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눈 앞에 있고 내 손에 쥐고 있는 책인데 알라딘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페이퍼로 리뷰를 대신한다.
1947년생 작가 이 덕자. 이 소설은 그녀가 1979년에 썼고 1980년에 출판되었는데, 내가 중학교때 읽었는지 고등학교때 읽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전 미국으로 도미하였고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얼마전 신문에서 우연히 이 작가의 투병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세상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이 소설을 읽은 후로 무엇에 혹했는지 그녀의 소설은 다 찾아서 읽었던 오래 전 기억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햇귀>가 그녀의 첫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읽은 것으로는 첫 소설. 거의 삼십 년 전에 읽은 그 소설을 문득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인터넷 서점마다 다 검색을 해보았다. 그러나 파는 곳이 없다. 결국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중고서점 사이트에서 겨우 찾아내었고 주문한지 며칠 안되어 도착한 이 책은 정말 요즘은 구경도 하기 힘든 인쇄본, 얼룩얼룩한 종이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마치 그 동안 흐른 세월이 형체화되어 있는 듯하여 반갑고도 쓸쓸했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 열일곱살 소년 성노. 의사인 아빠는 미국에서 다시 의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힘든 의학 공부, 실습 과정을 해야했고 그러는 동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엄마는 일을 해야했다. 성노 또한 안통하는 언어로 몸과 마음이 시달려야 하는 동안 터울 많은 동생 두노도 태어났다. 가족 모두 좀 적응이 되어간다 싶을 때 성노의 엄마와 아빠는 별거에 들어간다. 자꾸만 벌어지는 틈을 어쩔 수 없어 이혼을 하기 앞서 1년 시험 별거에 들어가게 된것. 성노와 동생 두노는 엄마와 함께 살고 가끔 아빠가 사는 곳을 방문하는 식으로 지낸다. 열일곱이라는 나이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날이 선 시기인가. 그런데 이 소설 속 성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소년이다. 어른들에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고 주장하고 요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 일을 어떡하든 이해하고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사려깊은 아이이다.
이 소설을 쓸 무렵 작가 역시 미국으로 도미한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던 만큼 그녀의 목소리가 소년 성노를 통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책 여기 저기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아니겠나.
마가렛 미드 여사가 말하기를 여성이 진실로 해방하고 싶으면 자기 손으로 자기가 먹을 빵을 벌라고 하였어요. (125쪽)
외롭다는 것은 유령이야. 곧 사라지지. 그러나 그것한테 약점을 잡히면 큰일 나.
바로 위의 문장을 보자마자 머리에 불이 반짝 하고 들어왔다. 이 책을 처음 읽던 삼십 몇년 전에 바로 저 문장을 노트에 베껴 적었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 노트를 찾아야하는데...)
모든 고난이 그에게로 와 그를 못 살게 굴었다. 그러나 끝내 고난은 그를 넘어뜨리지를 못하였다. (248쪽)
외로움과 고난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영원하진 않을 거라는 것, 그러니 잘 견뎌내야하고, 나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리라는 각오. 작가 역시 그렇게 그녀의 젊은 한때를 이 악물고 버텨나갔겠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 나 역시 책 속의 성노 같은 나이였고, 내가 좋아하던 아이가 성노네 가족처럼 미국으로 가버린 후였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내 성격이 밝고 구김없는 아이보다는 외로움과 고난을 혼자 삭여가는 성노 같은 아이에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책을, 저자를 마음에 들어한데는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삼십년도 더 지나 다시 읽어보니, 어딘지 매끄럽지 못하고 작위적인 구성이라는 느낌, 이야기의 전개가 산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열심히, 진심을 다해 썼다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니 나는 이 책의 흠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햇귀'-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
아래 두 사진은 책뒷장의 광고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