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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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30대 세여성이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듯 진행하는, 즐겨듣는 팟캐스트가 있다. 내려받기해서 산에 오를때 듣곤하는데 그날 진행자중 한명이 에너지 충전이 필요할때, 지치고 힘들때, 혼자서 내리는 처방같은 것으로써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면서 심지어 아껴가며 읽는다고까지 했다. 물론 정세랑이라는 이름을 익히 알고는 있다. 나온 소설도 여러 권이고 편집자 출신 작가라는 것, 재미있게 쓰는 작가라는 것 알고 있었음에도 아직 한권도 그녀의 책을 읽지 않고 있었는데 이날은 드디어 읽어봐야겠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오픈한 도서관엘 갔는데, 다 대출중이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책이 바로 이 책 <재인, 재욱, 재훈>이었다. 읽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루기 싫어 빌려왔다.

출판사에서 노벨라 시리즈로 낸 짧은 소설이라서 160쪽 밖에 되지 않는다. 삼남매 재인, 재욱, 재훈은 재욱의 출국을 앞두고 함께 휴가를 보낼 목적으로 바닷가로 놀러간다. 여기서 미묘한 형광색의 바지락을 먹은 후 세사람 모두 가벼운 초능력 같은 것을 얻게 된다. 재인에게는 강력한 손톱이 자라나게 되었고, 재욱의 눈엔 트러블감지기가 내장되었으며, 재훈에게는 엘리베이터가 자기만을 위해 서는 일이 일어난다.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 예전엔 없던, 다른 사람에겐 없는 능력을 가지게 된 이들은 누군가를 도와주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그렇게 한다.

가볍고, 산뜻하고, 발랄한 이야기이다. 길지도 않은 분량 읽으면서 세사람의 이름을 계속 헷갈려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까? 비슷한 이름에다가, 성별, 누가 첫째이고 막내였더라, 누구에게 무슨 능력이 생겼더라, 아마 읽는 동안 집중하지 않았나보다.

갑자기 초능력을 얻게 된다는 발상도 특이하지만, 세사람의 활동무대가 대전, 아랍, 미국 조지아주 염소농장이라는 설정도 특이하다. 세 곳에 대한 묘사를 아주 세밀하게, 작가가 직접 경험했던 것 처럼 생동감있게 썼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중에 작가 후기를 보니 작가는 주위 친구나 가족에게서 그 소재를 구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그들의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소설에 이용함으로써 생생하게 쓸 수 있다고. 어떤게 더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가까운 지인으로부터의 이야기가 먼저이고 그것을 소설의 무대로 설정하는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랍, 대전, 미국 시골의 염소농장이 너무나 각각이라서 말이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대전에 대한 묘사는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는 하나도 실제와 다른것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의 의미와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아서 누군가의 일생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과연 재미있게 쓰는 작가였고, 딱 이 분량으로 쓸만한 소재를, 최대한으로 살려 썼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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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13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선으로부터 읽고 지금 지구에서 한아뿐 읽을려고 해요. 이 작가의 글 좋더라구요
^^

hnine 2020-08-13 04:57   좋아요 0 | URL
저도 <시선으로부터> 읽고 싶어요. <재인 재욱 재훈>은 재미는 있는데 이 작가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엔 섣부르고 최근작이나 대표작을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재미있게 쓸 수 있는 능력이란 아무나 타고나는게 아닐텐데 타고난 작가의 길로 잘 들어선것이겠죠?
 
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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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쓴다면 이 정도는 써야겠지.'

다 읽고 우선 느낀 점은 그거였다. 미스테리한 표지, 갸우뚱하게 하는 제목의 이 책은 인기 폭풍을 이미 한차례 거친 후이고 나는 어쩌다 지금에야 읽게 되었지만 기대를 넘어섰다. 기대보다 덜 식상하고, 속도감있게 읽었고, 어둡고 침침하지만은 않았으며, 작가의 메시지가 모호하지 않게 전달되었다.

아미그달라 (Amygdala, 편도체, 扁桃體). '아미그달라'라는 이름의 어원부터가 아몬드 열매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한다. 한자로 번역되는 과정에선 아몬드가 복숭아씨로 바뀌어 '편도체'가 되었지만 말이다. 크기도 아몬드 열매 크기 정도인데 우리 뇌의 한 부분으로서 좌우 하나씩, 해마 (Hippocampus)끝에 달려 있다.

주인공 윤재의 엄마가 선천적 편도체 위축을 가지고 있어 감정표현 불능증을 가지고 있는 윤재의 증세를 고쳐보려고 아몬드 열매를 매일 먹도록 시키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아몬드 열매에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들어본 적 없지만,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내용과 관련 없지 않는 아몬드가 이 소설의 제목인 것에 나는 플러스 점수를 주고 싶다.

아버지 없이 엄마와 할머니 손에, 그리 풍족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지만 윤재의 엄마와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윤재를 사랑으로 키우고 절망적으로 말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어느 날, 그것도 윤재의 생일이고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한 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고 현장에서 할머니는 윤재를 보호하려다 그 자리에서 죽고, 엄마는 식물인간이 되어 윤재는 사실상 혼자가 된다. 할머니의 사망 보험금과 엄마가 하던 중고책방을 당분간 맡아하며 윤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거기서 윤재 인생에 터닝포인트를 제공해줄 두 친구를 만나게 된다.

윤재처럼 감정표현 불능증을 가지면 오히려 요즘 같이 감정 과다가 문제가 될 수 있고, 감정 과다가 곧 우울증으로 연결되기 쉬우며, 감정 억제가 곧 논리적 합리적인 것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아남기에 더 유리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담아 졸작시를 끄적그려본것도 있다. 아래 접힌 부분)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이 윤재를 보며 오랜만에 떠올랐다. AI 인간형이라고나 할까.

신체적으로 가정적으로 결핍의 조건으로 시작하여 그 상황을 헤어나오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결국 주저앉고 마는 것으로 이 소설이 끝날까? 아니면 불굴의 의지와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 극복한다는 드라마조로 흐를까? 그렇다면 이 소설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겠지? 혼자 섣부른 추측을 해보며 읽는 것도 내게는 소설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단순히 플롯을 짜지 않았고, 그렇게 독자가 예측할 수 있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 대단한 반전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작가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유감없이 표현하며 이야기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편도체 위축이니, 감정표현 불능증이니 하는 과학적이고 분명한 규정을 넘어서, 인간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살아남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읽고 작가 후기를 읽다가 한줄에서 눈이 멈췄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문장이었다.

결핍 없는 내면.

아낌없는 사랑.

성장 과정을 돌이켜 보며 자기가 받은 것 보다는 결핍되었던 것을 먼저 떠올리고 자신을 연민하는데 급급하기 일쑤인데, 이 작가는 결핍 없는 내면이라고 자신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가 내게 해준 것보다 해주지 않은 것을 먼저 떠올리며 차별, 무관심, 애정결핍이라고 탓을 하기 일쑤인데, 아낌없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꼭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 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내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난 것이 작가가 될 깜냥이 못 되는 거라 생각해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다. 세월을 거치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평탄한 성장기 속에서 받는 응원과 사랑, 무조건적인 지지가 몹시 드물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무기가 되는지, 세상을 겁 없이 다양하게 바라볼수 있는 힘을 주는지, 부모가 되고서야 깨닫는다. (262쪽, 작가 후기 중에서)

 

이 책을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 부지런히 아는 사람들 이름을 떠올려본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유전자 재조합 

 

 

조증 유전자를 넣어주세요.
전 아마도 선천적으로 그 유전자에 
부분적 결실이 일어났는가봐요.
가능하다고요?
좋아요.
다른 유전자까지 같이 들어오지 않게
말끔하게
조증 유전자만 넣어주셔야해요
서약서에 서명하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 주의 사항이라고 깨알만하게 적혀있는
이 말 말이어요
이 유전자가 들어가고 나면
울증에서 벗어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울증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요?
하필 조증 유전자 삽입 위치가
정서 공감 유전자 중의 하나를 비집고 들어가야한다고요?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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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8-11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쩌다 아직도 못 읽은 1인입니다.
h님 부지런히 떠올린 이름중에 저도 있던가요?
그렇다면 함 읽어보겠습니다.ㅋㅋ

hnine 2020-08-11 21:35   좋아요 0 | URL
이 저자가 영화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고 시나리오와 영화 작업도 하고 있으니 stella님께서도 관심있게 보실 것 같아요. 최근 직접 감독한 작품도 개봉을 했는데 전 못봤네요. 작가로 더 나갈지 감독으로 더 이름을 빛낼지, 지켜보고 싶어요.

moonnight 2020-08-11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어요. 중2 조카아이도 좋아했구요. 아낌없는 사랑으로 결핍없는 내면을 선물해 주신 부모님이라니.. 부모로서 정말 뿌듯할 찬사로군요. 손학규씨 기쁘겠어요@_@;;

hnine 2020-08-11 21:38   좋아요 0 | URL
한국 소설에 잠시 시큰둥하고 있느라 격조하고 있는 동안 아몬드 인기가 몰고 지나갔지요. 뒤늦게 손에 잡혀 읽게 되었는데 감히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저 가끔 이런 망상을 해보며 즐거워합니다 ^^).
자기 어린 시절과 자기 부모에게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정말 드물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 정말 오랜만에 봤어요. 나중에 이 작가 가족사항을 알고서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검은 고독 흰 고독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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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은 모든 사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곳에는 매일 새로운 해답이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

 

 

자식을 둔 엄마로서 나중에 그 아이가 무엇을 직업으로 택하든 존중하겠지만 두 가지만 안해주었으면 하는 직업이 있었는데 화이터와 산악인이었다.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란 평생 해야하는 일인데, 조마조마함은 둘째 치고 너무 고독하고 처절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라인홀트 메스너는 1944년 이탈리아 남부 티롤 태생의 산악인이지만 여러 권의 책을 낸 문필가이기도 하다.

어릴 때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등산을 배웠고 아홉 형제중 동생 귄터 역시 산악인이 되었다.

1970년, 히말라야 8,000 미터 급 14좌 중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Nanga Parbat,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에 동생 귄터와 함께 도전하였고,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오던 중 눈사태로 동생 귄터가 실종되는 사고를 당한다 (이때의 이야기는 '벌거벗은 산'이라는 제목의 다른 책으로 나와있다.)

이 책은 그렇게 동생을 잃고 8년 후 이혼의 아픔까지 겪고 난 라인홀트가 낭가파르바트를 단독등반으로 도전하며 쓴 기록이다. 단독등반!

8,000 미터가 넘고, 깎아지른 수직의 빙벽 높이가 수백 미터에 이르는 루트를 산소 호흡기 없이 (무산소), 피켈과 아이젠 외에 별도의 다른 특수 도구 없이 (알파인 스타일), 혼자서 (단독등반), 이 세가지 조건으로 도전한 것이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물론 지금은 혼자 있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이 높은 곳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지탱해 준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독 속에서 분명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고독이 정녕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지난 날 그렇게도 슬프던 이별이 이제는 눈부신 자유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은 내 인 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제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다. (165쪽)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상상의 누군가와 계속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그 상상 속 파트너는 수시로 라인홀트 앞에 나타나 그의 말에 대답해주기도 하고 라인홀트에게 질문도 던져주기도 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궁극적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고독의 문제가 오히려 삶과 죽음의 문제보다 더 심오한 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해보게 되었다. 그 고독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독의 차원이 아니라 8,000 미터 산을 오르기로 혼자 결정하고, 혼자 실행하면서 혼자 경험하는 절대고독을 말한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어떤 일이든 완전히 혼자 힘으로 해내겠다는, 마지막까지 혼자서 해내겠다는,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그러한 갈망은 낭가파르바트 단독 등반을 마친 후 더 강해졌다. 이것은 모든 능력을 가지고 싶다든가 어떤 일이건 반드시 해내겠다든가 하는 욕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완전히 홀로 서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안식을 찾고 그 안에 있고 싶었다.

나는 때때로 명상에 잠기곤 했는데, 수수께끼로 가득한 이 세상의 모든 신비가 내 안에 있다는- 모든 비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이 내게 있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244, 245쪽)

 

 

그동안 나는 고독이란 말을 너무 흔하게 쓰지 않았던가?

이 책의 키워드는 산도 아니고, 정복도 아니고,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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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8-1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스너. 어려서 많이 듣고 자란 이름입니다. 저희 집(이라기보다 외가집)이 그 염병할 산악인을 좀 배출했습니다. 그들을 보고 전 산에 안 다니기로 했고요. 어찌 그리 다 사회부적응자들인지....
그래도 정말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갑습니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조금은 누추한 것인가 봅니다. ^^;;

hnine 2020-08-10 21:14   좋아요 0 | URL
와, Falstaff님. 메스너란 이름을 어려서 많이 듣고 자라셨다니 분위기가 짐작되네요. 듣고 자라셨으니 그 분야를 미워하면서 안보이게 정도 깊겠어요.
댓글의 마지막 문장을 자꾸 읽어보게 됩니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게 조금은 누추한 것. 멋진 말씀입니다!
 
콘클라베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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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단어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콘클라베.

사전에서 찾아보기 전 무슨 뜻일까 상상부터 해본다. 미술 용어? 건축 용어? 고악기 이름? 다 틀렸다. 콘클라베 (Conclave)는 원래 비밀의 장소라는 뜻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모이는 추기경들의 회의, 그리고 이 동안 추기경들이 엄격히 외부로부터 격리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저자 로버트 해리스는 1957년 영국 태생으로 기자와 칼럼니스트 출신이다. 1992년에 작가로 데뷔했는데 이때부터 큰 호평을 얻어 히스토리 팩션의 새 장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중 <당신들의 천국>, <에지그마>, <아크엔젤> 등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책 표지엔 제목 콘클라베 아래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부연제목이 달려있고, 금장의 열쇠, 열쇠구멍으로 보이는 바티칸의 성당 그림이 눈길을 끈다. 몇장 넘기면 찬사와 호평으로 가득 찬 각종 미디어의 평이 실려있다. 대박! 도저히 책을 덮을 수 없다 (가디언), 고품격 스릴러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발하고 긴박한 스릴러 (데일리 익스프레스), 악마의 시의 천주교판 (뉴욕 타임스) 등, 읽기 전 기대감을 잔뜩 채워놓는다. 페이지를 넘기면 등장 인물 소개가 이어지는데, 이렇게 등장 인물 소개가 따로 나오는 소설들은 내용이 매우 얽히고 섥혀 있나보다 하는 긴장감을 주기도 하는데 바로 뒷 페이지에 로마 교황청 지도까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나니 이거 상당히 복잡한 구성으로 내용이 되어 있나보다 하고 확실하게 긴장하며 읽기 시작하게 된다. 결과는? 꼭 그럴 필요 없었다.

이야기는 갑작스런 교황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추기경단장직을 맡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이 바티칸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교황의 사인 (死因)은 심장 발작. 이날 저녁 식사까지 정상적으로 일상 업무를 하였는데 밤에 갑작스런 이상 증세를 보여 응급처치를 시행했으나 끝내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이로써 교황직은 공석이 되었고 전 세계118명의 추기경 대표단들이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일 ('콘클라베') 이 진행되는데 추기경단장을 맡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이 이 행사를 주관하여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기까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교회도 사회인지라 교황의 자리를 놓고 야심을 가지고 있는 몇몇 후보가 있고 경쟁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은 특이해서 투표단 2/3의 동의를 얻을때까지 최다 30회까지 투표를 진행할수 있다. 여기서는 여덟번의 투표를 거쳐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다.

읽기 시작할때의 긴장감과 기대감에 비해 이야기의 진행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아쉬움으로 읽기를 마쳤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결말도 있지만 긴박할 정도는 아니고 그마저 없었다면 너무 밋밋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나와있는 평 처럼 지적 스릴감, 기발하고 긴박함까지는 아니지 않나 하는 개인적인 소감이다.

요즘 우리가 하도 기발하고 예상못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일까 하기엔 이 책이 나온 것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2016년에 출판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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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공대생 만화
맹기완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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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특성을 단순하게 일반화 하거나 카테고리화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노력해야할만큼 우리는 참 쉽게 사람을 분류하기 좋아한다. 이과생과 문과생, 맏이와 막내, 음대생, 공대생, 시인, 공무원, 선생님 등등. 벌써 단어와 함께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것에 익숙해있다. '공대생이 만화를?' 하는 호기심을, 만화를 전공으로 하지 않은, 전문 만화가가 아닌 학생이 그렸다는 정도로 제한하고 보려고 했다.

아이패드 산 기념으로 만화를 그려보았고 (이미 이쪽에 재능이 있었다는 얘기) 그것을 스누라이프 (SNULife) 라는 서울대 생활정보 사이트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이 만화책의 탄생 경로이다. 내용은 과학, 공학 분야의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업적을 간단히, 이해하기 쉽게 담은 것인데 케플러, 보어, 패러데이 같은 수백년 전 사람도 있고 빌 게이츠, 제임스 와트슨 같이 현존하는 인물도 있다. 다른데서 들어본 일화도 있지만 이 책에서 처음 보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서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들의 특이한 성격, 괴벽, 일화 중심인 것 같지만 잘 읽어보면 평소에 많이 들어봤어도 설명하라면 잘 못하겠는 개념들에 대한 설명들도 깨알처럼 책 여기 저기 박혀있었다. 특히, 슈레딩거 편에서 슈레딩거의 고양이로 예시되는 슈레딩거 방정식에 대한 설명은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반론과 더불어, 관측하기 이전에는 물리량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알쏭달쏭함으로, 이어서 그 분야에 대한 관심의 증폭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인물 그림도 나름 그들의 특징을 살려 그리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표지의 저자 사진에 보면 사진 옆에 그림으로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이 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와 수학자 푸엥카레인데 쇼클리는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저자가 설명해놓았지만 푸엥카레는 특별히 저자가 존경하는 인물일까?

만화로 연재할때 댓글로 달렸던 것으로 보이는 독자의 의견들도 페이지 한쪽에 기재했는데 이것 읽으며 더 많이 웃은 듯 하다. 가장 기발하다고 생각한 것은 과학자 한 사람과 저자의 1:1 대화창이었다. 우문우답 처럼 보이지만 현문현답이라 할만큼 질문도 대답도 기발했고, 대답하는 방식도 설명한 과학자에 따라 다 달랐다.

재미있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개인적으로 몇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째, 아무래도 일화 중심이 되기 쉬운 함정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 패러데이 과학 자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과 더불어 패러데이의 <촛불의 과학>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 둘째, 아무리 만화라지만 참고 문헌이 몇권이라도 명시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 책에 실린 인물들이 과학자이다보니 유난히 과학 분야에 천재가 많은 것 같지만 천재는 어느 분야에나 존재한다. 작곡, 연주, 그림, 조각, 건축 뿐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등등.

이응노 미술관 입구 돌에 새겨져 있는 말이 생각났다.

"이 세상의 천재는 노력이 이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 사람들도 대부분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범인을 슬프게 한다. 노력도 안 하면서.

 

 

(저자의 사진을 보니 얼굴이 어딘지 낯익어 알고보니 한때 TV에 종종 출연하던 맹기열 셰프가 저자의 형. 형제가 얼굴이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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