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시인의 한겨레 연재글을 읽고 정리하다 알게 된 김수영 시인의 <절망>이란 시를 옮겨 놓는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나는 반성하는 인간이고 싶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965.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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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17  절망을 버리고 ‘분단시대’에 어깨를 결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⑪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공간’에서 그들과 통했고
어설프고 서툰 채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무궁화 전설에 민중을 담은 시
‘울타리꽃’이 창간호에 실리고
경찰사찰도 시작되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그랬던가요?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절망> 중에서)라고.

헤맴 십 년, 절망 십 년, 방황 십 년. 그렇게 십 년을 보내고도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반성할 줄 모른 채 졸렬과 수치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찔레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까시꽃만큼이나 향기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것일까? 불두화만큼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며 그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끝까지 문학의 길을 가자던 이들은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이중섭을 죽도록 좋아해서 “마누라가 창녀가 되고 자식새끼가 거지가 될 때까지 문학을 하자”고 소리치던 이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율도 감동도 없이 세월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이 삼십이 되어간다는 것을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은 시인은 “20대의 열정, 희망, 감수성, 방황, 함성 속을 지나서 30대는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해체 정리하지 않으면 한 편의 시도 남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30대 작가란 그들 자신의 20대적 문학을 전부 약탈해서 불태워 버리는 세대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삼십이립’(三十而立)의 동양적 세대론 속에 ‘선다’는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헤맴 십 년 따위를 고은 시인은 해체하고 불태워버리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체하고 정리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났습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보았습니다. 나는 헤맴밖에 자랑할 게 없는데 동갑인 그녀는 삶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몸 전체로의 삶이었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는 헤매는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우선 글쟁이들이 모였고, 모여서 시낭송을 하면 음악 하는 이들이 피아노를 치거나 플루트를 불었습니다. 연극쟁이들이 모여 마임을 할 때도 있었고, 가난한 화가들이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공간’이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김희식이라는 국문과 대학생을 만난 것도 그곳이었습니다. 한참 물이 오른 운동권 대학생인 김희식은 김창규라는 자기 선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광주항쟁 관련 유인물을 돌리려고 자전거에 싣고 가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고 나온 전도사였습니다. ‘공간’에서 만나서 떠들다가 열이 오르면 근처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대구에 있는 친구들을 소개해 주는 이가 있어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배창환, 김종인, 김용락, 김윤현, 정대호, 김형근 이런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 의기투합해서 청주와 대구를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정만진, 김승환, 김시천, 김성장, 정원도 등이 합류하였습니다. 대구 쪽에서는 정대호 시인이 학생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 문청이었고 나머지는 교사가 많았습니다.

‘분단시대’. 여러 번의 만남 끝에 우리 모임의 이름이 이렇게 지어졌습니다. ‘분단시대’라는 말은 강만길 선생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는 책에서 쓰신 용어이기도 합니다. 강만길 선생은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가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는 일을 그 최고 차원의 목적으로 삼은 시대라면 20세기 후반기, 즉 해방 후의 시대는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통일 민족 국가의 수립을 민족사의 일차적 과제로 삼는 시대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 이 시기는 ‘분단시대’로 이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중서 선생 역시 <분단시대의 문학>이라는 책에서 “남북 역사의 모든 불행과 결핍의 근원이 바로 분단 현실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셨고, “문학예술은 역사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발견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필요와 능력을 밝혀주며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는 능력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바 있는데, 두 분의 글과 백낙청·염무웅 선생의 글 등을 읽고 토론하면서 모임의 이름을 ‘분단시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몰려다니다 첫 번째 동인지를 내면서 우리는 동인지 맨 앞에 이런 머리말을 썼습니다.

“시는 만남이다. 안과 밖의 만남, 개인과 시대와의 만남, 자아와 그 자아를 둘러싼 상황과의 만남, 나아가서 민중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의 만남, 정신적 구조와 역학적 구조와의 만남이다. 시는 그것들의 화해이어야 하고 악수이어야 한다.

시적 진실은 안에만 머물고 삶의 진실은 외면된 채 방치되어 있거나 불행한 시대와 역사는 왜곡된 파행을 계속해 가는데 시인은 폐쇄적인 자아의 성 내부에서 공허한 탄식을 되풀이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 시대의 삶이 비극적이라고 할 때 시가 획득한 예술성이 전혀 그 비극의 진원지를 향해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시는 그 속에서 개인을 구제하고 소극적 감상을 되풀이하면서 결국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오늘날, 개인의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과 민족의 역사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은 단절되어 있다. (…) 국토의 분단에서 시작한 그것들은 결국 민족의 분단, 진실의 분단, 진리의 분단, 시대의 분단, 정신의 분단을 가져오고 만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나뉘어진 모든 것을 향하여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려 한다.”

-<분단시대> 제1집 머리말 (1984년, 온누리)

과학적으로 정돈이 덜 되어 있는 글입니다. 마음만 앞서 있고 논리가 정연하지 못한 글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인 고백도 글 안에 들어 있고, 고은 시인의 보이지 않는 영향도 문맥에 배어 있는 걸 느낍니다. 분단시대와 분단 극복이라는 명제를 만나기는 했지만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토대로 하고 국가간 체제를 상부구조로 하며 분단구조가 응축된”(하정일, ‘탈식민과 근대극복’) 복잡하고 특수한 체제, 백낙청 선생이 말씀하신 ‘분단체제’의 극복이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까지는 이르지 못한 상태로 출발한 문학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설프고 서툰 통과제의를 겪으며 우리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1980년대 전반기 그때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기간행물이 다 폐간되어 글을 발표할 매체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과 같은 우리나라의 지성을 대표하는 문학지들이 폐간되어 발행되지 못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제 막 문단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는 때에 글을 발표할 매체가 폐간되고 없다는 것은 자연히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인들은 <실천문학>과 같은 부정기 간행물 즉, 무크지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와 경제> <오월시> <삶의 문학> <반시> <목요시> <자유시> 같은 동인지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른바 동인지 문단 시대를 열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춘문예나 추천 등의 등단 방식에 얽매여 신춘문예용 시에 매달리거나 추천해줄 문인의 아류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 못마땅하던 우리들은 이참에 등단제도 자체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으로 시대적·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 어떤 신문을 통해 등단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에 저는 <고두미마을에서> <울타리꽃> <진눈깨비> <분꽃> <삼대>(연작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아직도 정식으로 등단하지 않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보다 더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뷔작 중의 한 편인 <울타리꽃>은 이런 시입니다.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졸시 <울타리꽃> 전문


울타리꽃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나라꽃인 무궁화의 전설을 바탕으로 쓴 시인데 권력에 대한 저항과 져도 져도 끝없이 다시 피어나는 민중의 끈질긴 정신을 표현해 보려고 했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가 실려 있는 동인지 <분단시대> 창간호를 서울대학교 학생회에서 필독도서로 선정하는 바람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 경찰의 사찰을 받는 일이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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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10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시가 제게 물었습니다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제대하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소작농이 되어있고 시도 삶도 어설픈 채 겉돌았습니다
농사일을 시작하고 원고더미에 불을 질렀습니다
죽 한솥 끓여먹고 나니 문청의 얼룩들도 사라졌습니다 
 
어느 늦가을 저는 야간 근무를 하다 초소에서 몰래 박 신부님께 보내는 긴 편지를 썼습니다.

“신부님,

여린 햇볕에 녹았던 서릿발을 다시 얼게 하는 밤의 냉기가 적요한 모습으로 대지를 지나고 있습니다. 가끔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신비하게 앞산 계곡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신부님 당신의 옷빛 같은 어둠이 짙게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신부님,

살아 있다는 것이 눈물겹습니다. 한 술의 밥을 입안 가득히 넣고 씹는 순간 울음이 북받쳐 오릅니다. 내 떠돌며 지나온 곳마다 지은 카타콤 같은 밀실에서 올리던 묵도와 그 묵도하는 모음이 꺾어져 가는 공포로 밤 꿈은 어지럽혀져 있습니다. 무덤 속에서만 항거하고 빛을 향해 서서는 말을 잃는 서툰 진실이 부끄러웠습니다. 지하의 기도 소리들을 지상에 올려 실존하는 사원 앞에 이끌어 가야겠습니다. 

중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혼자만 득도하고 유아각성(唯我覺性)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뜻도 없었습니다. 비록 갈라지고 때 묻은 손이지만 노동하는 이 손의 정직함을 바라보며 좀 더 분명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파티마성당의 풀과 나무 위에 숱하게 뿌린 내 오만의 이파리들이 썩어 새로운 한 포기 언어의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당신의 눈동자가 이리도 오래 내게 살아 있는지요? 이렇게 고적한 밤 당신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나는 또 무엇을 향해 이 밤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요? 이제는 꽃 하나 보이지 않고 어루러기처럼 번지는 갈대꽃, 환한 갈대꽃만이 시혼을 채찍질하는 바닷가. 언제 나는 긴긴 동면에서 깨어나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슬픔을 마주하며 걸어가려는지요? 어울려 한바탕 마당굿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는지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스러지고, 파도는 파도를 삼키고, 밀려오고 밀려가면 변함없는 것은 의로운 바람. 이 땅에 태어나 할 일을 남겨두고 나는 다만 내부로 파들어가는 조개처럼 문을 닫고 깊디깊은 심연으로만 침전해 있었습니다. 언제 구슬을 품어 이 끝없던 기다림의 아픔을 길어 올리는 신의 그물에 온몸을 드러내 놓고 설 수 있을는지요? 부끄러운 하루, 비굴한 일상의 양식으로 배를 채우고 한 덩이 떡에도 매달리는 손은 검게 그을고 때가 끼어 하루 이틀 속죄로 아니 지워질 상흔만이 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람은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 가려는 것일까요?

신부님,

오늘은 이상히도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말씀으로 하여 비어 있는 나의 이 잔을 가득 채우게 하고 싶습니다…”

몰래 그런 짓을 많이 했습니다. 몰래 편지를 쓰거나, 좋은 글이 있으면 근무 중에 공책에 베껴 적었습니다. 이청준의 <조율사>,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 에리히 헬레의 카프카 평전 <나는 문학이다>, 김성동의 <만다라>, 채광석 서한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 이런 책들을 읽고는 밑줄 그었던 구절들을 공책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그렇게 옮겨 적은 글이나 편지나 글을 써 놓은 공책이 다섯 권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다섯 권의 공책과 숨어서 듣던 아홉 개의 클래식 테이프와 칫솔 한 개를 들고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를 하고 집에 와 보니 도시빈민으로 떠돌던 아버지는 남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청주 시내 외곽에 육십만 원짜리 농가를 전세로 얻어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농약통을 짊어지고 일어서며 취직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는 산문집이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골방에 틀어박혀 슈만의 <피아노 A단조>,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요한 슈트라우스의 <빈 숲속>을 게으르게 옮겨 다니며 원고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이면 견딜 수 없는 공허함, 허전함에 휩싸여 폭음을 하거나 흐린 하늘과 밤공기와 강은교의 <허총가>와 죽음의 냄새와 그리고 멸망과 부활 그 두 개의 유혹 사이를 헤매며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돼지를 키우느라 이집 저집 음식점 잔반통에 남은 찌꺼기를 걷어 자전거에 싣고 오는 동안, 멘델스존의 교향악만 듣고 있어야 글 한 줄이 쓰여진다고 하니 ‘문학은 도대체 얼마나 더 뻔뻔스러워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신경림 시인의 <산읍일지>와 같은 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눈 오는 밤에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 /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아/ 연탄을 사고 술을 마시고/ 숙직실에 모여 섰다를 하고/ 불운했던 그 시인을 생각한다/ 다리를 저는 그의 딸을/ 생각한다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만 들을 것인가/ 눈 오는 밤에 가난한 우리의/ 친구들이 미치고 다시/ 미쳐서 죽을 때/ 철로 위를 굴러가는 기찻소리만/ 들을 것인가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 이 산읍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인가’라고 묻는 이 물음은 낭만주의적인 태도, 개인주의를 완전히 벗지 못한 문학 습관, 거기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몸짓이 문학창작의 주요 토양이던 날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고독의 지구력이 부족한 때문이니 어쩌니 하고 떠들던 것도 삶에 대한 자신감 부족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문학적 오기, 이런 것도 끝내 갑 속에 든 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생전 해 본 일이 없던 농사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며 살을 베고, 다리를 휘청거리며 볏가마니를 허리에 얹었습니다. 감자를 캐고 참깨를 털고 외양간을 치우고 인분 리어카를 끌고 마을 한복판을 지나 밭으로 갔습니다. 소똥을 치고 오줌을 퍼 나르다가 손에 똥을 묻히면서 ‘멸망하라 멸망하라 공허한 내 시여’ 하고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들일을 다니며 가을 한 철 보냈다
뒷주머니에 찔러 주던 백 원짜리
환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
니코틴 색으로 손에 배는 고적한 피로
콩과 깨를 거두고 무 두 접 뽑아 묶어
얼지 않을 땅에 묻고 땀을 닦으며 일어서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의 노역
베고 또 베어 버려도 벌판은 남아 있고
지난날의 쓸쓸함도 거기 어디 남아 있고
등에 얹은 볏가마니는
지고 가야 할 나이보다 무거웠다
먼지를 털며 올려다보는 새털구름 밑으로
하늘은 배고픔처럼 어두워오는데
시간은 나를 앞질러 갈 만큼 간 걸 알겠다
돌아오는 거리에서 마른 구역질을 하고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곤 했다
내일은 소장수 백씨네 아랫텃논
마당질을 끝내러 가야 한다
호박잎을 걷어낸 양철지붕 위에서
바람이 떼를 지어 붉은 녹을 걷어차며
종점 빈터로 몰려가는 늦가을 저녁

- 졸시 <들일> 전문

문학적 진실이 삶의 진실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시로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해 삶도 시도 어설픈 채 겉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를 썼지만 그래서 발표하지 못한 채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비닛에 들어 있는 원고더미들을 꺼내 마당에다 옮겨 쌓았습니다. 대학 때부터 머릴 싸매고 대들었다는 원고의 초고더미들을 쌓아놓고 거기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나가다 그걸 보시고는 놀라며 왜 그걸 그냥 태워 내버리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원고지에 붙은 불을 끄더니 뒤란으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을 못하고 멍하니 어머니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뒷마당 화덕 밑에다 그것들을 넣으시는 겁니다. 화덕에다 그날 저녁에 먹을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죽 끓일 불쏘시개를 하시는 겁니다. 죽 한 솥을 다 끓이신 어머니는 “거 봐라 죽 한 솥 다 끓일 수 있는데 왜 아깝게 그냥 태워 내버리니” 하시는 거였습니다. 가장 절망스럽게 보낸 날들의 흔적, 가장 몸부림치며 보낸 문학청년기의 얼룩들도 죽 한 솥 끓여 먹고 나니 흔적이 없었습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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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blog.aladin.co.kr/mramor/4151482 

내가 자주 방문하는 로쟈님의 블로그에 실린 글이다. 독서와 '독서국민'에 관한 글로 과연 독서를 하지 않는 시민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시민이라 불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는 국민이 많은 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이며 선진적이다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일견 경제적의미에서의 성장을 이루었을지언정 정신적 민주주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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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문화(2010년 9월 538호)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  

‘우리시대 왜 인문학을 말하는가?’란 주제는 ‘곁다리 인문학자’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창한 주제다. 나는 그냥 ‘5피트 책꽂이’ 이야기에서 내가 느낀 바를 조금 적고 싶다. ‘피트’란 단위에서 우리네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짐작하실 것이다. 미국 얘기다. 지난 세기 초의 일인데,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버드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한 찰스 엘리엇이 은퇴할 무렵에 한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 50권짜리 전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51권이다. 일방적인 제안은 아니었고, 엘리엇 총장이 평소에 “5피트 책꽂이면 몇 년 과정의 일반교양 교육을 대체할 만한 책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 지론을 바탕으로 1909년에 펴낸 것이 ‘하버드 클래식’이란 전집이고, 이 전집의 별칭이 ‘5피트 책꽂이’다.   



<하버드 인문학 서재>(21세기북스, 2010)의 저자 크리스토퍼 베하의 묘사에 따르면, 자신의 외할머니가 소장한 이 전집은 한 칸의 폭이 2피트인 책꽂이 세 칸을 차지했다. 세 칸의 높이가 5피트 가량 되는 셈이니까 꽤 큼직한 책들인 듯싶다. 각 권마다 400-500쪽이라고 하니까 분량도 만만찮다. 엘리엇은 하루에 15분씩만 투자하면 누구라도 고등교육이 제공하는 최상위 수준의 교양을 갖출 수 있다고 장담했고 또 그렇게 기대했다. 그로서는 ‘5피트 책꽂이’가 교양의 ‘핵심’이자 ‘최소한’이었던 모양이다. 하나의 교과과정처럼 편집한 이 전집에서 그는 독자가 세계 사상의 주요 흐름을 간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그야말로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위대한 교과서”로 비치길 원했다. 그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서 베하는 2006년 연말에 거의 100년 전에 나온 이 전집 완독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2007년 1년 동안 독서록을 썼다. 견적상으론 1주일에 한권씩, 하루에 60-70쪽 정도씩 읽는 일이었고, 일견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지만 이뤄낸 성취는 작지 않아 보인다. 사실 우리의 경우 대학 교양과목을 2년간 듣는다고 해서 50권 정도의 고전을 독파하는 학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버드 인문학 서재>에는 1권의 첫 작품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서부터 우리에겐 생소한 49권의 마지막 작품 윌리엄 모리스의 <볼숭과 니벨룽 이야기>까지 하버드 클래식의 전체 목차와 요지가 부록으로 수록돼 있는데, 100년 전 ‘목록’인 만큼 유익한 참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이진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 목록이 아니라 ‘5피트 책꽂이’라는 기획이다. 민주 시민이 공유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 제시되고 그것이 실제로 읽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와 좀 구별되지 않을까.  

하버드 클래식은 출간 이후 20년 동안 약 50만질, 낱권으로는 100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시할 만한 수치는 아니다. 또 모든 독자가 이 전집을 통해서 애초에 엘리엇이 기대한 만큼의 지적 수준과 교양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도 미지수더라도 그들의 집집마다 같은 전집이 꽂혀 있었다는 사실 자체의 의의는 간과할 수 없다. 책에 대한 기억과 독서 경험을 공유한다면 그들은 이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니까. 설사 무얼 읽었는지 다 망각한다손 치더라도, 라이오넬 트릴링의 말대로 같은 걸 잊어버리는 것이므로 의의가 없지 않다.   

미국에서 그렇듯 국민적 교양을 위한 고전 전집이 기획되고 읽히기 시작할 때 일본에서는 막 ‘독서국민’이 형성되고 있었다.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에 따르면, 메이지 30년대(1897-1906)에 일본의 독서문화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독서국민이란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국민’을 가리키며 좀더 구체적으론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을 뜻한다. 이러한 독서국민은 물론 근대의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독서국민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가? 두 가지가 필수적인 계기였다. 하나는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 습관의 보급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서 자료의 지속적인 공급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 국민 대다수는 소학교 졸업자였지만 그 정도 교육으로는 읽고 쓰는 능력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지방에 많은 도서관을 설립했고, 독서회나 순회문고 사업 등에 나선 언론사들도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 일조했다. 신문이나 잡지를 팔기 위해서라도 문맹퇴치와 일반적인 독서능력 함양은 필수적인 요구였다. 거기에 근대적 철도의 부설에 따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게 된 출판 자본이 근대 일본어로 쓰인 책들을 찍어내면서 바야흐로 독서국민이 탄생하게 됐다.  

이러한 사례들에 견주면 우리의 출발은 매우 불우했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데다가, 비록 근대식 교육과 언론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독서국민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30%의 식자층만이 한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어 책까지 읽을 수 있는 엘리트 독자층은 10%를 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계급 이전에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읽고 쓰는 능력의 유무에 따라 분할돼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라면 모든 구성원을 동등한 주권자로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된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군주가 통치하는 왕정국가라면 그 국가의 존립과 흥망을 좌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군주 한 사람의 학식과 덕성이다. 그런 것이 그의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따라서 예비 군주의 교육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그의 배움을 일컬어 ‘성학(聖學)’이라 불러왔다. 똑같은 원리가 민주주의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국민 각자가 주권을 갖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그 주권자의 역량, 곧 국민의 일반적 역량이다. 그리고 그 역량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고력과 판단력의 원천이라 할 지식과 교양이다.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물론 책을 통해서, 독서를 통해서이다. 기본적인 독서력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민주사회의 기본 토대이자 버팀목이다. 그런 독서력의 중요성에 비하면 책의 종류는 부차적이다.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밴” 다음이라면 어떤 종류의 독서라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들 각자는 ‘독서국민’이며 대한민국은 독서 강국이라 할 만한가? 우리는 국민 개개인이 주권자로서 자랑할 만한 식견과 교양을 갖고 있는가? 우리의 교육과 독서 현실은 그러한 시민을 양성하기에 모자람이 없는가?  

해마다 반복되는 설문결과이지만, 우리의 독서율은 한 달 평균 1권꼴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 한다. 이런 지표를 놓고서는 사실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식의 독서지도가 무의미하다. 하루에 30분씩만 책을 읽어도 요즘 나오는 200-300쪽 짜리 책이라면 일주일에 한 권은 너끈히 읽을 수 있다. 적어도 독서가 습관으로 밴 국민이라면 한 달에 4-5권은 읽어야 ‘정상’이다. 그런 면으로 보자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국민’이 돼본 적이 없다. 독서국민의 ‘효과’도 경험해본 적이 없다. ‘5피트 책꽂이’를 집집마다 끼고 살지도 않으며, 자신의 무지와 무교양을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그렇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런 우리가 또한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그 많은 책들은 누가 다 읽는 것인지 궁금할 뿐더러 누구를 위해서 책을 만드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자명한 것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세계 7위의 출판대국이라는 것보다는 세계 7위 이상의 독서대국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도 바람직하리라는 점이다. 남에게 별로 지기 싫어하는 우리가 이 정도 욕심은 내봄직하지 않을까.   

한동안 한 방송사와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등의 단체에서 지역 도서관 건립운동을 벌인 바 있다. 지역민의 독서와 문화생활의 기본 거점이 되어야 할 도서관은 현재보다 대폭적으로 늘어나야 하고, 장서 및 설비도 크게 확충되어야 한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타령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국민이 저마다 자기 책장 갖기를 실천하는 것은 어떤가. ‘5피트’ 대신에 ‘다섯 자’짜리라고 해도 좋겠다. 물론 참고서나 수험용 책 말고 순수하게 자신의 지적 교양을 높이기 위한 고전이나 인문서를 꽂아둘 책장이어야겠다. ‘하버드 클래식’에 견줄 만한 필독 고전 목록을 제시해도 좋겠고, 도서 구입비의 일부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도 고려해봄직하다.  

출판계 안팎의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대로 독서력을 갖춘 독자층이 점점 줄고, 제대로 된 독서여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인문서가 출간돼도 사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편으론 독자를 유인할 만한 좋은 책이 계속 나와야겠지만, 다른 한편에선 그런 책을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독자를 교육하고 길러내야 한다. 나는 우리시대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이런 ‘바닥’에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하고 독서국민이 돼야 하는가, 라고 혹 질문하실지 모르겠다. 치명적인 질문이다. 굳이 산에 올라가봐야 하느냐, 굳이 인생을 다 살아봐야 하느냐, 란 질문처럼. 답하자면, 우리가 그래본 적이 없으므로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온 국민이 매주 한권씩 책을 읽는 사회를 꿈꿔본다. 

10. 09. 29. 

ps : 자기 자식에게 한달에 한번씩 책 구매용 용돈을 주는 부모, 노숙인 및 저소득층에게 경제적인 지원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인문학을 알려줄 수 있는 접근할 수 있는 책을 제공하는 지원책, 국민 개개인 모두에게 일년에 일정 금액의 책을 구매하도록 도와주는 정부, 모든 국민이 자기 집에서 접근 가능한 도서관이 모두 있는 국가. 불가능한 일일까?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내가 사는 관악구 구청장의 경우 핵심공약 중 하나가 도서관 확충이었다. 실현되고 가시적인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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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겨레신문에 4대강 사업 관련 기사가 하나 떴다. 미국의 버클리대 교수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기사이다. 지형학의 권위자라기에 한번 찾아보았다. http://geography.berkeley.edu/people/person_detail.php?person=27 전공분야가 수문, 하천복원이니 전문가이기 전문가이다.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1988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니. 나이는 60 정도이겠지...미국이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많은 전문학자들이 4대강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으면 한다. 책을 검색해보니 한권 나온다. 뭐 하천작용의 지형학이라고 할 수 있나...하여튼 하천지형 전문가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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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29   “4대강 사업, 부산지역 홍수위험 키운다”  

공사현장 둘러본 ‘지형학 권위자’ 미 콘돌프 교수
“직선화에 준설까지 하면 하류 물의 양 급격히 늘어”  

지난 27일 경북 상주시 낙동면의 낙단교 하류 200여m 지점에 선 마티어스 콘돌프 미국 버클리대 교수(지형학)는 준설이 거의 마무리된 낙동강을 가리키며 “배고픈 강”이라 불렀다. 강 둔치 주변에 4대강 공사로 마구 퍼올려진 모래와 자갈이 크고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빗댄 말이다. 콘돌프 교수는 대한하천학회가 29일 국회 도서관에서 여는 4대강 사업 국제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콘돌프 교수는 정부가 4대강 사업의 주요 목적으로 내세우는 홍수 예방 기능에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이처럼 강을 직선화하면 빗물이 하류에 도달할 즈음에는 물의 양이 훨씬 많아지는데, 여기에 준설까지 하게 되면 상류는 홍수 가능성이 줄지만 하류는 더 커질 수 있다”며 “이런 방식이라면 낙동강 하류인 부산의 홍수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낙동강에 쌓는 8개의 보가 홍수를 예방하기보다는 되레 악화시킬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의 홍수를 막기 위해 이 사업을 하는 것인지 한국 정부에 묻고 싶다”고 했다.

지난 3월 세계적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미국에선 요즘 강이 굽이치고 넘칠 수 있는 공간을 주고 있으며, 이런 방식이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준설과 제방 설치에 따른 유지관리 필요도 없애준다”며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던 콘돌프 교수는 이날도 미국이나 유럽이 이미 20세기 중반에 폐기한 강 관리 방식을 한국 정부가 섣부르게 도입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독일이나 일본에서는 준설과는 반대로 대규모 보나 댐 하류에 정기적으로 모래를 퍼넣고 있는 사례도 제시했다.

콘돌프 교수는 교각 안전의 위험성도 경고했다. 교각 하류의 대규모 준설이 상류 지역의 끊임없는 토사 유출을 유발하기 때문에 교각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추석 연휴 기간의 집중호우 때 무너진 경기도 여주의 신진교를 찾은 자리에서 “본류의 준설이 지류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연양천에 놓인 신진교는 대규모 준설이 이뤄지고 있는 남한강 본류에서 불과 400여m 거리에 있다.

콘돌프 교수는 <사이언스>에 4대강 관련 글을 실은 뒤, 주미 한국영사관 쪽으로부터 4대강 사업 자문위원직을 요청받은 사실도 공개했다. 그는 “(4대강 관련) 영문 자료를 있는 대로 보내달라”고 하자 그 뒤 연락이 끊겼다고 말했다.

콘돌프 교수는 29일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한 뒤 30일에는 신진교를 다시 찾아 실측을 통해 준설과 붕괴의 상관관계를 분석할 예정이다.

글·사진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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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에  관련 논문이 실렸다기에 찾아보니, 요약문만 볼 수 있다. 전반적인 하천 복원, 공사에 대한 애기가 아니라 한국의 4대강 사업에 관련된 논문인것 같다. 영어 실력은 딸리지만 찾아서 읽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혹시 전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은 알려주심이...ㅋㅋ

http://www.sciencemag.org/cgi/content/summary/327/5973/1568 

Science 26 March 2010:
Vol. 327. no. 5973, pp. 1568 - 1570
DOI: 10.1126/science.327.5973.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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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vironmental Restoration:
Restoration or Devastation?
Dennis Normile*  

Launched last November,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Four Major Rivers Restoration Project calls for building 16 dams, dredging 570 million cubic meters of sand and gravel to deepen nearly 700 kilometers of riverbed, renovating two estuarine barrages, and constructing bike trails, athletic fields, and parks along the waterways. At $19 billion, it is one of the costliest engineering projects in the country's history. And it is attracting fiery opposition, notably from the Professors' Organization for Movement Against Grand Korean Canal, a group of 2800 academics who accuse the government and supporters of twisting data and ignoring expert panel recommendations on issues such as water quality, flood control, rainfall patterns, and environmental impacts to justify a massive construction boondoggle. Both sides agree on one point: The project will dramatically transform the Han, Nakdong, Geum, and Yeongsan ri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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