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로부터 며칠 후, 예고도 없이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방학이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니지도, 자율학습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다시 예전처럼 낮엔 자고 해질 무렵이 되면 시내에 나가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는 생활로 돌아갈 판이었다. 밤늦게 연락도 없이 오신 아버지는 그날 밤 별 말씀 없이 그냥 나와 나란히 누워 주무셨다. 피곤하셨는지 누우시자 나보다 먼저 금방 잠이 드셨다.

달그락 소리에 잠이 깨어 보니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셨는지 옆에 안계셨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아버지가 부엌에서 내는 소리였다.

“뭐하세요?”

밥 냄새와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가운데 2인용 작은 식탁에는 벌써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그냥 이래 묵지 뭐. 밥하고 찌개면 안되겄나.”

“아버지......”

“니, 밥 묵고 나랑 어데좀 가자.”“어디요?”

“조용한 데 가서 좀 쉬면서 공부도 좀 하고 그라레이. 예전에 내랑 같이 일하던 목수 장씨가 저 아래 공주 은애사에 지금 있다카더라. 장씨에게 연락해 놓았다. 너 거기서 한 여름 좀 지내다 오게.”

장씨 아저씨라면 나도 알고 있다. 아버지가 한참 집을 지어 집장사를 할 때 우리 집에서 숙식하다시피 하며 아버지의 오른 팔이 되어 일하시던 아저씨였다. 내가 서울로 전학을 오고서 다시 본 일이 없었다.

“거긴 왜......”

“지난 일 자꾸 생각해봤자 도움 되는기 하나 없다. 지금 열심히 잘 살 궁리를 해야제. 뭐, 미술 연수도 그렇고, 마음 상해하지 말고. 거기 못가면 뭐 할 일 없다드나? 본당에서 좀 떨어진 암자에 방 하나 마련해 달라켔으니 가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좀 다잡고 그라거라.”

“여기 그냥 있겠어요.”

느닷없이 절은 무슨. 머리 식히고 마음잡는 것,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서는 못하랴 싶었다.

“여기 있으면 또 뻔하다 아이가. 공부고 뭐고, 그냥 시내로 할일 없이 돌아다니면서 허송세월 하지 않건나? 내 데리다 주고 갈꺼이니 어서 준비 하그라.”

“여기 그냥 있겠어요.”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조금 아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아버지의 긴 한숨이 들렸다. 그러더니 수첩을 꺼내어 한 장을 북 찢어내시더니 은애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서 아버지 명함 한 장과 함께 건네주셨다.

“여기 그 절 주소랑 전화 번호, 그리고 버스 편이다. 공주까지 시외버스 타고 가서 거기서 은애사 있는 까지 가는 버스가 있으니 그걸 타고 가면 된다. 내가 오늘 데려가 주려고 했드마이”

내가 더 이상 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아버지는 일어서셨다.

“강석아”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시려는지 옷을 주춤주춤 입으시다 말고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셨다.

“예.”

“니 엄마 말이다......”

엄마 얘기를 좀처럼 꺼내는 적이 없으셨던 아버지 입에서 엄마 얘기가 나오자 나는 방바닥을 향했던 눈을 얼른 아버지 얼굴로 향했다.

“니한테는 말이다......보통 엄마가 아닌기라.”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만 말씀하시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가셨다. 내게서 무슨 대답을 기대하진 않다는 듯이.

아버지의 그 말이 여운이 되어 나는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었고 무엇을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시선을 돌려보니 아버지가 차려 놓은 아침밥상이 보였다. 함께 먹고 절에 나를 데려다 주려하셨는지 소복한 밥 두 공기가 마주 보고 놓여 있고, 가운데 된장찌개에서는 아직도 김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김치와 김이 전부였지만, 그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밥상 앞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크게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입 안에 금세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왔다. 한동안 그렇게 한입을 씹지도, 삼키지도 않은 채 있었다. 삼키지도 않았는데 왜 목 언저리가 묵직해져 오는 것인지. 무엇이 목구멍을 꾹 누르는 것처럼 메어져왔다. 그러다가 엉겁결에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첫술을 그렇게 넘기고 나서는 그때까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된장찌개도 한 술 뜨고, 김치도 집어 먹고, 김도 밥에 얹어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눈두덩이 뜨끈해지나 싶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또 목이 메었다. 일어나 물을 한 잔 들이켜고 다시 앉아 밥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리고는 간단한 옷가지와 노트, 카메라, 책 몇 권을 주섬주섬 가방에 넣어가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공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금 아까 아버지에게는 여기 있을 거라고 해놓고서 나는 어느 새 어디로라도 가야할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가만히 방안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사그라져 버릴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폭발해 버릴 것도 같았다. 재로 사그라지거나 화약처럼 폭발하거나. 결과는 비슷할 것이다.

집을 나서자 밖에는 비가 꽃처럼 내리고 있었다. 마치 봄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듯이 빗방울은 그렇게 하늘에서 보솜보솜 내려 왔다. 비를 맞으며 걷고 있으니 꽃물이 옷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더 스며들어가 마음속에 꽃망울이 맺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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