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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와 어린이책 - 잃어버린 옛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서
김환희 지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대학교에 입학하고서 전공 상관없이 누구나 배우게 되는 교양 과목들 중 특히 교양 국어 시간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시간이기도 했다. 고등학교까지 12년을 배워온 국어인데, 대학 국어 시간에 듣는 강의는 그 관점부터 다른데에 놀란 것이다. 우리 나라 민담이나 설화에 담긴 의미의 해석, 우리 나라의 대표 문학 작품이라는데 믿어 의심치 않던 작품에 대한 생전 처음 듣는 비판과 재해석, 한국 고전으로만 알던 이야기들이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신화, 원형, 집단 무의식 등등. 비록 우리가 네모난 밥통이라고 별명을 붙이며 툴툴거리던, 까다롭고 팍팍하고, 한번도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강사 선생님이셨지만 (지금은 국문과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신) 수업 시간의 그 열의는 나의 귀와 눈이 그분 얼굴로 집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표지도 예쁜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서 바로 그 국어시간이 떠올랐다. 콩쥐팥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심청전 등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옛이야기가 과연 옛이야기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후세에 어떤 계획된 의도와 목적때문에 변형되고 왜곡되었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아기돼지 삼형제, 빨간 모자 등의 서양의 옛이야기 역시 어디서 유래했으며 우리가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원래의 그 서양 옛이야기가 맞는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하면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1부는 우리 옛이야기, 2부는 서양 옛이야기,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중 몇 편을 골라 요약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데렐라와 닮은 꼴이 된 콩쥐팥쥐
원래 구전민담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콩쥐팥쥐의 결말은 지금 나와있는 콩쥐팥쥐 그림책에서 보여지는 것과 다르다. 어린이독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콩쥐의 죽음과 재생을 그린 결혼 후일담이 생략되어 있기에 어린이 독자는 옛사람들이 들려주는 콩쥐의 변모를 알 길이 없다. 옛사람들 이야기에서 콩쥐는 티없이 순진하고 나약했지만 죽음과 재생을 거치면서 침착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바뀐다.
2.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들어있는 옛이야기 그림책의 딜레마
'해와 달'은 단순한 민담이 아니라 음양의 조화와 천지인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 옛사람들의 무교적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민간신화로서, 힘들고 암울한 삶을 버티어나간 우리 옛사람들의 아픔과 지혜가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닌 보여주는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면서 민속적, 신화적 가치를 무시하고 잔혹한 화소들을 무조건 잘라낸 예가 여기저기서 보여진다. 어느 그림책에는 호랑이를 그리면서 우리 옛 그림 속 호랑이 모습을 살렸으면 좋았을 것을 낯선 서구 미술 기법으로 그려진 호랑이의 모습이 우리 옛이야기와 맞물려 등장할 뿐 아니라 서구 설화의 영향으로 각색이 되어 있다.
3. 그림책에서 사라진 무조신 바리공주와 그 어머니의 얼굴
여러 판본과 지역본으로 남아 있는 바리공주 이야기는 그림책으로 만들어지면서 편집자의 철저한 분석과 해석 없이 마구잡이로 편집되어,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 원래의 이야기가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와 교훈이 남아있지 않은 어설픈 이야기로 변형되었다.
4. 선녀의 슬픔과 나무꾼의 천상 시련을 외면한 그림책
우리가 어릴 때 선녀와 나뭇군 얘기를 처음 들으며 어떤 생각을 가졌던가. 4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알게 되었다. 일제 강점으로 왜곡.편향된 이야기가 바로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나무꾼과 선녀'라는 것을. 원래 우리의 구전설화 본은 지금의 '나무꾼승쳔형' 외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지금 그림책으로 나온 이야기에 보면 하나 같이'천상과 지상을 초월해 선녀와 나무꾼이 나누는 꿈결같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해석하여 편집되어 있다. 나무꾼을 마음씨 착한 인물로 단정 짓고 선녀가 결혼 생활에 행복을 느낀 것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선녀의 고통에는 무심하고, 나중에 아내와 자식들을 찾아 하늘나라로 올라간 나무꾼의 뒷이야기가 단축됨에 따라 거기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다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그림책'이라는 말로 그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5. 흥부가와 흥부전에 도깨비는 없다.
동생 흥부를 따라 박을 타자 거기서 금은 보화 대신에 쏟아져 나온 온갖 오물과 도깨비의 출현. 우리 모두 알고 있는 흥부이야기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 고전 흥부전에는 도깨비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능천낭, 상여꾼, 사당패, 장비 등이 나와서 놀부를 혼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모두 빠지고 도깨비가 등장하여 놀부를 혼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우리 나라 고유의 도깨비는 선, 악 어느 한편에 고정되어 있기 보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고, 무시무시한 존재라기 보다는 희극적인 요소가 들어있어 친근감 마저 들게 하는 도깨비인 것이다. 하지만 각색된 흥부전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악인을 두들겨 패기 위한 무서운 도깨비로서 우리 고유의 도깨비 속성을 단순하게 축소하고 우리 민중과의 관계를 왜곡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교과서와 전래동화 책 때문에 일본의 도깨비 '오니'가 대신 들어갔기 때문이다.
6.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심청전 그림책
오늘 날 초등학교 교과서의 심청전은 비판과 반론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 나라 옛이야기 속의 심청전의 결말은, 죽음과 물의 세계를 체험하고 바다의 연꽃에 실려 세상으로 돌아와, 어둠 속을 헤매는 많은 사람에게 빛을 가져다준 신성한 치유자이자 구원자로서 심청의 상을 그리고 있어서, 심청의 죽음과 부활이 심청전을 단순한 고전 소설 차원에서 벗어나 풍어를 기원하고 실명을 치유하는 심청굿으로 나아가게 하였건만, 이러한 세계관과 미학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비판의 논제로만 남은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
7.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 떠난 예술 여행, 까막 나라에서 온 삽사리
정 승각 글, 그림의 <까막나라에서 온 삽사리>는 저자가 새롭게 창조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외국 정서에 물들어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정서를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저자가 우리 옛이야기와 옛 그림에서 소재, 모티프, 기법을 따와 재창조한 이야기라고 한다. 저자가 하필 '삽사리'를 등장 시킨 이유는 일제 강점 시대에, 일본 개를 닮은 진돗개를 조선을 대표하는 개로 선정하고 진돗개와 닮지 않은 조선의 토종개들 (삽사리를 포함하여)을 대대적으로 도살하여 일본 군인들의 방한복 재료로 쓰기 위해 반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그가 그린 그림들이 고구려 고분 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것을 일일이 대조, 비교하여 보여주어 이 책이 지닌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그림책 분야에 정 승각과 같은 독행자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런 독행자의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날 수록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린 얼굴을 조금씩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8. 디즈니에 의해 일그러진 안데르센, 그리고 서양의 옛 이야기
서양의 옛이야기편에 계속 반복되면서 나오는 얘기는 디즈니 만화에 의해 서양의 옛이야기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그 영향은 꼭 서양의 어린이들에게만 해당될까?
취학 전부터 영어 녹음테이프로 서양 요정담을 듣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동화'하면 서양의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군다나 요즈음 부모들은 아이들이 영어 문장을 저절로 외울 수 있도록 반복적으로 들려주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라서도 서양 요정담은 유년기의 추억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기 쉽다. 하지만 영어 교재 반복학습이 아이들의 영어 실력을 키워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정서와 사고에 끼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도 적지 않다. (210쪽)
하얀 피부의 백설 공주, 검은 망토를 두른 계모 왕비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디즈니 만화의 백설공주 속에 담겨 있는 백인 우월 주의는 그림형제 본의 백설 공주에는 볼 수 없었던 것. 일곱 난장이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동안 집에 남아 열심히 쓸고 닦고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는 백설 공주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인어 공주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영혼 불멸의 꿈 대신, 자신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할 능력이 없어서 동물들과 능력있는 남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유약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는 디즈니 만화 <인어공주>.
비록 더 오래 전의 민담을 기초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림 형제가 만든 <빨간 모자>의 결말은 잔혹하다. 이것이 프랑스의 귀족 작가 뻬로에 의해 변형이 되었고, 요즘 나와 있는 <빨간 모자>는 이것 저것 뒤섞인 가운데 누구의 원작을 기초로 했는지조차 제대로 표기 안 한 책들도 있다. 낯선 존재의 위험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빨간 모자 소녀 이야기가 있는 반면, 낯선 남자와 터무니 없는 거래를 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하늘에 올라가는 모험 끝에 지상으로 돌아와 풍족하게 사는 <잭과 콩나무>의 잭 소년이 있다.
지금도 여러 가지 시각으로 다양하게 읽히는 <헨젤과 그레텔>에서 주목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레텔. 오빠 뒤만 따라다니며 연약하기만 했던 소녀가 위기 상황을 경험하면서 용기를 갖춘 독립적이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눈여겨 본 적이 있는지 (오리를 혼자 타고 강을 건너는 그레텔).
저자가 극찬을 하며 이 책의 마지막에 실은 앤서니 브라운의 <터널>을 나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의 설명으로도 그가 왜 유명한 작가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의 한줄 한줄을 쓰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힘들게 노력하였을까 생각하니 존경스럽기만 하다. 우리 나라가 아닌 타국에서 소설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우리 옛이야기, 우리 어린이 책으로 돌려, 분석과 비판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발전을 위한 조언을 건낼 수 있었기에 더 존경스럽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들. 참 쉽게 쓰여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한 페이지 마다 저자의 땀방울과 의지가 보이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서도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 좋은 책 선물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