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한겨레신문 토요일자 책과 생각 머리기사에 지리학자의 책이 나왔다. 작년부터 기대하고 하고 있던 책 중에 하나였는데, 드디어 나왔다. 생각보다 분량은 상당히 많다.(700페이지 가량이다) 내 개인적으로 성찰적인 내용의, 단기간에 나올 수 없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른 페이지에도 섰지만 최영준 교수의 이 책을 소로의 '월든'에 비유하던데 뭐 아직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책 광고를 위한 이런 단순 비교는 별로라 생각된다. 파급력이나 내용적 측면에서 솔직히 이 책을 어찌 '월든'에 비유할수 있겠냐마는, 어찌보면 오히려 서양의 것에 무조건 비교하고 관련짓는 것보다는 최영준 교수의 '홍천강변...'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무게를 인정해주는 게 더 좋다고 생각된다. 최영준 교수의 책과 소로의 책 두권 그리고 갑자기 이와 관련되어 갑자기 생각나는 데이비드 마시의 인간과 자연도 같이 스크랩한다. 마시의 인간과 자연도 상당히 유명한 책인데 아직 잘 알려진 것 같지는 않다. 번역을 최영준 교수와 같은 고려대의 홍금수 교수가 번역했다. 3년 전에 사서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혹은 그때 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인지 60페이지 정도 읽다가 말았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읽어야 겠다.

       

 

    

 

한겨레신문 2010.7.31  어느 지식인 부부의 ‘귀농 20년’ 일기장  

최영준 교수의 ‘시골 생활 분투기’ 700쪽 분량에 파란만장 일화 생생
‘어두운 손’ 행패 일삼는 농촌현실 진정한 촌사람 돼가는 모습 ‘감동’  


 

‘홍천강변에서 20년’. 지난해 8월에 나온 인문학 무크지 <담론과 성찰> 창간호에 실린 이런 좀 낯설어 보이는 제목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또 몹시 심란해했다. ‘어느 지리학자의 주경야독 농촌생활기’라는 부제가 붙은 그 글의 주인공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은 간결하고 담백한 듯하면서도 오늘날 우리들의 삶,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명 어디가 어떻게 병들어 곪아가고 있는지를 산골 오지의 생활이라는 아주 색다른 풍경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번에 최영준 교수의 글이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이라는, 700쪽에 가까운 두터운 책으로 묶여 나온 데는 무크지에 실린 그 글이 주었던 감동이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유학까지 다녀온 서울 유명 대학의 잘나가던 교수가 20년 전 49살 나이에 “현대식 개발과 도시화의 파고를 겪지 않을 곳, 아니면 가장 늦게 그러한 변화를 겪게 될 후보지”를 물색한 끝에 찾아낸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통곡리(산수리)의 포장도로도 없는 홍천강변 오지 논골마을 외딴집에 ‘주경야독’하러 들어간다.

무크지의 그 글은 그 ‘돈 안 되는’ 거사를 결행하게 된 경위와 월~금요일엔 서울에서 강의하고 금~일요일엔 논골마을에서 낮엔 농사일하고 밤엔 읽고 쓰는 20년 세월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성장주의와 도시 소비문명에 길들여진 자들이 그 오지까지 침투해 어떻게 그 청정무구의 자연세계를 파괴하고 농락하는지, 전문지식과 특유의 감성으로 무장한 점잖은 중·노년 학자의 시선으로 드러낸다. 글의 감동은 그렇게 찾아들어간 세계의 청정무구가 주는 기쁨과 그것이 돈과 재미에 골몰한 외부 침입자들의 행패로 유린당해가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빚어내는 바로 그 선명한 대조 때문에 배가되는데, 읽는 독자들이 분개할 만한 침입자들의 패악질을 지은이는 오히려 담담하게 때로는 동정과 이해까지 표시하며 그려나간다. 이 부분이 정치적 편견과 요란한 직설이 난무하는 흔해빠진 고발문들과는 다른 점이고 또 강점이다.

청정한 경승지라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 승용차를 모는 도회인들이 몰려들어 그렇지 않아도 좁은 외길을 막거나 홍천강 물속까지 밀고들어가면서, “우리 민족이 아직도 수렵채취경제생활을 영위했던 중석기시대 원시인의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과잉영양의 맛난 먹을거리들이 넘쳐나는데도 온갖 도구를 동원해 물고기, 다슬기의 씨를 말리고 야생동물을 밀렵하고 떼지어 찾아오는 청둥오리 가족들을 향해 엽총을 난사하고 오디오기계로 떠들어대고 쓰레기 투기로 자연이 몸살을 앓게 한다. 봉고차를 대기시켜 놓고 남의 집 연못 수련을 뿌리째 훑어가고 야산에 심어놓은 더덕과 미삼, 할미꽃 등 야생초, 토종밤, 두릅을 싹쓸이해간다. 도시인들의 기호에 맞춘 알량한 돈벌이를 위해 그들은 남의 집 자물쇠까지 부수고 들어가 패물과 현판, 가구, 돌확, 토기들을 빼내가고 농산물 판매대금까지 훔쳐간다.  



지은이가 사랑해 마지않는 땅들이 돈을 위한 막개발로 파괴당하고 결국 오지까지 포장대로가 들어서자 도회로 떠난 자들이 값 오른 땅 소유권을 주장하며 하나둘 나타나고 리조트 건설로 강물은 오염되며 농민들은 제초제와 비닐과 돈에 물들어간다. 그런 묘사들은 최 교수의 20년 파란만장한 체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은 보여준다.

무크지 글과는 달리 책은 일기체로 돼 있다. 지은이가 홍천강변으로 들어간 1990년 4월부터 2009년 12월26일까지 주로 논골마을에서 쓴 일기들을 추려 만든 책의 무게중심은 그 일부를 요약정리한 무크지 글과는 달리 지은이가 주로 노인들만 남은 현지인들에게 ‘주말에나 찾아오는 서울 젊은이’로 비치다가 점점 본격적인 농사꾼이 되고 정년퇴임 뒤엔 아예 거주지 이전까지 한 뒤 현지 농협 조합원 자격을 얻어 어느새 논골 원로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맞춰져 있다.

폐허로 변한 집을 인수해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거기에 딸린 논밭들을 지렁이와 미생물, 그리고 그들을 먹이로 삼는 곤충과 동물들이 함께 번창하는 무공해 유기농 옥토로 바꾸고 이웃들과도 소통하며 흔들림없이 자신의 세계를 착착 확장해가는 과정의 고투와 성취, 깨침과 보람이 그날그날의 일기에 별다른 꾸밈 없이 사실 위주로 담겨 있다. 그럼에도 깨끗이 맨 땅에 그다음 주에 가보면 또다시 무성해지는 잡초들과 사투를 벌이고 되풀이되는 홍수와 가뭄, 외부 침입자들에 시달리면서도 도예가로 역시 대학교수인 부인과 본업인 학문활동을 병행하면서 호흡을 맞춰 서로를 다독이며 결코 낙담하지 않고 한발한발 전진하는 모습은 사실의 산만한 나열이 아니라 줄거리를 지닌 한 편의 소설처럼 읽힌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들 부부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남다른 이해는 20년의 세월 동안 점점 더 깊어지고 풍부해지는 발전적 궤적을 그린다. 그림솜씨도 그렇지만 만만찮은 문학적 자질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균형감각도 거기에 기여했다.

외부인의 행패, 그들이 대변하는 우리 일상적 삶의 어두운 그림자, 신자유주의 문명의 우울한 전망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이런 낙관과 성취, 균형감각과 절제가 저변에 일관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휴식처·재충전지로서의 전원생활을 그리는 도시인이 아니라 아직 전업농은 못 되지만 점점 거기에 근접해가는 농경인 쪽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 기력이 다할 때까지 땅과 함께하는 생활은 계속될 것이며 나는 하루하루 진정한 촌사람으로 변해 갈 것이다.” 이 책이 전망 없는 자본주의 도시문명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들의 단순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대안 문명을 추구하는 또 하나의 진지한 탐구로 읽힐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탐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록 최근에 정년퇴임했지만 부부 모두 대학교수라는, 한국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소득과 안정성을 지닌 ‘사회적 신분’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그들의 산골 오지 정착에 분명히 큰 장점으로 작용했겠지만 그게 그런 식의 대안적 삶 모색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가에는 약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돈과 신분’ 없이 그런 식의 시도를 해보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최영준 교수 부부의 시도가 그 자체로 더없이 성실하고 진지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가장 확실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ps : 위에 있는 수채화가 최영준 교수가 그린 그림인가보다. 정말 멋있다. 그림까지...얼마전에 헌책방에서 책을 보다가 구입한 책이 '원제무의 도시문화 오딧세이'이다. 어찌보면 뭐 흔하디 흔한 도시 여행기(그래도 저자가 도시공학자이다)이지만 나에게 이 책이 확 땡긴점은 책 곳곳에 있는 수채화이다. 사진이 아닌 수채화. 저자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그린 수채화가 수록되어있는 것이다. 어찌나 멋있던지. 오히려 사진보다 더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고 해야할까. 한번 읽어볼만하다. 그림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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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신문기사는 좀 된 기사이다. 한길사에서 작년 8월에 낸 담론과 성찰이라고 하는 일년에 한권씩 나오는 무크지에 최영준 교수의 농촌생활기가 한편 나와있는데, 그것에 관한 내용같다. 난 개인적으로 최영준 교수를 본 적도 없고 강의를 들은 적도 없지만, 간접적으로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씨가 낸 '책의 공화국에서'와 '담론과 성찰'에서 각각 김언호 대표의 최영준 교수에 대한 글과 최영준 교수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때도 책이 나온다길래 상당히 기대했었는데, 재미있을 듯 하다. 분량을 보니 600페이지가 넘는다. 읽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릴듯 하다. 출판사의 소개 글에는 거창하게(?) 소로의 '월든'에 버금가는 자연에 대한 예찬과 현대 기계문명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책이라고 소개가 되어있다. 뭐 어찌 소로의 '월든'에 버금(?)가기까지야 하겠냐마는 최소한 '한국의 월든'이라 소개될만할 것 같다.

   

 

한국일보 2010.4.22 농촌생활 20년…진짜 농사꾼 된 고려대 명예교수 최영준 

"귀농 쉽게들 말하지만 기본기에만 10년 걸립디다" 

농촌에 들어가 살겠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하는 이가 많지 않고, 그렇게 농촌으로 들어갔다가 후회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영준(69)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착 과정은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만하다.

최 교수는 철저한 준비와 남다른 부지런함, 이웃과 잘 지내려는 겸손한 자세 등으로 이제 진짜 농사꾼이 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지난해 발간된 부정기간행물 '담론과 성찰'에 '홍천강변에서 20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했으며 독자의 반응이 좋자 조만간 그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발행할 계획이다.

최 교수는, 번잡한 것은 싫어하고 자연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만 했으니 원래는 농사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이 된 1989년 어느 날, 자신의 조상 가운데 그 나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농촌으로 들어간 계기가 됐다. 당시 고려대 지리교육학과에 재직 중이던 최 교수는 마흔 아홉 이후의 삶은 덤으로 얻은 것이니, 조용한 곳에 들어가 욕심은 버리고 공부한 것은 다듬으며 살겠다고 마음을 정한다. 대학가가 시위로 어수선했고 일부 학생은 학생운동을 이유로 그와 학점 협상을 하려 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던 때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고 지금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산수리 홍천강변의 외딴 집에 은거지를 마련했다. 대한제국 말년 경복궁에서 참봉벼슬을 하던 사람이 낙향해 지은 집으로 한동안 서당으로 쓰였으니 낡기는 했어도 기품은 있었다. 그러나 집이 있는 동네는 길도, 다리도 없는 강변마을로 개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궁벽한 오지였다. 그런 그를 두고 "장래성 없는 곳에 아까운 돈을 쓸어 넣었다"거나 "아직 한창인데 너무 일찍 은퇴 준비를 하는 것 아니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후 2년 반에 걸쳐 비포장 농로와 고갯길을 걷고 작은 배로 강을 건너며 솥, 밥상, 식량, 침구 등을 직접 날랐다. 처음 7년 동안은 전화도 없었으니 문명과도 떨어져 지냈다. 손목이 부러지고 말벌에 쏘이는 등 다치는 일이 많았는데 병원과 거리가 멀어 발을 동동거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완전한 도시 탈출은 어려웠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보내고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주말과, 방학에는 홍천강변에서 지내는 이중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차 농사꾼으로 변해갔다.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농사법을 배웠다. 눈으로 보고 따라 하고, 설명을 듣기도 했다. 그 스스로 밝힌 것처럼 농촌 생활의 첫 10년은 마을 어른들로부터 기본적인 농사일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농사 짓는 일을 일기로 남겨 다음에 농사를 지을 때 활용하기도 했다. 차차 농사 일이 손에 익었다. 냄새가 고약한 퇴비도 왕겨, 음식물찌꺼기, 낙엽 등을 섞어 발효해 만들기에 이르렀다. 처음 퇴비를 만들 때는 오줌 한 방울도 버리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지저분하다고 하는 것들이 농촌에서는 다 소중한 거름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해서 최 교수는 벼 농사를 손수 짓고 마늘, 고구마, 옥수수, 당근, 땅콩, 오이, 호박, 고추 등 30여종의 작물을 재배하기에 이르렀다. 순무, 토란 등 그 지역에 없던 작물은 시험재배까지 했다.

도시 사람이 왔다며 경계하던 주민들은 한 동안 지켜본 뒤 부지런하고 인사 잘하는 그를 비로소 마을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자동차가 구덩이에 빠지면 경운기로 끌어주고, 인근 제방에 벚나무를 심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농업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수가 작용한다. 건너 숲에 사는 고라니가 홍천강을 헤엄쳐와, 그가 애써 가꾼 무, 배추, 콩을 따먹었으며 사과와 배는 지금도 4분의 3이 까치 몫이다. 자두나무 등은 두더지가 뿌리와 밑둥을 갉아 먹어 고사하기도 했다. 다람쥐와 토끼는 집 마당으로 들어와 땅콩을 까먹었다.

동물은 그래도 살기 위해 한 짓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태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이 험한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집에 몇 차례 도둑이 들었다. 고가품은 아니지만 집안 살림과, 애써 기른 고추와 배추 등을 갖고 달아났다. 집에서 가꾼 수련과 튤립도 훔쳐갔고 마을에 있는 붓꽃, 할미꽃도 쓸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멋진 경치가 알려지고 관광객이 몰리면서 쓰레기가 쌓이고 물고기와 다슬기가 사라졌다.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씩 바뀌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비가 내릴 지, 냉해가 올 지 등이 중요하지만 TV의 일기예보는 나들이 하기에 좋다거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식으로 도시인 중심으로 나오니 서운할 때가 많다. 쌀 수입에 따른 적극적인 대책이 부족하고, 불량 종묘가 많아졌으며, 양수기 등이 필요한 때에 공급되지 않는 것 등도 그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느낀 문제점들이다. 그는 "만약 서울에서 교수로만 있었으면 이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대체로 농촌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열심히 일을 하면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골치 아픈 일을 잊을 수 있으며 남과 부대낄 이유도 없다. 그러니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 집중이 잘 돼 이곳에서 논문도 쓰고 책도 냈다. <한국의 짚가리>와 <국토와 민족생활상>에는 그가 이곳 농촌에서 일한 경험과, 근처 마을에서 촬영한 사진 등이 들어있다. 불문학자인 장인 손우성 선생의 여행 경험을 <손우성의 유럽여행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낸 것도 이곳에 와서다.

2008년에는 주민등록까지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농사꾼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최 교수가 주소지를 옮기자 주민들은 그가 진정한 농촌 사람이 됐다고 환영했다. 물론 서울에는 아직 집과 서재가 있으며 2007년 2월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된 뒤로도 문화재위원회 회의 참석 등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에 간다. 그렇지만 그는 농사꾼의 삶이 좋으며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최 교수는 논 300여평, 밭 700여평, 과수원 400여평 등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기르는데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부인 손정리(68)씨와 둘이서 감당하기에는 꽤 규모가 크다. 그렇게 수확한 작물을 지인에게 나눠주는 게 그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지난해에는 40~50㎏짜리 15자루 분량의 쌀을 거뒀는데 최 교수에게 필요한 6자루 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아는 사람에게 주었다. 아내의 대학 제자들이 와서 땅콩을 수확하고 가져갔는데 그때도 참 흐뭇했다.

농사꾼으로서 스스로에게 몇 점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50점"이라고 대답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농사를 다 지을 수 있는 진짜 농사꾼이 됐다. 그의 굵은 팔뚝과 손톱 밑에 낀 얼룩이 그것을 증명한다. 
 


최영준이 말하는 농촌 정착 하기
"과거는 다 잊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갖고 있던 직업, 도시에서 받았던 대우 등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최영준 교수는 농촌에 잘 정착하려면 먼저 도시적 사고와 단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와 농촌은 생활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농촌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적인 오락과 취미를 버리고 자연의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 도시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거나 외로워해서도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의 관계다. 농촌 주민들은, 비록 서울 사람보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울 지 몰라도 자존심만은 무척 강하다. 그래서 도시 사람이 들어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과시하면 결코 예쁘게 받아주지 않는다. 반면 겸손하고 묵묵히 일하면 어느덧 다가와 친절하게 맞아준다. 꼭 그것이 아니라도 농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잘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잔치를 여는 등 공연한 돈 자랑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농사 등과 관련한 지식과, 오랜 세월을 살며 터득한 지혜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최 교수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중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와 근면성"이라고 강조했다. 
 

ps : 중간에 나오는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씩 바뀌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비가 내릴 지, 냉해가 올 지 등이 중요하지만 TV의 일기예보는 나들이 하기에 좋다거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식으로 도시인 중심으로 나오니 서운할 때가 많다." ... "만약 서울에서 교수로만 있었으면 이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것"이라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특히 일기예보에 관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도시, 도시민들 중심으로 짜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주위에 대한 타인에 대한 나 자신의 일과 관계없는 부분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최영준 교수가 서울에서 교수생활만 했다면 이런 부분들에 대한 문제를 몰랐을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현대인의 성찰성의 부족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먹고살기 바뻐서일수도 있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때로는 내일이 아닌 것에 관심 가져보고 참견해보는 것도 재미다면 재미일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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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고에서 철학교사를 하고 있는 안광복 선생님이 책을 썼는데, 제목이 너무 맘에 든다. 물론 내용도..."지리시간에 철학하기"...어떻게 보면 "철학시간에 지리하기"일것 같은데, 하여튼 나중에는 내가 철학시간에 지리하기란 책을 냈으면 좋겠다. ㅋㅋㅋ 책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둔다. 아울러 한겨레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기사 중에 지정학과 관련된 기사 하나도 스크랩한다.(안광복 선생님은 지리적에 대해 조금 관심이 있으신가보다...)

 

한겨레신문 201.7.23 살고 밟는 곳엔 다 이유가 있다네 
 

도시와 길·민족·종교·환경 등…
철학 교사가 쉽게 쓴 생활지리 

 

» 살고 밟는 곳엔 다 이유가 있다네

지하철은 과연 ‘서민의 발’일까? 출퇴근길을 재촉하는 수많은 이용객을 보면 틀린 얘기 같진 않다. 서울과 경기, 인천을 합쳐 2천만명가량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일 수 있는 것도 소중한 ‘서민의 발’ 덕분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지하철은 ‘부자의 손’이 되기도 한다. 일단 지하철이 생기면 교통 체증이나 주차 부담이 확 줄어든다.

애매모호했던 중심지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확실해진다. 역 부근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도심의 높낮이는 역을 중심으로 마치 물결치듯 형성된다. 자연스레 도시의 땅값과 집값이 올라가고, 수천만명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할 수도 있다. 서울의 주택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르는 게 ‘서민의 발’ 지하철 탓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리 시간에 철학 하기>는 우리가 생활하는 집과 도시, 그리고 길을 꿰뚫는다. 그 바탕엔 철학과 역사가 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바라봤거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곱씹어보고 뒤집어본다. 현직 고교 철학 교사답게 저자는 쉽지 않은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아파트에 대한 분석도 눈길을 끈다. 한국인은 왜 아파트에 열광하는가? 좁은 땅덩어리 때문에? 돈 좀 있는 사람들도 단독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걸 보면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싶다.

저자는 이유를 역사적 흐름에서 찾는다. 아파트는 우리의 전통 가옥과 비슷한 면이 많다. 신발을 벗고 현관보다 조금 높이 올라서야 하고, 바닥은 온돌로 데워진다. 거실이 옛 한옥의 마루처럼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 방, 화장실이 배치돼 있다. 장독대와 화분을 따로 놓을 수 있도록 발코니는 앞뒤로 있다. 외국에서 아파트먼트란 이름으로, 주로 서민들의 거주지인 아파트가 한국에 와서 환골탈태한 것이다. 아파트 단지도 옛 마을을 닮았다. 학교, 상가, 놀이터, 노인정 등 단지 안에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다. 서당과 노인정, 구멍가게 등이 있는 옛 마을처럼.

저자의 분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익숙한 구조에 편리함과 안전함까지 갖췄으니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가? 비록 아파트가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통해 히트상품이 됐지만 거기엔 자신이 사는 집에 대한 애착과 살가움이 없다. 재건축을 통해 몸값을 높이고, 언제든 비싼 값에 팔릴 태세를 하고 있는 서글픈 집이기도 하다. 더불어 주민들이 사는 곳에 집착하지 않게 함으로써 한국인에게는 드문 유목민적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지하철과 아파트 말고도 민족, 종교, 환경 등 다양한 지리적 주제를 철학과 연결시켜 여러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한겨레신문 2010.7.26
[난이도 수준-고2~고3]


44.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이유는-지정학자의 눈에 비친 세상 

아르헨티나의 어린이들은 누구나 말비나스 섬을 그릴 줄 안다. 학교에서는 이 섬을 ‘잃어버린 어린 자매들’이라고 가르친단다. 반드시 이 섬을 되찾아야 한다는 결심이 담긴 표현이라 하겠다. 심지어 일기예보 지도에서도 말비나스를 이루는 두 개의 땅덩어리는 꼭 들어 있다. 말비나스는 도대체 어떤 섬일까?

말비나스는 영국 사람들이 ‘포클랜드 제도’라 부르는 섬이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이 섬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작디작은 이 섬에는 변변한 자원도 없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와 영국에게 이 섬의 가치는 아주 크다.

사람들은 땅을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기곤 한다. 특히, 누구 땅인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지역은 더욱 그렇다. 댜오위타이 군도(센카쿠 열도)를 놓고 벌이는 중국과 일본의 신경전에도 섬의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지정학(Geopolitics)은 이처럼 땅을 놓고 벌이는 갈등에 눈을 돌린다. 지정학에 따르면, 국가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늘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다른 나라와 부딪힐 수밖에 없겠다. 힘세면 살고 약하면 먹힌다. 히틀러는 ‘지정학 연구소’를 따로 두었단다. 그곳에서 지리학자들은 독일의 생존공간(Lebensraum)을 넓히기 위해 머리를 싸매곤 했다. 히틀러는 지도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1차 세계대전으로 쪼그라든 독일의 모습을 지도로 보여주었다. 그러곤 ‘대(大)독일지도’를 당시의 독일 영토와 견주곤 했다. 대독일지도에는 독일 말을 쓰는 모든 지역을 ‘독일’로 그려 놓았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아우르는 넓은 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독일의 모습에 가슴 뭉클해했다.

지리학자 클라우스 도드는 땅의 모습은 애국심을 키우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사실,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일 뿐이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부모 형제처럼 살가워야 할 까닭이 뭐가 있겠는가? 부자 나라에도 지지리 궁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국가가 잘나간다 해서 나까지 꼭 행복하리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왜 국민들은 자신보다 국가를 더 위하고 앞세워야 하는가?

이 물음에 ‘국토’는 대답을 눈으로 보여준다. 떠돌던 이스라엘인들은 잃어버린 가나안 땅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수천 년을 버텼다.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처럼 뭉칠 수 있을까?

나아가, 지정학은 살아남으려면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많은 땅을 차지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심지어 어디를 집어삼키라고 꼭 짚어 일러주기까지 한다. 히틀러는 소련 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시 지정학자들은 동유럽과 소련의 땅이 세상의 심장부(heartland)라고 주장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의 중심인 까닭이다. 이곳을 차지하고 철도를 놓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바다에서 힘을 쓰던 영국 같은 나라는 힘을 잃게 될 테다. 히틀러가 소련과 목숨 걸고 싸웠던 데는 지정학자들의 주장이 큰 몫을 했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겨루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정학자들은 북극을 가운데 놓은 지도를 널리 퍼뜨렸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지도에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다. 이 지도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북극을 중심에 놓으면 미국과 소련은 바싹 붙어 보인다. 게다가 군인들은 지도에 차곡차곡 원까지 그려놓았다. 원은 소련에서 쏜 미사일이 미치는 거리를 나타내었다. 지도만 보고도 소름 돋을 일이었다. 

지정학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지에 따라 세상의 모습을 다르게 나타낸다. 그렇다면 테러가 끊이지 않는 지금의 세계는 어떨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우리 시대의 갈등은 ‘문화’를 놓고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를 중화(중국), 일본, 힌두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라는 8개 문명으로 나눈다. 각각의 문명이 맞닿는 곳은 바람 잘 날이 없다. 문명끼리의 충돌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테다. ‘이슬람 성전을 지어야 할지, 힌두교 신전을 지어야 할지는 두 건물 모두를 지어도,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아도, 또는 이슬람과 힌두교를 적당히 합친 건물을 짓는다 해도 풀리지 않는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을 따르는 파키스탄의 오랜 다툼을 보면 헌팅턴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싶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부딪히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정학의 잣대는 언제나 편견이 될 수 있다. 클라우스 도드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80%는 여권이 없단다. 게다가 미국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라 밖 문제에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지정학적 판단은 편견만 심어 줄 뿐이다.

히틀러가 무너진 후, 지정학은 학자들 세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사람들을 속이는 ‘사이비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말이다. 세상살이는 단순하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이론은 우리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듯이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한 해결책은 늘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세상살이는 명쾌한 해법보다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 

 
 

ps : 시의적절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위 글 중에서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이론을 우리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란 글은 나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 그런 부류의 글과 '선동'에 대한 나름의 나 자신의 논리와 설득력을 가져야 겠다는 전투력이 생긴다. 남은 방학기간동안에 독서 좀 더 해야겠다. 고등학교때 문명의 충돌을 산거 같은데 아직 완독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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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 낮술, 개미

2010.7.22 점심. 짜장면과 밥(정확히는 쌀) 사이에서 점심을 고민하던 난, 밀가루보다 나의 몸에 조금이라도 밥(아니 쌀)이 더 좋을거라는 착각(?)을 하며 경복궁역에 있는 국밥집으로 행했다. 버스를 타고(이 날 날씨가 너무 더웠다, 평소에는 걸어가는데) 버스에서 내리면서 환승에 소요되는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시계의 타이머 스위치도 누르는 여유를 보이며...국밥집은 언제 먹어도 맛 있고 느낌은 푸근하다. 비단 이 국밥집의 국밥 가격(3000원이다) 때문만은 아니다. 어눌하고 어수룩한 그 분위기가 난 좋다. 그리고 그 집의 최고의 매력(아마도 나에게만 해당)은 소주 반 병을 판다는 사실이다. 근데 예전엔 소주 반 병에 천원이었는데, 계산하면서 보니 천오백원이었다. 내가 국밥에 들어가는 파를 많이 먹었다고 오백원 더 받은건지...하여튼 살짝 빈정이 상했다.(난 솔직히 이런 사소한 부분에 불쑥불쑥 빈정이 상하곤 한다) 하지만, 밥 먹은 후 커피 한 잔 먹을까 고민하는 찰나. 커피값은 삼천원 사천원 고민하지 않으며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사랑하는 소주 값 오백원(오만원도 아니다) 때문에 고민하고 빈정당한 내 자신이 너무 옹졸하고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그랬다.  

시계를 보니 환승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오니 졸업생을 만났다. 너무 경황이 없고 소주 한잔에 알딸딸한 상태여서 조금 민망했다. 근데 아무리 그 놈아 이름을 생각해보려 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조용한 놈아도 아이었는데, 참 나도 사람 이름 기억하지 못하는거 일종의 병 같기도 하다.(솔직히 기억력과 내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버스에 탄 난 시청에 내리기 얼마 전, 오른 새끼손가락쪽에 '개미' 한 마리가 꼼지락꼼지락 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난 이 '개미'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이 '개미'를 관찰해 보았다. 그러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생각났다. 물론 개미란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그러나 책은 가지고 있다,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난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만나보았다. 악수도 했다. ㅋㅋ 하여튼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개미를 관찰하며 개미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나도 열심히 나의 '개미'를 관찰했다. 근데 개미를 곰곰히 보니 왠지 바닥으로 밑으로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밑으로 밑으로 가려 하는 듯 했다. 물론 내가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는 바람에 개미가 원하는데로 가지는 못했지만. 난 순간 이 '개미'도 안정을 원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예전 같았으면 손가락을 튕겨 "이거 뭐야"하고 허공으로 개미를 날렸을 텐데...소주(낮술)의 힘으로 생각지 못한 '개미'로 인한 정신 노동을 좀 했다. 그리고 손가락 노동도 하고. 하여튼 낮술은 참 좋다!! 국밥도 좋다!! 개미는 글쎄...

ps : '개미'를 살려주려(?) 난 버스에 내려 개미에게 안정적으로 생각되는 대로변 은행나무로 개미를 옮겨주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구)삼성본관 주변 은행나무가 개미에게 살만한 안정적인 곳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든다.
ps2 :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남자는 천편일률적인 양복에 여자들은 양장을 입고 다들 목에는 길다란 신분과시용 명찰을 매고 점심을 먹고 혹은 먹은 후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 틈새에 껴서 메모지도 없어 신문 여백에다 글씨를 끄적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 엄청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내 와이프는 나보고 자뻑 맛에 산다고 하더라...) 뭔가 글을 쓴다는데 이런 재미인가 보다.    

ps3 : 끄적거렸던 잡지이다. 재미있어서 스캔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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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내가 원하는 글이다. 탁월한 선견지명과 현실 분석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름의 유희적인 성격도 띄고 있는. 나는 언제나 이런 글을 흉내나 낼수 있을까나? ㅠ.ㅠ 

 

노무현의 선견지명, 보수를 재구성하라 

세종시 수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세종시 법안 원안은 참여정부 시절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에는 원안에 찬성하고 사업을 지속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약속했으나, 취임 후 표변해 이러저런 이유를 들어 세종시 원안을 공공연히 거부하기 시작했다.

통과 당시 한나라당이 찬성한 세종시 법안을 한나라당 출신 대통령이 거부한 속사정은 알 길 없지만, 한 가지 객관적 사실은 세종시 법 원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을 때 한나라당의 대표가 박근혜 의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 법안을 반대하고 수정안을 제출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의 결정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뜻도 있으니, 한나라당 내 박근혜계 반발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상임위원회에서 부결된 수정안을 기어이 국회 본회의 표결로 가져갔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의원과 한나라당 내 박근혜계 의원의 합세로 수정안은 105 대 164로 부결되었다. 민감한 정치적 문제에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만은 예외적으로 단호한 태도를 밝혔다. 이번에도 표결에 앞서 굳이 발언을 자청해 수정안에 대한 자신의 반대 입장을 한 번 더 분명히 했다. 지난번 지방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표현되었고, 박근혜계 반대로 통과되지 않을 것이 뻔한 표 대결을 이명박 대통령이 어쩌자고 끝까지 밀고 갔는지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다. ("차마 이럴줄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뻔히 보이는 결과였기에, 다른 수가 있거니 생각한다. 제발 좀 현명한 수이기를...)


▲ <데칼코마니>, 1966-르네 마그리트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로써 한나라당 내에서 누가 이 대통령 편이고 누가 박근혜 의원 편인지 확연히 드러났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든 2012년 총선 공천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이것을 위해 기어이 누가 누구의 편인지 확인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나라당 내에서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박근혜를 따르는 사람보다 배가 된다는 사실에만 만족해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직 모르는 것이니, 그에겐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971년의 일이다. 당시 공화당은 크게 세 계파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하나는 5·16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출신으로서 박정희 직계, 다른 하나는 같은 군인 출신이라도 김종필계, 그리고 민간인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당시 총리는 김종필이었는데 야당인 신민당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을 비롯해 몇몇 장관의 해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적이 있다. 공화당은 국회 다수당이었으므로 해임동의안은 단지 정치적 공세일 뿐 실제로 통과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상대로 다른 두 장관에 대한 해임동의안은 부결되었으나,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동의안은 통과되었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김성곤 재정위원장을 비롯한 민간인 출신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집단적으로 해임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표결 결과를 보고받고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노해 찬성표를 던진 20여 명을 중앙정보부에 연행해 죽지 않을 만큼 구타하고 고문한 뒤 당에서 제명하고 주동자들을 강제로 정치에서 은퇴시켰다. 쌍용 창업주 김성곤 재정위원장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멋있게 기른 카이저 콧수염이 뽑혀 나갈 정도로 건강하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나왔다. 그 후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몇 해 더 살지 못하고 1975년 62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여당인 한나라당 내에서 박근혜 의원은 물론 친박계 국회의원이 아무리 대통령 뜻에 반대해 표결하더라도 박정희 시대처럼 국가정보원에 불려가 고문당할 것을 염려하지 않으니,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하는 것이다.

적과 아군이 선명해졌다

정치적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지만, 한국 정치에서 좀처럼 진보하지 않은 분야가 한국의 정당정치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했듯이,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한다면 모든 정당은 현실의 어떤 대립을 반영한다. 정당의 대립 구도가 현실 대립을 충실하게 반영할 때, 그렇게 대립하는 정당 역시 현실적 존재 이유를 얻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대립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정당의 대립 구도 역시 그에 따라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당이 현실의 대립과 무관하게 서로 대립하게 되고, 이때 대립하는 정당은 현실의 대립을 조정하고 해결하지 못하면서 현실과 무관한 대립과 갈등을 재생산하게 된다. 지금 한국의 거대 정당 처지가 바로 그러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거슬러 올라가면 남한 사회의 반독재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대립이다. 이 대립 구도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까닭에 대다수 한국인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립을 자명하고, 불변하며, 현실의 대립을 반영하는 객관적 대립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이나 언론인,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가나 학자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서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대립 구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대립 구도가 2012년 총선과 2013년 대선까지 그대로 이어지리라 가정하고 선거의 승리를 위해 각자 당을 쇄신하고 연합 정치를 궁리한다.

6·2 지방선거를 전후해 범야권에서 논의되었고, 지금도 논의 중인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이나 ‘진보 대연합론’ 같은 것도 동일한 고정관념에 따라 한나라당을 공동의 적으로 상정한 뒤, 어떻게 하면 이번 선거의 승리를 더욱 중요한 다음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궁리하는 정치공학적 계산이다. 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에게서 비난 살 것을 각오하고 감히 묻노니, 도대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아직도 그렇게 물과 기름처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본질적 모순은 군부독재였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의 우익 정당은 의회 민주주의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독재자들이 만든 정당이다. 한나라당 역시 뿌리에서 보자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그렇게 만들어진 독재자의 정당에 대항하는 정당으로 존속해왔다. 두 당의 대립은 독재자의 존재를 통해서만 현실 적합성을 얻는다. 하지만 누가 지금 독재자인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많은 사람이 그를 과거의 독재자들과 거의 다름없는 사람으로 취급해왔다. 그렇게 볼 만한 면이 많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 자신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박정희나 전두환과 다르지 않은 최고권력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는 이미 집권 중반기에 레임덕에 빠져든 5년 단임 대통령에 지나지 않는다. 세종시 수정안의 표결에서 보듯 여당 의원의 3분의 1이 대놓고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표를 던져도 더 이상 그들을 국가정보원에 연행해 고문할 수 없다.

물론 아무리 과거의 독재정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보여주는 반민주적 행태를 들자면 얼마든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나라당이 보여주는 극우적 행태가 민주당과의 대립 구도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당이 지금에 와서는 있지도 않은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진보 정당 행세를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진보 정당 흉내를 내는 것이나, 한나라당이 극우 정당으로 기우는 것 모두 현실로부터 괴리된 ‘사이비 대립’을 현실적 대립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가면이다. 근본에서 보자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정치자금을 받아 재벌을 위한 정치를 하면서 노동자에게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북관계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지만,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반에 대북송금 특검으로 평지풍파를 일으켜 대북관계를 냉각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것처럼 박근혜 의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권유에 따라 2002년 한국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장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이어받고 있다.

한나라당-민주당의 과장된 대결

그렇다면 무엇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여전히 적대적 대립 속에 묶어두고 있는가? 그것은 영남과 호남의 지역 대립이다. 두 보수 정당이 모두 이 지역 대립에 기생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두 보수 정당이 사이비 대립을 연출하는 것이다.

여러 해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비웃었으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정치가 나아갈 바른 길이었다. 이념적으로 차이 없는 정당들이 지역 기반이 다르다고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한, 한국 정치에 정상적인 이념적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를 가릴 것 없이 한국 정치의 근본적 발전을 위해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진보의 재구성이 아니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아우르는 보수 정당의 대통합이다. ‘왜 민주당과 국민참여당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통합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이제 물음을 바꾸어 ‘왜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자유선진당과 국민참여당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이 옳다.

이런 제안이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길 권한다. 첫째는 지난 6·2 지방선거의 결과다. 많은 이들이 지난 선거를 반MB와 민주당의 승리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근본에서 보면 그 선거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그것은 강원도의 이광재 후보에서 경남의 김두관 후보까지 ‘노무현 사람’들이 선거에 승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추구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이번 선거를 통해 전반적 승인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치란 고질적인 지역 구도의 타파다. 경남에서 김두관 후보가 당선되고, 부산에서 김정길 후보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5%를 득표한 것은 적어도 부산·경남의 민심이 더 이상 이전처럼 맹목적 지역 구도의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을 의미한다.

지역정당 틀 깨고 보수 대통합을

다른 하나는 이번 세종시 수정안 표결에서 보듯 한나라당의 박근혜계가 민주당과 연합해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하는 것은 이제 시작일 뿐 앞으로 계속 증폭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를 통해 민주당과 한나라당 박근혜계 사이에 실질적인 연합이 진행될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되는 4대강 사업은 한나라당 내의 박근혜계와 이명박계를 다시 분열시키는 시한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안이다. 4대강 사업은 이명박 대통령이 자신만의 고유 치적으로 여기는 중요한 역점 사업이지만 세종시 수정안 이상으로 국민의 반대가 강하다는 점에서 박근혜 의원으로서는 이명박 편을 들어 선뜻 지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야당과 한나라당 박근혜계가 연합해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듯이 다시 한번 둘이 연합해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것은 결코 비현실적인 상상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2012년 총선과 다음해 대선에서 어떤 방식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누가 알겠는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박근혜계가 동서화합과 남북의 평화공존, 그리고 복지국가 건설을 내걸고 합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몽상에 지나지 않지만 진심으로 한국 정치를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듯이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그리고 노무현의 후예를 자처하는 국민참여당이 지역주의를 버리고 대승적으로 통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렇게 보수 색깔이 분명해져야 진보 역시 자기 정체성을 명확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시적 전망을 접는다 하더라도 4대강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 사업에 반대하는 야당은 이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조하기를 원한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7월호 김상봉
 

ps : 사실 이 글의 제목이 "노무현의 선견지명.."이라고 해서 노무현의 치적을 치하하는 내용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잘 읽어보면 그건 제목이 띄는 이글의 유희성을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 초록색 줄에 나와있듯이, "노무현의 선견지명"은 자신을 '진보'라 칭하며 행한 행동에 대해 집권 마지막에 행한 '대연정' 제안이 자신의 보수적 색깔을 확실히 한 올바른(?) 처사였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며 그렇게 되야지 상호 색깔이 분명해져 국민들의 판단이 확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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