 생각하며 이 둘의 관계가 발전해나간다.


밑줄을 그으며 읽다보면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지 예술 철학서적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여러번.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무어나 된 듯이 생각하는 인품은 삶을 참을 수 없이 무겁게 만들고 스스로를 오만 속에서 몰락해 가게 만듭니다. 누구라도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인가가 옳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올바른 요소를 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올바름을 향해 분투하고 있는 그 순간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내가 있을 뿐이듯이 노력하고 있는 그 순간만이 유의미할 뿐입니다. (238쪽)


이렇게 읽자마자 공감이 되는 부분에 밑줄을 그을 때는 더욱 그렇다.


사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뛰어난 서사가 이 소설의 장점은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과 같은 전공을 한 교수를 주요 인물로 삼아 그동안 인문서를 집필하면서 제한을 받았던 그의 생각과 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또한번 지식의 향연을 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실패한 선택이란 없어. 선택을 뒷받침하지 못한 실패한 의지만 있을 뿐이야. (263쪽)


선택이 실패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의지의 실패라면, 그게 더 참담하지 않을까. 그건 환경과 조건 탓을 배제한 오로지 나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 


교수와 여자 A ㅡ이 관계에 있어서는 그들의 어떤 선택이 의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것인지, 이 소설의 제목 앞 괄호 속 문구 까지 더하면 이 책의 완전한 제목은 (이미 없는 그와 아직 없는 그녀의) 마지막 외출 이다. 모호하다.


작가에겐 한권의 소설이 더 있다. 이 소설보다 15년이나 먼저 나온 <나스타샤>라는 장편소설이다. 그 작품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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