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분부신 햇살에
비친 작은 먼지

눈에 보이지 않던 그 놈들
눈부신 햇살에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어디에나 있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수많은 작은 존재들
 

2010.10.22  2-5 교실에서 가을 햇살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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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에서 나오는 월간지 <함께사는길> 10월호에 나온 글이다. 예전 수업할때 문득 든 생각이, 우리 인간들이 갯벌에 가서 조개를 캐고 아이들과 갯벌에 빠져서 뛰어노는 동안, 그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은 작은 존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전에 개봉한 <마루 밑 아리에티>가 바로 그런 이름 모를 존재들에 관한 내용인 듯 하다. 인간만이 사는 세상은 아니다. 돌도 있고 나무도 있고 무당벌레도 있고 벌도 있고 이름모를 잡초도 존재하는 세상이다. 가면 갈수록 아이들의 '감수성'이 무디어지는 듯 하다. 그 작은 존재들에 대해 아예 없는 듯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강(江)의 아리에티

환경운동연합 <함께사는길> 2010년 10월호 박현철 편집 주간

숲 가까운, 江 가까운 오래된 집 마루 밑에 작은 사람들이 산다. 오래된 집 마루 밑의 오래된 작은 집에 사는 작은 사람들, 그들 종족의 보석같은 딸이 ‘아리에티’다. 낡은 집의 세계는 아리에티에게는 완전한 생태계다. 인간을 포함한 그들의 생태계에서 작은 사람들은 금기를 범하지 않고 욕망을 자제하는 절제의 미덕으로 평화롭다. 뜰에서 주운 월계수 한 잎, 선물 받은 각설탕 하나에도 깊이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오래된 집 작은 생태계의 일원으로 공존한다.  

- 미야자키 하야오 <마루밑 아리에티>에서 -

우리에게 江에도 아리에티들이 산다. 우리가 그들을 단양쑥부쟁이나 흰수마자, 꾸구리나 수달 또는 백로,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른다 하여도 그들은 우리 江의 아리에티, 작은 사람들이다. 江은 강의 아리에티들이 다른 수많은 작은 종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다. 그들의 생존의 터를 짓밟는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자연의 이자를 빌려쓰는 대신 자연을 제 것처럼 남김없이 소유하여 탕진하려는 욕망’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江의 생태계에서 함께 사는 저 많은 생태계의 보석들, 공존의 동반자들을 해치면서 우리만은 잘 먹고 잘 살 거라 믿는 어리석음이 욕망으로 녹슬어버린 우리 심장에 박혀 있다. 욕망에 녹슨 삽차를 몰아가 江을 시해하고 전리품을 챙기려는, 저 토건자본과 권력의 야합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우리 손으로 멸종의 길을 가게 한 수많은 작은 사람들의 운명을 우리도 뒤따라갈 뿐이다.

.....(중략)

강의 아리에티들과 우리는 공존할 것인가, 그들을 보내고 우리도 그 뒤를 따르고 말 것인가? 강물을 먹고 사는 우리는 ‘江-자연’이 보기에 ‘빌려쓰기를 포기하고 약탈에 나선 작은 사람들’일 뿐이다. 자연 앞에 겸손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공존의 대열에서 가장 먼저 제외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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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 그런지 요즘 술을 좀 먹은 밤. 여러가지 생각들이 마구 든다. 생각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뭐 잡담이 대부분이지만, 여러가지 나의 고민과 지나간 과거들을 보여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나중에 본다면. 아주 나중에. 2010년 10월15일에 술을 먹고 집에 가는 도중 4번이나 중간에 걸터 앉아 수첩에 쓴 글들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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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15 20:35

경복궁역 커피빈에서

오늘 새로 오신 생활지도부 교감선생님과 생활지도부 선생님들간의 회식이 있었다. '도드람'에서 저녁겸 술. 새로오신 교감 선생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시란다. 술은 한잔도 못하신단다. 뭐 내가 딱히 그분한테 술을 권할 일은 없겠지만, 부장님과 유00선생님은 상당히 아쉽겠다는 생각이든다. 재미나게 술과 저녁을 먹고 2차로 노래방도 갔다. 노래방. 노래방. 근데 정말 웃긴 일이다. 세상 인간사 모두다 '찰나'의 만남과 연결이라는 생각이든다. 오늘 모암에 나오기 전 학교 메신저로 유00 선생님이 가을이라 가을에 어울리는 이문세 노래를 보내줬다. 근데 웃긴 일, 그때 난 제목도 모르는 이문세 노래를 지껄이고 있었다. 제목도 모르는... 그리고 저녁을 먹고 간 노래방에서, 어떻게 우연히 어떤 선생님이 잘못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란 노래가 예약이 된 것이다. 그때 이 선생님이 나보고 '아까 이문세 노래 부르던데 불러봐'하는 것이다. 이 무슨 우연의 연결, 연속인가. 내가 제목도 모르는 이문세 노래를 지껄이고 그 '찰나'에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또 그 순간에 어떤 이는 나에게 이문세 노래를 보내고 또 그날 회식 후 노래방에서 우연히 잘못 버튼이 눌러져 이문세의 노래가 나오고 지금 이 순간 난 그 노래를 듣고 있다. 이 순간.
모든 세상사 이와같은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하나의 결과, 또한 그 연속이겠거니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어떤 '거시적' 담론에 의해 현재의 '순간'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또는 틀에 박힌 원론적 말들만 내밷는 부류들과 거리를 두겠다.


2010.10.15 21:07

스윗스모크에서

그런것 같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존재인가 보다. 난 지금 현재 '외롭다'. 근데 난 '외롭지'않다. 난 아무것도 부족한게 없다. 아무것도. 그런데 이렇게 이런 수간에는 한없이 '외롭다'. 왜 그런가? 정말 내가 외로운 것일까? 그런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닌것 같다. 그건 다 '생쑈'다. 그냥 외롭게 '보여지고'싶은가 보다. 외롭게 보여지는게 '멋있어' 보이나? 아니면 그렇게 해야 나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다 생각하는건가?
"너 그러면 안돼" * 3

내 옆 뒷 테이블에서 여자 2명 남자 2명이서 애기를 한다. 근데 대화내용을 들어보니 이 지역(광화문 뒷골목) 특성상 아마도 외교부나 교과부에 근무하는 사람들 같다. 대화 내용상 어떤 상급자가 바뀌어 온듯하다. 근데 그 사람에 대해 불만이 많은것 같다. 학교나 일반 직장 어디나 사람들의 불만은 있고 그 불만을 해소할 '경로'는 필요한 듯 하다. 그게 '수다'든 '술'이든 '음악'이든.


2010.10.15 21:37

세종문화회관 뒷편에서 

세종문화회관 뒷편 건물의 조명과 하늘 모습이 너무나 멋있다. 그 모습을 담고 싶어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내가 '눈'으로 본 '느낌'과는 너무나 다른 '사진'.
얼마전 미국의 애플사에서 사진의 보정 기술이 진일보한 사람의 '눈'으로 본 모습과 유사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근데 웃긴 사실은 '그것'에 대해 논란이 많다는 것이다. 뭐 이런거다. "그 기술은 사실을 왜곡한다", "사진은 그런 기술로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의.
순간 세종문화회관 뒷편의 밤하늘 풍경과 그 사진을 찍으며 느낀 생각, 결국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과 같은 사진을 끊임없이 찍고 남기고 싶어하지만, 그 꿈이 너무나 쉽게 단순 기술에 의해서 '현실화'되는것을 원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 그건 '현실'도 아니고 '사진'도 아니기때문이다. 그건 '인위'다 그럼 인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진'이란 무엇일까? 그건 '기술'에 의한 현실의 단순 모방이 아니라,인간의 '눈'에 의한 그 순간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2010.10.15 22:33

우성아파트 마트 앞에서

오늘따라 , 물론 술을 좀 먹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생각들이 많이 든다. 하늘을 봤다. 오늘따라...문득 많이 올려다 봤다. 구름이 많다. 좀 전에 봤던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 하늘과 지금의 하늘은 또다른 모습이다. 하늘도 이런데, 인간의 모습은 어떨까? 변하는게, 바뀌는게, 배신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당연한. 예전에 몰랐다. 그 당연한 '이치'를 이해할수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만약에 그래도 그 '상황'을 이해하거나 수긍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그냥 내 지금 상황에서 생각하는 내 '가정'일 뿐이다. 그래서 난 지금 현재의 내 모습, 상황에 감사할 뿐이다.
한때는 나의 모든 상황과 모습을 원망하고 괴로워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오해할 필요 없다. 인간에게는 '관용'만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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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감수성' 있는 글이 난 좋다. 난 태백시와 관련된 수업을 하며 석탄, 과거, 쇠퇴, 관광, 석탄박물관, 경제활성화 같은 말들만 했지,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태백시의 '속살'은 보지 못했다. 아니 보려 하지 않은 듯하다. 뭐 내가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다 알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살'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야만 진짜 '지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보지 않는 보려하지 않는 '속살'을 보려면 그 많큼의 노력과 감수성이 필요하겠지, 그것은 많은 경험과 독서를 통해 길러지기에 앞으로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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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0.16  태백석탄박물관 

월간 <현대시>가 주관하고 태백시가 후원하는 문학제가 지난 주말 태백에서 열렸다. 나는 그 행사의 일환인 문학토론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내가 태백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 추억은 다른 지면에서도 상세히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지금은 태백시가 된 황지의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 가는 옛날의 일이고 내가 황지에 머문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되지만 그때 내가 본 풍경과 느꼈던 감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아마도 10월 하순경이었을 터인데, 두꺼운 옷도 준비하지 못한 나에게 황지는 서울의 한겨울 못지않게 추웠다. 작고 낮은 집들, 포장이 안 된 도로, 거리는 온통 시커멓게 탄가루를 둘러쓰고 있었고, 마을을 둘러싼 솔밭에서는 길고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렸다. 검은 길바닥에는 여기저기 개숫물이 얼어붙어 있고, 거기 함께 얼어 있는 밥풀을 떼어 먹으려는 듯 역시 탄가루를 둘러쓴 여윈 개들이 안타까운 혀로 검은 얼음을 핥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적막하고 적막한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도록 검은 풍경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새파랗고 햇빛은 다른 세상의 햇빛처럼 찬란했다. 나는 춥고 배가 고팠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더 고양되어 있었다. 아마도 인간에게 전혀 호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연, 날카롭게 날이 선 돌과 바람과 흙에 자기 육체를 직접 부딪치고 사는 그런 삶의 개념을 그 풍경 속에서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찾아간 태백시에 옛 황지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마을은 시가지의 윤곽을 완연히 갖추었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제법 높은 현대식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었다.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시내 한복판의 작은 못 황지를 기준으로, 내가 하룻밤을 기숙했던 여인숙의 방향을 겨우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풍경의 편린이라도 내게 다시 보여준 것은 행사 뒤에 방문한 ‘태백석탄박물관’이었다. 석탄산업이 퇴조하고 탄광촌이 고원휴양도시로 바뀌면서 ‘이 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온 그 긍지와 고통이 ‘관광문화자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석탄박물관으로는 동양 최대를 운위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이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광물과 동식물의 화석부터 소개했다. 석탄의 과학, 석탄의 경제, 석탄의 문화, 석탄의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석탄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적 전시는 갑자기 한 편의 드라마로 바뀌었다. 이 화석연료를 캐던 광산의 역사가 전개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베잠방이를 걸치고 괭이와 지게로 석탄을 캐어 나르던 선조 광부들의 그림, 징용을 당해 일본의 광산에서 인간의 삶이 아닌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광부들의 사진과 아직도 이역의 절간에 쌓여 있는 그들의 유골 사진이 벽에 붙어 있고, “탄굴 파서 벌아봐야 햇빛 보면 맥 못 추고 첫날부터 외상술에 퇴직금은 빚잔치”라는 ‘탄광 아리랑’의 노랫말처럼, 지난 시절 희망도 없이 막장에서 육체를 소모하던 광부들의 노동현장과 생활상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내가 옛날에 본 방 하나 부엌 하나 지붕 낮은 판잣집도 거기 있었고, 그 작은 마당에서 땅에 금을 긋고 놀던 아이들도 거기 있었다. 그 거대한 박물관은 우리 역사의 화석이었다. 그 무심한 돌들은 거기에 지긋하게 눈길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마음을 타고 물이 되어 흘러나온다. 울고 나오는 영화관은 많지만 울고 나오는 박물관을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화석의 슬픔에 감히 문화자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 사회가 발전한 덕분일 것이다. 저 광부들의 고통과 거기 감춰져 있는 작은 희망과 함께 민주의식이 크게 성장하였고, 인의의 귀중함도 알게 되었다.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440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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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에서 나오는 잎새통문 10월호에 나온 책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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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생명에 바치는 치열한 기록

한강의 기적 


한강을 살리는 책이 나왔다. <한강의 기적>은 강바닥의 모래를 파내고 콘크리트를 바르고 댐처럼 거대한 보가 세워지고 있는 현재의 한강을 복원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디. 4대강 사업에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박창근 교수, 최병성 목사, 홍성태 교수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2009년 10월부터 여러차례 세미나와 현장답사, 리서치 등 한강 '탐구'를 한 뒤 그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렇다면 다향한 자료와 사례를 바탕으로 연구를 해온 필자들의 결론은 무엇인가? 첫번째 걷어낼 수 있는 콘크리트를 걷어낸다. 두번째 유람선을 띄우려고 수위 조절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기능이 없는 신곡보와 잠실보를 철거한다. 그렇게 되면 한강 곳곳에 모래톱이 생겨나고 강변에 넓고 완만한 모래와 자갈밭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개체수가 급감했던 남생이와 자라 등이 번식하고 한강을 떠났던 도요, 물떼새가 다시 찾아 올 것이다. 또 다양한 습지식물이 들어와 한강의 경관은 다양한 새들과 풀, 나무로 바뀔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워진다. 그럼 정말로 한강의 보를 철거하고 콘크리트를 걷어내도 괜찮을까? 필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를 철거해도 한강의 수위와 수면 폭과 수심은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오히려 보 때문에 '고여 있어' 나빠진 수질을 개선할 수 있으며, 취수에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강 둔치의 콘크리트를 걷어내면 생태계는 살아난다. 1968년 폭파된 밤섬이 그냥 내버려뒀더니 스스로 살아나듯 말이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도심속의 철새도래지 밤섬은 람사르 습지 등록을 눈앞에 두고 있따. 하지만 도심 속에서 '야생의 습지'를 그대로 간직한 밤섬은 대규모 토목공사인 한강운하가 중단되지 않고 신곡수중보가 철거되지 않는다면 유지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강의 기적>을 읽으면 한강복원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 모래톱이 되살아나고, 도요새와 물떼새, 큰고니가 날아오고, 은어와 황복, 황쏘가리가 돌아오고, 물억새와 갈대숲이 무럭무럭 자라는 한강...콘크리트가 아니라 모래톱이, 개발이 아니라 복원만이 한강을 살릴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기적은 신비로운 무엇이 아니라, 30년 전의 한강 모습이다. 한강과 별로 관계도 없는 경제성장의 이야기인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사라진 모래밭과 새들 그리고 물놀이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되살리자는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강종합개발사업 기공식(1982년 9월23일)에서 한, "우리는 필요와 편의에 의해 그동안 일방적으로 혹사해 왔던 한강에 우리들의 정성을 되돌려줘야 할 바로 그때를 맞이했습니다"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 뿐이다.(9쪽, <한강의 기적>)
 

4대강 토건공사에 대한 진실 보고서 

나는 반대한다 


"4대강 공사를 왜 해서는 안되는가? 이것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처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다." 수많은 토건개발의 실상을 밝혀온 한국의 대표적 환경학자 김정욱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양심을 먼저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김정욱 교수는 "정부가 논리로 말하겠다면 나 역시 이 책에서 논리로 말하겠다. 나는 40여 년 연구해온 환경공학을 기반으로 정부의 모든 주장을 검토해보았지만 단 하나의 타당성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과학과 상식에 입각한 풍부한 자료와 손으로 그려낸 도표와 생생한 사진들이 4대강 토건공사의 실상과 문제점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현장기자의 강 살리기 정책 제안 

한국의 5대강을 가다 (책이 검색되지 않는다)

내일신문에서 오랫동안 환경을 전담해왔던 남준기 기자는 자신이 '모래의 강'이라고 부르는 낙동강을 설명하면서 진정한 강 살리기는 강의 자정작용에 기대어야한다고 강조한다. "낙동강의 특징은 금빛 모래톱입니다. 흔히 강에는 강물만 흘러가는 줄 알지만 하상의 모래도 강물과 함께 끊임없이 흘러내려갑니다. 모래는 수질 정화작용이 뛰어난 물질입니다. 낙동강이 웬만한 오염에도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비법은 바로 모래의 여과작용입니다." 10여년 동안 낙동강, 섬진강, 영산강, 금강, 한강에서 5번이나 발원지에서부터 탐사해온 남준기 기자는 무려 370여 컷의 사진과 200자 원고지 600매 이상의 텍스트로 강의 생생한 현장을 엮어냈다.


4대강 사업의 진실과 거짓 

강은 살아있다 


"여러분은 수상스키를 타기 위한 수로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할 수 있는 여울과 모래밭이 있는 지금의 4대강을 원하시나요?"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쉽게 폄하되기 일쑤다. 여기에 대해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는 "그러나 '찬성을 위한 찬성'이 더 위험합니다. 국민과 국토와 생명에 대한 국가권력의 폭력을 옹호하는 무책임한 행위기 때문입니다."고 역설한다. <강은 살아있다>는 발로 쓴 책이다. 최병서 목사는 대운하가 4대강 사업으로 바꿔치기 된 지난 2년 남짓 동안 강의 현장을 발로 뛰며 사라질 비경과 생태계를 카메라에 담고 관련된 책과 논문을 독파해나갔다. 그의 말대로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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