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신문기사는 좀 된 기사이다. 한길사에서 작년 8월에 낸 담론과 성찰이라고 하는 일년에 한권씩 나오는 무크지에 최영준 교수의 농촌생활기가 한편 나와있는데, 그것에 관한 내용같다. 난 개인적으로 최영준 교수를 본 적도 없고 강의를 들은 적도 없지만, 간접적으로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씨가 낸 '책의 공화국에서'와 '담론과 성찰'에서 각각 김언호 대표의 최영준 교수에 대한 글과 최영준 교수의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때도 책이 나온다길래 상당히 기대했었는데, 재미있을 듯 하다. 분량을 보니 600페이지가 넘는다. 읽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릴듯 하다. 출판사의 소개 글에는 거창하게(?) 소로의 '월든'에 버금가는 자연에 대한 예찬과 현대 기계문명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책이라고 소개가 되어있다. 뭐 어찌 소로의 '월든'에 버금(?)가기까지야 하겠냐마는 최소한 '한국의 월든'이라 소개될만할 것 같다.
한국일보 2010.4.22 농촌생활 20년…진짜 농사꾼 된 고려대 명예교수 최영준
"귀농 쉽게들 말하지만 기본기에만 10년 걸립디다"
농촌에 들어가 살겠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 그렇게 하는 이가 많지 않고, 그렇게 농촌으로 들어갔다가 후회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최영준(69) 고려대 명예교수의 정착 과정은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만하다.
최 교수는 철저한 준비와 남다른 부지런함, 이웃과 잘 지내려는 겸손한 자세 등으로 이제 진짜 농사꾼이 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지난해 발간된 부정기간행물 '담론과 성찰'에 '홍천강변에서 20년'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했으며 독자의 반응이 좋자 조만간 그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발행할 계획이다.
최 교수는, 번잡한 것은 싫어하고 자연을 좋아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만 했으니 원래는 농사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 그가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이 된 1989년 어느 날, 자신의 조상 가운데 그 나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농촌으로 들어간 계기가 됐다. 당시 고려대 지리교육학과에 재직 중이던 최 교수는 마흔 아홉 이후의 삶은 덤으로 얻은 것이니, 조용한 곳에 들어가 욕심은 버리고 공부한 것은 다듬으며 살겠다고 마음을 정한다. 대학가가 시위로 어수선했고 일부 학생은 학생운동을 이유로 그와 학점 협상을 하려 해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하던 때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섰고 지금의 강원 춘천시 남산면 산수리 홍천강변의 외딴 집에 은거지를 마련했다. 대한제국 말년 경복궁에서 참봉벼슬을 하던 사람이 낙향해 지은 집으로 한동안 서당으로 쓰였으니 낡기는 했어도 기품은 있었다. 그러나 집이 있는 동네는 길도, 다리도 없는 강변마을로 개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궁벽한 오지였다. 그런 그를 두고 "장래성 없는 곳에 아까운 돈을 쓸어 넣었다"거나 "아직 한창인데 너무 일찍 은퇴 준비를 하는 것 아니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후 2년 반에 걸쳐 비포장 농로와 고갯길을 걷고 작은 배로 강을 건너며 솥, 밥상, 식량, 침구 등을 직접 날랐다. 처음 7년 동안은 전화도 없었으니 문명과도 떨어져 지냈다. 손목이 부러지고 말벌에 쏘이는 등 다치는 일이 많았는데 병원과 거리가 멀어 발을 동동거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니 완전한 도시 탈출은 어려웠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보내고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주말과, 방학에는 홍천강변에서 지내는 이중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차 농사꾼으로 변해갔다.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농사법을 배웠다. 눈으로 보고 따라 하고, 설명을 듣기도 했다. 그 스스로 밝힌 것처럼 농촌 생활의 첫 10년은 마을 어른들로부터 기본적인 농사일을 배우는 기간이었다. 농사 짓는 일을 일기로 남겨 다음에 농사를 지을 때 활용하기도 했다. 차차 농사 일이 손에 익었다. 냄새가 고약한 퇴비도 왕겨, 음식물찌꺼기, 낙엽 등을 섞어 발효해 만들기에 이르렀다. 처음 퇴비를 만들 때는 오줌 한 방울도 버리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지저분하다고 하는 것들이 농촌에서는 다 소중한 거름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해서 최 교수는 벼 농사를 손수 짓고 마늘, 고구마, 옥수수, 당근, 땅콩, 오이, 호박, 고추 등 30여종의 작물을 재배하기에 이르렀다. 순무, 토란 등 그 지역에 없던 작물은 시험재배까지 했다.
도시 사람이 왔다며 경계하던 주민들은 한 동안 지켜본 뒤 부지런하고 인사 잘하는 그를 비로소 마을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자동차가 구덩이에 빠지면 경운기로 끌어주고, 인근 제방에 벚나무를 심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농업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수가 작용한다. 건너 숲에 사는 고라니가 홍천강을 헤엄쳐와, 그가 애써 가꾼 무, 배추, 콩을 따먹었으며 사과와 배는 지금도 4분의 3이 까치 몫이다. 자두나무 등은 두더지가 뿌리와 밑둥을 갉아 먹어 고사하기도 했다. 다람쥐와 토끼는 집 마당으로 들어와 땅콩을 까먹었다.
동물은 그래도 살기 위해 한 짓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태는 무척 실망스러웠다. 이 험한 곳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집에 몇 차례 도둑이 들었다. 고가품은 아니지만 집안 살림과, 애써 기른 고추와 배추 등을 갖고 달아났다. 집에서 가꾼 수련과 튤립도 훔쳐갔고 마을에 있는 붓꽃, 할미꽃도 쓸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멋진 경치가 알려지고 관광객이 몰리면서 쓰레기가 쌓이고 물고기와 다슬기가 사라졌다.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씩 바뀌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비가 내릴 지, 냉해가 올 지 등이 중요하지만 TV의 일기예보는 나들이 하기에 좋다거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식으로 도시인 중심으로 나오니 서운할 때가 많다. 쌀 수입에 따른 적극적인 대책이 부족하고, 불량 종묘가 많아졌으며, 양수기 등이 필요한 때에 공급되지 않는 것 등도 그가 농업에 종사하면서 느낀 문제점들이다. 그는 "만약 서울에서 교수로만 있었으면 이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대체로 농촌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열심히 일을 하면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진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골치 아픈 일을 잊을 수 있으며 남과 부대낄 이유도 없다. 그러니 머리가 맑아지고 정신 집중이 잘 돼 이곳에서 논문도 쓰고 책도 냈다. <한국의 짚가리>와 <국토와 민족생활상>에는 그가 이곳 농촌에서 일한 경험과, 근처 마을에서 촬영한 사진 등이 들어있다. 불문학자인 장인 손우성 선생의 여행 경험을 <손우성의 유럽여행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낸 것도 이곳에 와서다.
2008년에는 주민등록까지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농사꾼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최 교수가 주소지를 옮기자 주민들은 그가 진정한 농촌 사람이 됐다고 환영했다. 물론 서울에는 아직 집과 서재가 있으며 2007년 2월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가 된 뒤로도 문화재위원회 회의 참석 등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서울에 간다. 그렇지만 그는 농사꾼의 삶이 좋으며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최 교수는 논 300여평, 밭 700여평, 과수원 400여평 등에서 농사를 짓고 나무를 기르는데 한국교원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부인 손정리(68)씨와 둘이서 감당하기에는 꽤 규모가 크다. 그렇게 수확한 작물을 지인에게 나눠주는 게 그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지난해에는 40~50㎏짜리 15자루 분량의 쌀을 거뒀는데 최 교수에게 필요한 6자루 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아는 사람에게 주었다. 아내의 대학 제자들이 와서 땅콩을 수확하고 가져갔는데 그때도 참 흐뭇했다.
농사꾼으로서 스스로에게 몇 점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50점"이라고 대답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웬만한 농사를 다 지을 수 있는 진짜 농사꾼이 됐다. 그의 굵은 팔뚝과 손톱 밑에 낀 얼룩이 그것을 증명한다.
최영준이 말하는 농촌 정착 하기
"과거는 다 잊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갖고 있던 직업, 도시에서 받았던 대우 등을 완전히 잊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최영준 교수는 농촌에 잘 정착하려면 먼저 도시적 사고와 단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와 농촌은 생활과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농촌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적인 오락과 취미를 버리고 자연의 생활에 만족해야 한다. 도시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거나 외로워해서도 안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의 관계다. 농촌 주민들은, 비록 서울 사람보다 경제적으로는 어려울 지 몰라도 자존심만은 무척 강하다. 그래서 도시 사람이 들어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과시하면 결코 예쁘게 받아주지 않는다. 반면 겸손하고 묵묵히 일하면 어느덧 다가와 친절하게 맞아준다. 꼭 그것이 아니라도 농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잘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잔치를 여는 등 공연한 돈 자랑은 역효과를 내기 쉽다. 농촌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농사 등과 관련한 지식과, 오랜 세월을 살며 터득한 지혜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최 교수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중요한 것은 사람 됨됨이와 근면성"이라고 강조했다.
ps : 중간에 나오는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씩 바뀌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비가 내릴 지, 냉해가 올 지 등이 중요하지만 TV의 일기예보는 나들이 하기에 좋다거나,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라는 식으로 도시인 중심으로 나오니 서운할 때가 많다." ... "만약 서울에서 교수로만 있었으면 이런 문제들의 심각성을 몰랐을 것"이라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특히 일기예보에 관한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도시, 도시민들 중심으로 짜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주위에 대한 타인에 대한 나 자신의 일과 관계없는 부분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최영준 교수가 서울에서 교수생활만 했다면 이런 부분들에 대한 문제를 몰랐을 것이라는 말은 어쩌면 현대인의 성찰성의 부족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먹고살기 바뻐서일수도 있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때로는 내일이 아닌 것에 관심 가져보고 참견해보는 것도 재미다면 재미일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