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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쓴다면 이 정도는 써야겠지.'
다 읽고 우선 느낀 점은 그거였다. 미스테리한 표지, 갸우뚱하게 하는 제목의 이 책은 인기 폭풍을 이미 한차례 거친 후이고 나는 어쩌다 지금에야 읽게 되었지만 기대를 넘어섰다. 기대보다 덜 식상하고, 속도감있게 읽었고, 어둡고 침침하지만은 않았으며, 작가의 메시지가 모호하지 않게 전달되었다.
아미그달라 (Amygdala, 편도체, 扁桃體). '아미그달라'라는 이름의 어원부터가 아몬드 열매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한다.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선 아몬드가 복숭아씨로 바뀌어 '편도체'가 되었지만 말이다. 크기도 아몬드 열매 크기 정도인데 우리 뇌의 한 부분으로서 좌우 하나씩, 해마 (Hippocampus)끝에 달려 있다.
주인공 윤재의 엄마가 선천적 편도체 위축을 가지고 있어 감정표현 불능증을 가지고 있는 윤재의 증세를 고쳐보려고 아몬드 열매를 매일 먹도록 시키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아몬드 열매에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들어본 적 없지만,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내용과 관련 없지 않는 아몬드가 이 소설의 제목인 것에 나는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할머니 손에, 그리 풍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지만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윤재를 사랑으로 키우고 절망적으로 말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어느 날, 그것도 윤재의 생일이고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한 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현장에서 할머니는 윤재를 보호하려다 그 자리에서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어 윤재는 사실상 혼자가 된다. 할머니의 사망 보험금과 엄마가 하던 중고책방을 당분간 맡아하며 윤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거기서 윤재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제공해줄 두 친구를 만나게 된다.
윤재처럼 감정표현 불능증을 가지면 오히려 요즘 같이 감정 과다가 문제가 될 수 있고, 감정 과다가 곧 우울증으로 연결되기 쉬우며, 감정 억제가 곧 논리적 합리적인 것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아남기에 더 유리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담아 졸작시를 끄적그려본것도 있다. 아래 접힌 부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 윤재를 보며 오랜만에 떠올랐다. AI 인간형이라고나 할까.
신체적으로 가정적으로 결핍의 조건으로 시작하여 그 상황을 헤어나오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결국 주저앉고 마는 것으로 이 소설이 끝날까? 아니면 불굴의 의지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극복한다는 드라마조로 흐를까? 그렇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겠지? 혼자 섣부른 추측을 해보며 읽는 것도 내게는 소설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단순히 플롯을 짜지 않았고, 그렇게 독자가 예측할 수 있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 대단한 반전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유감없이 표현하며 이야기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편도체 위축이니, 감정표현 불능증이니 하는 과학적이고 분명한 규정을 넘어서, 인간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살아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읽고 작가 후기를 읽다가 한줄에서 눈이 멈췄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문장이었다.
결핍 없는 내면.
아낌없는 사랑.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며 자기가 받은 것 보다는 결핍되었던 것을 먼저 떠올리고 자신을 연민하는데 급급하기 일쑤인데, 이 작가는 결핍 없는 내면이라고 자신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가 내게 해준 것보다 해주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리며 차별, 무관심, 애정결핍이라고 탓을 하기 일쑤인데, 아낌없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꼭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내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난 것이 작가가 될 깜냥이 못 되는 거라 생각해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다. 세월을 거치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평탄한 성장기 속에서 받는 응원과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가 몹시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세상을 겁 없이 다양하게 바라볼수 있는 힘을 주는지, 부모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262쪽, 작가 후기 중에서)
이 책을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 부지런히 아는 사람들 이름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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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재조합
조증 유전자를 넣어주세요.
전 아마도 선천적으로 그 유전자에
부분적 결실이 일어났는가봐요.
가능하다고요?
좋아요.
다른 유전자까지 같이 들어오지 않게
말끔하게
조증 유전자만 넣어주셔야해요
서약서에 서명하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 주의 사항이라고 깨알만하게 적혀있는
이 말 말이어요
이 유전자가 들어가고 나면
울증에서 벗어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울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요?
하필 조증 유전자 삽입 위치가
정서 공감 유전자 중의 하나를 비집고 들어가야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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