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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공주 터미널에 내려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야 은애사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점심 먹을 시간을 지나 있었지만 여름 한 낮의 열기로 후덥지근한 터미널 의자에 앉으니 별로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 음료수만 하나 사서 마시며 오고 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려서 은애사 초입에서 내렸다. 짐가방을 들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둘러봐도 산, 저쪽을 둘러봐도 산, 주위는 온통 초록이었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머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 했고, 어느 덧 나는 절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을 몇 개 지나 종 내로 들어서니 정면엔 대웅전이 보이고 절 마당엔 오래되어 보이는 석탑이 하나, 마당 왼쪽엔 동백나무로 보이는 나무 아래 돌우물이 있고 그 앞에 뭐라고 표지판이 있었다. 평일 오후의 절은 조용했다. 대웅전 안에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흘낏 보고 오른 편의 종무소로 들어갔다. 사무보시는 분인 듯한 여자 분이 앉은뱅이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적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얼른 시선을 내게 향했다.

“저, 서울서 왔는데요, 제 아버지께서 여기 계시는 장 문수 아저씨께 연락을 해놓으셨다고......”

내가 말을 꺼내자 그 여자는 처음엔 무슨 말인가 하더니 내 말을 다 듣고는 기다려보라고 하고는 뒷문으로 나갔다. 잠시 후 들어와 앉았던 책상 한 편의 작은 수첩에서 뭔가를 찾더니 전화를 걸었다.

“예, 처사님, 지금 여기 웬 학생이 찾아왔네요. 이름이?”

나를 쳐다보기에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서강석이요.”

“서강석이라는데 부친께서 처사님께 연락을 해놓으셨다고요.”

그리고는 수화기 저편의 말을 잠시 들으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렸다. 아버지는 장씨 아저씨에게, 그리고 장씨 아저씨는 지금 이 여자 분에게 무어라고 한 것일까?

“학생, 학생이 지낼 방은 여길 나가서 저 위편에 있어. 가방 들고 따라 와요.”

대웅전 뒤편으로 조금 올라가자 작은 암자가 있었다. 창호지 발린 방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청량함이 발끝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방을 안내해주신 보살님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이 다시 종무소 쪽으로 내려가고, 땀도 식힐 겸 차가운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넓지도 않은 방이고 이제 발 들여 놓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머리 아픈 일들은 다 안 보이는 곳에 두고 온 듯 마음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내가 여기 왜 와있나 하는 생각이 들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은애사에서의 나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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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로부터 며칠 후, 예고도 없이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방학이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지도, 자율학습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다시 예전처럼 낮엔 자고 해질 무렵이 되면 시내에 나가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는 생활로 돌아갈 판이었다. 밤늦게 연락도 없이 오신 아버지는 그날 밤 별 말씀 없이 그냥 나와 나란히 누워 주무셨다. 피곤하셨는지 누우시자 나보다 먼저 금방 잠이 드셨다.

달그락 소리에 잠이 깨어 보니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셨는지 옆에 안계셨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아버지가 부엌에서 내는 소리였다.

“뭐하세요?”

밥 냄새와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가운데 2인용 작은 식탁에는 벌써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냥 이래 묵지 뭐. 밥하고 찌개면 안되겄나.”

“아버지......”

“니, 밥 묵고 나랑 어데좀 가자.”“어디요?”

“조용한 데 가서 좀 쉬면서 공부도 좀 하고 그라레이. 예전에 내랑 같이 일하던 목수 장씨가 저 아래 공주 은애사에 지금 있다카더라. 장씨에게 연락해 놓았다. 너 거기서 한 여름 좀 지내다 오게.”

장씨 아저씨라면 나도 알고 있다. 아버지가 한참 집을 지어 집장사를 할 때 우리 집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며 아버지의 오른 팔이 되어 일하시던 아저씨였다. 내가 서울로 전학을 오고서 다시 본 일이 없었다.

“거긴 왜......”

“지난 일 자꾸 생각해봤자 도움 되는기 하나 없다. 지금 열심히 잘 살 궁리를 해야제. 뭐, 미술 연수도 그렇고, 마음 상해하지 말고. 거기 못가면 뭐 할 일 없다드나? 본당에서 좀 떨어진 암자에 방 하나 마련해 달라켔으니 가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좀 다잡고 그라거라.”

“여기 그냥 있겠어요.”

느닷없이 절은 무슨. 머리 식히고 마음잡는 것,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는 못하랴 싶었다.

“여기 있으면 또 뻔하다 아이가. 공부고 뭐고, 그냥 시내로 할일 없이 돌아다니면서 허송세월 하지 않건나? 내 데리다 주고 갈꺼이니 어서 준비 하그라.”

“여기 그냥 있겠어요.”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조금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아버지의 긴 한숨이 들렸다. 그러더니 수첩을 꺼내어 한 장을 북 찢어내시더니 은애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서 아버지 명함 한 장과 함께 건네주셨다.

“여기 그 절 주소랑 전화 번호, 그리고 버스 편이다. 공주까지 시외버스 타고 가서 거기서 은애사 있는 까지 가는 버스가 있으니 그걸 타고 가면 된다. 내가 오늘 데려가 주려고 했드마이”

내가 더 이상 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아버지는 일어서셨다.

“강석아”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시려는지 옷을 주춤주춤 입으시다 말고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셨다.

“예.”

“니 엄마 말이다......”

엄마 얘기를 좀처럼 꺼내는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 입에서 엄마 얘기가 나오자 나는 방바닥을 향했던 눈을 얼른 아버지 얼굴로 향했다.

“니한테는 말이다......보통 엄마가 아닌기라.”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씀하시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셨다. 내게서 무슨 대답을 기대하진 않다는 듯이.

아버지의 그 말이 여운이 되어 나는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었고 무엇을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시선을 돌려보니 아버지가 차려 놓은 아침밥상이 보였다. 함께 먹고 절에 나를 데려다 주려하셨는지 소복한 밥 두 공기가 마주 보고 놓여 있고, 가운데 된장찌개에서는 아직도 김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김치와 김이 전부였지만, 그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밥상 앞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입 안에 금세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왔다. 한동안 그렇게 한입을 씹지도, 삼키지도 않은 채 있었다. 삼키지도 않았는데 왜 목 언저리가 묵직해져 오는 것인지. 무엇이 목구멍을 꾹 누르는 것처럼 메어져왔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첫술을 그렇게 넘기고 나서는 그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된장찌개도 한 술 뜨고, 김치도 집어 먹고, 김도 밥에 얹어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눈두덩이 뜨끈해지나 싶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또 목이 메었다. 일어나 물을 한 잔 들이켜고 다시 앉아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리고는 간단한 옷가지와 노트, 카메라, 책 몇 권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어가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공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금 아까 아버지에게는 여기 있을 거라고 해놓고서 나는 어느 새 어디로라도 가야할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사그라져 버릴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폭발해 버릴 것도 같았다. 재로 사그라지거나 화약처럼 폭발하거나.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집을 나서자 밖에는 비가 꽃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봄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빗방울은 그렇게 하늘에서 보솜보솜 내려 왔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으니 꽃물이 옷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더 스며들어가 마음속에 꽃망울이 맺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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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저 내일 집에 내려가요.”

집에 내려간다고 전화로 이렇게 미리 아버지에게 알려보기는 처음이었다. 여름 방학을 하루 앞 둔 날이었다. 다 그만 두겠다고 할 참이었다. 학교고 뭐고, 그냥 떠돌아다니며 여행이나, 아니, 그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냥 숨만 쉬며, 아무 것도 안하고 숨만 쉬며 지내고 싶었다. 그것은 아무 의욕이나 의지 없이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

“니 어데 간다고 안했나?”

뉴욕에 가게 되었다는 말을 지난 번 아버지와 통화할 때 얘기했었다.

“안 가요.”

“와?”

“......”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더 꼬치꼬치 물을 아버지도 아니었다.

“뭐, 와서 얘기하던지. 내일 보자 그래. 드가그라.”

“예.”

‘안 가는 것이 아니고 못 가게 되었단 말이에요. 나쁜 짓 하고 돌아다녔다고, 못 내보내겠대요. 아무데도 못가요 나는요. 요기 이 모양 이 꼴로 그냥 있다가 썩어 버릴 거라고요.’

소리 없는 외침, 소리 없는 분노, 나의 희망이, 기쁨이, 소리 안내고 연기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 날, 짐도 별로 없이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진이 다시 감은 눈앞에 나타났다. 현재를 망친 과거가 다시 내 위로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아기인 나를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나란히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면서도 어딘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한 그 여자는?

 

버스터미널에 내려 집까지 걸어오려면 시장통을 지나게 된다. 4일과 9일마다 아직 장이 서는 이 동네. 장날의 시장통은 더 좁고 더 시끄럽다. 어릴 때 가끔 할머니를 따라 다니기도 했던 장이다. 집에 들어서자 강진이가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든다.

“어, 형!”

“그래, 잘 있었냐? 아버지는?”

지난겨울에 봤을 때보다 좀 키가 컸는지 살피며 강진이 어깨를 한번 툭 쳐주었다.

“아버지 곧 오신다고 금방 전화 왔어.”

“어머니는?”

“엄마는 늦게 오셔. 가게 정리 하시고 9시는 되어야 들어오시니까.”

강진이는 시선을 마당의 개집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그럼 너 저녁은 어떻게 먹냐?”

“내가 뭐 어린애야? 저녁도 혼자 못 먹을까봐서? 아버지가 돈 주고 가시면 사먹기도 하고, 뭐, 내가 대충 차려 먹기도 하고 그래.”

“너 키가 별로 안자란 것 같아서 그래 인마. 요즘 여자애들이 남자 친구 얼굴 못 생긴건 용서해도 키 작은 건 용서 못한다는 말 못 들었냐?”

강진이랑 오랜만에 싱거운 얘기를 하며 킬킬거렸다.

강진이 말처럼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어머니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늦을 거라며 강진이와 나만 데리고 예전부터 단골로 가던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켜주셨다. 어릴 때로 잠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주로 얘기가 오간 것은 나와 강진이일뿐,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언제나 말이 없는 아버지. 사는 게 참 재미없어 보이는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보면 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집에 들어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 있다가 내키지 않았지만 방문을 열고 나가 고개만 꾸벅했다.

“어 그래. 방학이 금방 돌아오는구나.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어.”

내 얼굴이라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짧은 말이나마 한건지, 나도 모른다. 나 역시 어머니 얼굴을 바로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강진이는 컴퓨터 앞에서 게임을 하느라 정신없고 나는 슬며시 방을 나와 책꽂이가 있는 방으로 갔다. 책꽂이 위의 상자가 아직 거기 있을지 궁금해 하며 위를 올려다본 순간 책꽂이 위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고 깨끗이 치워져 있는 것을 알았다. 혹시 상자 속의 사진들이 앨범 속에 정리되어 책꽂이에 꽂혀 있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책꽂이엔 지난겨울에 꽂혀 있던 책들이 그대로 그 자리에 꽂혀 있을 뿐 사진 앨범 같은 것은 없었다.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대고 벌렁 누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멍하니 한참을 누워 있는데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였다.

“여기서 와 그러고 있노?”

특별히 궁금해서 묻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말문을 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밥 먹었는지 궁금하지 않아도 밥 먹었냐 묻듯이 말이다.

“미국 간다켔던 거이 와 그리 되얐노?”

아버지는 금방 나가지 않으시고 일어서 앉은 내 앞에 따라 앉으셨다.

“학교 빼먹고 패싸움 하고, 경찰서 드나들고……. 뭐, 미국까지 보내서 보여주고 가르쳐 주기엔 불량학생이라는거죠.”

“지난 일 아이가?”

“지난 일을 다 조사했나보더라고요.”

아버지는 잠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도 나처럼 실망이 크지 않았을까? 아님, 니가 그럼 그렇지 하고 혀를 차고 계실까. 그래도 나는 아직 아버지가 후자보다는 전자에 해당할 거라 믿는 편이었다.

“너무 실망 말그라. 또 기회가 있을기이다. 내, 니 나이 때는 말이다, 내 벌어서 내가 학교 다니능기라. 니야 하고 싶은기 있으면 뭘 못하겠노. 내가 있는데.”

아버지는 더 길게 말씀 안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일찍 여읜 아버지는 지금의 기반을 이루기까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이라 할 인물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아버지로부터 종종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겪음이 많다보면 오히려 할 말이 줄어드는 건지. 아버지처럼 말이 없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아버지”

이젠 물어야했다.

“와?”

“제가 저에 대해 뭐 모르고 있는 것이 혹시 있어요?”

"기 뭔 말인데?"

되묻는 아버지 말투가 애매했다. 뭔 말인지 정말 모른다는 것으로 들리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지난 번 집에 내려왔을 때 제가 사진을 봤거든요. 저 어릴 때 사진 같은데 저랑 아버지, 그리고 옆에 처음 보는 여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 여자 분은 누구신가요?”

아버지는 말없이 잠시 서계시더니 내 앞에 천천히 앉으셨다.

“니 어무이 아니라면 이모들 중 누구 아니건나?”

“아버지!”

‘내가 엄마나 이모들을 못 알아 봤을까봐요?’

“지난 일, 모 신경 쓸기 있노. 뭐, 니 아는 누군가 같이 찍었지 않건나.”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신경 쓰지 말고 맘 잡고 공부나 열심히 하그라. 이제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 아이가. 필요한 기 있으면 얘기하고.”

나가는 아버지의 뒤를 향해 말했다.

“모르는 얼굴인데 어쩐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아버지는 흠칫하시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셨다.

‘아버지, 제게 뭘 숨기고 있으신 것 맞지요? 그렇지요?’

답답했다. 지난 일이 지금 이렇게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지난 일 뭐 신경 쓸게 있냐는 것은 나에게 지금 전혀 먹히지가 않는단 말이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앞을 향해 달릴 준비가 겨우 되었는데 왜 내 앞을 막고 나서는 것들이 이렇게 자꾸 생기는 것인지, 도대체 나란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온통 모르겠는 것투성이냔 말이다. 에잇.

나는 강진이방으로 가서 아직 풀지도 않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아직 안자고 있던 강진이가 놀라서 물었다.

“형, 가방은 왜?”

“강진아, 나 올라간다. 아버지 주무시는 것 같으니 내일 네가 말씀드려라.”

“형! 조금 아까 와놓고 한밤도 안자고 가?”

“잘 있어라.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인마......”

밤이지만 아직도 낮의 열기가 식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내 안의 열이 뿜어 나오기 때문인지 후끈했다. 낮에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서울 가는 막차는 대여섯 승객을 태우고 출발했다. 창문을 내다보지도 않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내발로 떠나면서도 마치 누가 떠다 밀은 양 눈물이 찔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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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리 반 마담이 이틀째 결석이다. 이틀 결석이야 나 같은 놈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담은 결석 첫날부터 웬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도 학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슬슬 궁금해졌다. 그렇다. 궁금했을 뿐이지 걱정까지 한 것은 아니다. 나란 놈은 원래 남 걱정해주고 챙겨주고 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다른 인간 걱정하고 위로해줄 자격 있는 인간도 없다는 생각이다. 그건 알고 보면 결국 다 흉내이고 가식일 뿐이다. 아무튼 평소 같으면 아파도 학교 와서 끙끙거릴 마담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일분 쯤 하면서 미술실로 가고 있을 때였다.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기에 뒤돌아보았더니 거기 거짓말처럼 마담이 빙긋 웃으며 서있었다.

“뭐야, 어디서 나타난 거야?”

어디 특별히 아픈 기색도 없어 보이는 마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미술실 가는 길이지? 잠깐 얘기나 하자.”

“계집애들처럼 얘기는 무슨.”

“아, 자식. 정작 요즘 여자애들은 얘기하는 거 안 좋아한다 너.”

그러면서 우리는 미술실 가기 전의 중앙 현관으로 나가 정원석 위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아팠냐? 이틀씩이나 안나오고.”

“아팠지.”

“어디가 얼마나 아팠는데?”

“몰라.”

“몰라? 병원에 안갔었냐?”

“의사도 모른다더라.”

얘기나 하자던 녀석이 꼭 말하기 싫은 놈처럼 겨우 대꾸만 하고 있다.

“미술대회 소식 들었다.”

마담 입에서 의외의 얘기가 나왔다.

“못가게 되었다며.”

그렇게 말하며 마담은 어쩐지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는데 말이야.”

당연하지, 하기 싫으면 왜 하겠냐고 하려다가 지난번에 마담이 한 얘기가 생각나서 하지 않았다.

내가 대답이 없자 마담은 내 어깨를 한번 툭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가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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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강석아, 너 미국에 혼자 가라면 가겠냐?”

미술실로 들어서는 내게 미술 선생님이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무슨 소리인가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대번에 감이 왔으면서도 정말 나의 짐작이 맞나 싶어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며 답을 읽어보려 하였다. 그때 내 표정 역시 아주 복잡했으리라. 그런 나를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아, 됐구나!’

“야, 열여섯 살에 미국, 그것도 뉴욕 연수라니, 너 참 행운아다.”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본선에서 뽑힌 세 명에게는 여름에 미국 뉴욕에서 한 달 동안 합숙하며 열릴 예정인 국제 청소년 아트 캠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내가, 거기에 뽑혔단 말이다. 전국에서 세 명 뽑는데, 거기에 나, 서 강석이가 뽑혔단 말이다.

“선생님, 정말인가요? 혹시 이름이 같은 다른 아이는 아닌가요?”

“녀석, 전혀 예상 안한 모양이다? 나는 믿고 있었는데.”

미술 선생님 얼굴엔 이제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에게 이런 기회가 오다니,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오다니.

“아마 작품만 달랑 몇 점 보내지 않고 너의 작업 과정을 자세히 담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 함께 제출한 것이 영향이 컸던 것 같아. 기술적인 완성도보다 자기만의 생각, 개성, 독자적인 방법 등에 비중을 많이 두는 대회였거든.”

“선생님”

“응?”

“고맙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진심이었다. 나도 이제 목표라는 것이 생겼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 날 이후 상철이의 일도, 사진 속의 여인에 관한 일도, 쉽게 잊을 수 있었던 것을 봐도 나는 이후로 많이 들떠 지냈던 것 같다. 자아도취였을까? 생전 처음 나가보는 외국, 여권을 만들고 비자 서류 준비를 하고, 아버지께도 연락하고, 반 아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느낌도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인마, 그러게 학교생활을 충실히 해왔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 아니냐?”

무슨 소리인지 감도 못잡으면서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출국 서류 준비하고 심사하는 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고 했다. 학교에 아예 출석도 하지 않고, 패싸움으로 경찰서를 드나들었으며, 결정적인 것은 상철이 아버지가 그동안 경찰서에 탄원서를 내놓은 모양이었다. 착하기만 하던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잘못된 길로 꼬임에 빠지게 되었고, 못어울리게 집에서 막는 것에 대한 반발로 충동적 자살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내 아들 그렇게 만든 놈들은 버젓이 아무 체벌도 없이 학교에 버젓이 다니고 있으니 또 어떤 순진한 학생들을 꼬여낼지 모른다고, 탄원서인지 진정서인지를 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형민이와 내 이름을 비롯해 함께 어울려 다니던 다른 몇 명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회가 그냥 수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국가 대표 격으로 국제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자격에 모자란다는 것이 이유였다.간신이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어쩐지 내게 올 행운치고는 너무 크다 했다고, 나 자신을 마구 비하했다가 곧 제풀에 지치기도 했다. 나의 과거가 나의 현재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은 다시 나로 하여금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지난 일인데, 다 지난 일인데, 이렇게 내 발목을 잡을 건 없지 않느냐고, 하늘을 향해 눈을 흘기다가, 그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걸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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