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고에서 철학교사를 하고 있는 안광복 선생님이 책을 썼는데, 제목이 너무 맘에 든다. 물론 내용도..."지리시간에 철학하기"...어떻게 보면 "철학시간에 지리하기"일것 같은데, 하여튼 나중에는 내가 철학시간에 지리하기란 책을 냈으면 좋겠다. ㅋㅋㅋ 책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둔다. 아울러 한겨레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기사 중에 지정학과 관련된 기사 하나도 스크랩한다.(안광복 선생님은 지리적에 대해 조금 관심이 있으신가보다...)

 

한겨레신문 201.7.23 살고 밟는 곳엔 다 이유가 있다네 
 

도시와 길·민족·종교·환경 등…
철학 교사가 쉽게 쓴 생활지리 

 

» 살고 밟는 곳엔 다 이유가 있다네

지하철은 과연 ‘서민의 발’일까? 출퇴근길을 재촉하는 수많은 이용객을 보면 틀린 얘기 같진 않다. 서울과 경기, 인천을 합쳐 2천만명가량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일 수 있는 것도 소중한 ‘서민의 발’ 덕분이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지하철은 ‘부자의 손’이 되기도 한다. 일단 지하철이 생기면 교통 체증이나 주차 부담이 확 줄어든다.

애매모호했던 중심지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확실해진다. 역 부근 건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도심의 높낮이는 역을 중심으로 마치 물결치듯 형성된다. 자연스레 도시의 땅값과 집값이 올라가고, 수천만명이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할 수도 있다. 서울의 주택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르는 게 ‘서민의 발’ 지하철 탓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지리 시간에 철학 하기>는 우리가 생활하는 집과 도시, 그리고 길을 꿰뚫는다. 그 바탕엔 철학과 역사가 있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바라봤거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곱씹어보고 뒤집어본다. 현직 고교 철학 교사답게 저자는 쉽지 않은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아파트에 대한 분석도 눈길을 끈다. 한국인은 왜 아파트에 열광하는가? 좁은 땅덩어리 때문에? 돈 좀 있는 사람들도 단독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걸 보면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싶다.

저자는 이유를 역사적 흐름에서 찾는다. 아파트는 우리의 전통 가옥과 비슷한 면이 많다. 신발을 벗고 현관보다 조금 높이 올라서야 하고, 바닥은 온돌로 데워진다. 거실이 옛 한옥의 마루처럼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고, 이를 중심으로 안방과 작은 방, 화장실이 배치돼 있다. 장독대와 화분을 따로 놓을 수 있도록 발코니는 앞뒤로 있다. 외국에서 아파트먼트란 이름으로, 주로 서민들의 거주지인 아파트가 한국에 와서 환골탈태한 것이다. 아파트 단지도 옛 마을을 닮았다. 학교, 상가, 놀이터, 노인정 등 단지 안에 웬만한 시설은 다 갖추고 있다. 서당과 노인정, 구멍가게 등이 있는 옛 마을처럼.

저자의 분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익숙한 구조에 편리함과 안전함까지 갖췄으니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가? 비록 아파트가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통해 히트상품이 됐지만 거기엔 자신이 사는 집에 대한 애착과 살가움이 없다. 재건축을 통해 몸값을 높이고, 언제든 비싼 값에 팔릴 태세를 하고 있는 서글픈 집이기도 하다. 더불어 주민들이 사는 곳에 집착하지 않게 함으로써 한국인에게는 드문 유목민적 성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지하철과 아파트 말고도 민족, 종교, 환경 등 다양한 지리적 주제를 철학과 연결시켜 여러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한겨레신문 2010.7.26
[난이도 수준-고2~고3]


44. 내가 이 땅에서 고생하는 이유는-지정학자의 눈에 비친 세상 

아르헨티나의 어린이들은 누구나 말비나스 섬을 그릴 줄 안다. 학교에서는 이 섬을 ‘잃어버린 어린 자매들’이라고 가르친단다. 반드시 이 섬을 되찾아야 한다는 결심이 담긴 표현이라 하겠다. 심지어 일기예보 지도에서도 말비나스를 이루는 두 개의 땅덩어리는 꼭 들어 있다. 말비나스는 도대체 어떤 섬일까?

말비나스는 영국 사람들이 ‘포클랜드 제도’라 부르는 섬이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이 섬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작디작은 이 섬에는 변변한 자원도 없다. 그럼에도 아르헨티나와 영국에게 이 섬의 가치는 아주 크다.

사람들은 땅을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기곤 한다. 특히, 누구 땅인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지역은 더욱 그렇다. 댜오위타이 군도(센카쿠 열도)를 놓고 벌이는 중국과 일본의 신경전에도 섬의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지정학(Geopolitics)은 이처럼 땅을 놓고 벌이는 갈등에 눈을 돌린다. 지정학에 따르면, 국가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늘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다른 나라와 부딪힐 수밖에 없겠다. 힘세면 살고 약하면 먹힌다. 히틀러는 ‘지정학 연구소’를 따로 두었단다. 그곳에서 지리학자들은 독일의 생존공간(Lebensraum)을 넓히기 위해 머리를 싸매곤 했다. 히틀러는 지도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1차 세계대전으로 쪼그라든 독일의 모습을 지도로 보여주었다. 그러곤 ‘대(大)독일지도’를 당시의 독일 영토와 견주곤 했다. 대독일지도에는 독일 말을 쓰는 모든 지역을 ‘독일’로 그려 놓았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아우르는 넓은 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독일의 모습에 가슴 뭉클해했다.

지리학자 클라우스 도드는 땅의 모습은 애국심을 키우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사실, 국가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일 뿐이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부모 형제처럼 살가워야 할 까닭이 뭐가 있겠는가? 부자 나라에도 지지리 궁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국가가 잘나간다 해서 나까지 꼭 행복하리라는 법도 없다. 그럼에도 왜 국민들은 자신보다 국가를 더 위하고 앞세워야 하는가?

이 물음에 ‘국토’는 대답을 눈으로 보여준다. 떠돌던 이스라엘인들은 잃어버린 가나안 땅을 되찾겠다는 결심으로 수천 년을 버텼다.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는 뜨거운 바람이 없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금처럼 뭉칠 수 있을까?

나아가, 지정학은 살아남으려면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많은 땅을 차지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심지어 어디를 집어삼키라고 꼭 짚어 일러주기까지 한다. 히틀러는 소련 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시 지정학자들은 동유럽과 소련의 땅이 세상의 심장부(heartland)라고 주장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의 중심인 까닭이다. 이곳을 차지하고 철도를 놓아 잘 이용하기만 하면, 바다에서 힘을 쓰던 영국 같은 나라는 힘을 잃게 될 테다. 히틀러가 소련과 목숨 걸고 싸웠던 데는 지정학자들의 주장이 큰 몫을 했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겨루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정학자들은 북극을 가운데 놓은 지도를 널리 퍼뜨렸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지도에는 태평양이 가운데 있다. 이 지도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북극을 중심에 놓으면 미국과 소련은 바싹 붙어 보인다. 게다가 군인들은 지도에 차곡차곡 원까지 그려놓았다. 원은 소련에서 쏜 미사일이 미치는 거리를 나타내었다. 지도만 보고도 소름 돋을 일이었다. 

지정학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지에 따라 세상의 모습을 다르게 나타낸다. 그렇다면 테러가 끊이지 않는 지금의 세계는 어떨까?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우리 시대의 갈등은 ‘문화’를 놓고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를 중화(중국), 일본, 힌두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라는 8개 문명으로 나눈다. 각각의 문명이 맞닿는 곳은 바람 잘 날이 없다. 문명끼리의 충돌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테다. ‘이슬람 성전을 지어야 할지, 힌두교 신전을 지어야 할지는 두 건물 모두를 지어도,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아도, 또는 이슬람과 힌두교를 적당히 합친 건물을 짓는다 해도 풀리지 않는다.’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을 따르는 파키스탄의 오랜 다툼을 보면 헌팅턴의 말이 틀리지 않은 듯싶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등에서 벌어지는 전쟁도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이 부딪히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정학의 잣대는 언제나 편견이 될 수 있다. 클라우스 도드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80%는 여권이 없단다. 게다가 미국 시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라 밖 문제에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지정학적 판단은 편견만 심어 줄 뿐이다.

히틀러가 무너진 후, 지정학은 학자들 세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사람들을 속이는 ‘사이비 과학’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말이다. 세상살이는 단순하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이론은 우리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 하나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듯이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한 해결책은 늘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세상살이는 명쾌한 해법보다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 

 
 

ps : 시의적절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위 글 중에서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내는 이론을 우리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란 글은 나의 피를 불끈거리게 한다. 그런 부류의 글과 '선동'에 대한 나름의 나 자신의 논리와 설득력을 가져야 겠다는 전투력이 생긴다. 남은 방학기간동안에 독서 좀 더 해야겠다. 고등학교때 문명의 충돌을 산거 같은데 아직 완독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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