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지리학 :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21
박승규 지음 / 책세상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당연히 논문은 검색이 되지 않아, 일상의 지리학 관련 리뷰로 내용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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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숙일을 보았다’를 보았다

흔히들 서평하면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단행본에 관한 글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생뚱맞게도 석사학위 논문과 관련된 내용이다. 논문이지만 조그만 문고본 정도의 분량으로 볼 수 있으니 단행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시중에 학위논문을 정리해 출판하는 책들도 상당히 많다.(현재 춘천교대에 근무하시는 박승규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일상의 지리학 :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가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언제 기회되면 이 책에 관련된 글도 쓰고 싶다) 내가 애기하려는 논문은 <거리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서울역 거리노숙인을 중심으로- >이다. 개인적으로 단행본 형식으로 출간되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약 한 달 전에 한겨레21에 실린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처음엔 뭐 일반적인 ‘노숙인’관련 기획기사겠지 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20대의 한 대학원생이 서울역에서 ‘생’으로 노숙생활을 하며 직접 몸으로 마음으로 부딪쳐가며 그네들의 ‘말’과 ‘행동’을 바탕으로 작성한 석사학위 논문에 관한 기사였다. 일종의 사소한 그리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문화인류학 분야에서 주로 사용하는 참여관찰법을 지리학에서도 활용할 수 있구나 하는 번뜩임이 들었다. 기사를 읽은 후 바로 경희대 지리학과 사무실로 수소문을 해 연구자와 통화한 후 논문을 우편으로 받아 바로 읽었다. 논문의 시작은 연구자의 주류 사회의 노숙인에 대한 시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에 관한 의문에서 출발 되었다고 한다. 노숙인에 대한 기존 연구가 대부분 연구자 신분으로 설문지 작성이나 구술면접을 통해 작성된 것이어서 한계 분명하며, 바로 이점이 직접 연구자가 노숙인 생활을 시작한 이유이다. 촬영과 기록이 어려워 화장실에 숨겨놓은 노트에 3,4일에 한 번씩 기록을 했다고 한다.

연구자는 논문에서 “노숙인은 시도 때도 없이 구걸하거나 잠만 자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대로 공공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공공 공간에서 권리를 찾지 못하는 노숙인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을 찾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결론에서 언급하듯이 “본 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거리노숙인과 그들의 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이러한 과정이 갖는 함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차이의 공간’ 그 자체가 주는 함의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한다. 거리노숙인들이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차이의 공간’은 과언 어느 정도 선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즉, ‘차이의 공간’을 통해 거리노숙인을,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판단할 것인가? 이것이 합당한가?”라는 연구자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노력만으로도 연구의 의의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이런식의 대안은 없고 문제 제기만 하는 행동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폄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 근본적인 부분을 덮어버린 채 ‘현실적’인 애기만 할 수는” 없다, “이상주의자로 비치더라도, 또는 탁월한 대안을 제시할 역량까지는 비록 갖추지 못했더라도, 한 번쯤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거리’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현 시대는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평가받으며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자본주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올바른 시민의 상’이 존재한다. 아마도 서울역 노숙인들을 대한민국의 당당한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 ‘부적응 존재’들의 ‘현실태’이거나, 바람직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사회의 충실한 ‘순응자’, ‘하수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ps : 연구자가 어느 매체에 쓴 기사의 글 일부이다. 참고해 볼만 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리 노숙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래서 시스템에 동화되지 못하는 그들을 제재하거나 강제로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주류 사회의 시도는 굉장히 ‘타당하게’ 비친다. 결국 필자는 “‘틀림’이 ‘다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주류 사회는 시스템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통일성’을 주요 가치로 내건다. 이 과정에서 ‘차이’는 ‘틀림’이 돼버린다. 거리 노숙인을 노마드적 주체로 바라보는 이상적 세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름’이 ‘틀림’이 돼버리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굉장히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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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글을 쓸게 있어 읽은 책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다. 책 한권과 얼마 전에 읽은 논문 관련 글을 쓰기로 했다. 얼마 전 한겨레21에서 <나는 노숙인을 보았다>라는 장문의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를 통해 알게된 논문이다. 김준호씨가 쓴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논문 <거리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서울역 거리노숙인을 중심으로->가 주인공이다. 리뷰 기사를 읽고 책을 사고 읽은 적은 많지만 그 주인공이 논문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읽기도 쉽고 내용도 상당히 유익했다. 리뷰 글은 조만간 올릴 예정이다. 관련 글을 찾다 논문 저자의 글도 있어 스크랩한다. 

ps : 아래 기사 제목만 보면 상당히 '불온'해 보인다. 뭐 난 그런 '불온'함을 좋아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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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0.09.10 제827호  왜 노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가 

[표지이야기]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 노숙인을 공공성의 이름으로 배제하는 시스템에 반대한다 
 
올해 초 필자가 논문을 쓰기 위해 서울역에서 70여 일가량 거리 노숙을 감행했을 때, 서울역을 지나는 시민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젊은 놈이 열심히 일해서 먹고살 생각은 안 하고…”였다. 그럴 만도 하다. 서울역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노숙인 나이가 50대 이상인 상황에서 필자는 굉장히 어린 축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이는 ‘젊은 놈’에 초점을 뒀을 때이며,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 것’으로 초점을 옮겨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요컨대 필자는 굉장히 근본적인 부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노숙인의 ‘자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노동’을 하는 자만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간주되는가? 바꿔말해, (현 사회가 요구하는) 자립은 왜 당연한 것이며, 노동을 원하지 않는 노숙인은 어째서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들이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 지적일 뿐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구체적 대안도 없는 추상적 수준의 비판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다. 언제까지 계속 근본적인 부분을 덮어버린 채 ‘현실적’인 얘기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설령 필자가 이상주의자로 비치더라도, 또는 탁월한 대안을 제시할 역량까지는 비록 갖추지 못했더라도, 한 번쯤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 ‘거리’임에는 분명하다.

시민이지만 시민이 아닌 존재

흔히 사회적 소수자로 간주되는 집단은 대부분 나름의 뚜렷한 정체성을 갖지만 거리 노숙인은 다르다. 분명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서울의 시민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음에도, 심지어 사회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국민이나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는 거의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여기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저기에 위치한 것도 아닌, ‘경계’에 걸쳐 있는 형국이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위치지어버렸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자본주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 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금 시대는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평가되며,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가 권장하는 ‘바람직한’ 시민의 상(像)이 존재한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에 ‘순응’하고 여기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거리 노숙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이다.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시민이지만 시민이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 때문에 발생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낙오자’인 거리 노숙인을 ‘구호’한다거나 그들이 ‘자립’하도록 이끈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반하는 그들을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 끌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권’이나 ‘사회복지’라는 잘 차려진 옷을 입고 드러나긴 하지만 말이다. 

이쯤이면 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든 뭐든 다 떠나서 거리 노숙인은 시민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그렇다면 필자도 할 말이 있다. 당신이 말한 사실이 일반화 가능한 것이냐고. 다시 말해, 당신이 경험한 ‘피해를 주는 노숙인’은 전체 노숙인 중 ‘일부’일 뿐임을 아느냐고. 요컨대 평범한 거리 노숙인, 즉 시민의 기준에서 표준 행동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노숙인은 애초에 눈에 띄지 않는다. 결국 노숙인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 노숙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거리 노숙인이 살아가는 서울역 등 공공 공간에는 ‘공공의 가치’가 담겨 있다. 그러나 공공 공간에 담지된 공공성은 ‘누구에게나 열린 중립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에게만 허용되는 배타적 공공성으로 개념화돼 있다. 결국 공공 공간의 거리 노숙인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저해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그래서 ‘부정’돼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들은 주류 사회, 그리고 주류 담론이 장악한 공공 공간이 요구하는 특정한 방식·규칙·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공공 공간으로부터 공공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오히려 공공성의 미명하에 추방되고 격리된다.

그들의 ‘인도적’ 은폐

지난 2005년 1월, 서울역 거리 노숙인 2명이 잇따라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노숙인과 경찰 간 실랑이가 벌어졌고, 바로 며칠 뒤 서울시는 ‘역사 내 노숙인 단속 및 예방 대책’을 발표했다. 목표는 물론 ‘거리 노숙인 추방’이었다. 이때 서울시가 단속의 근거로 내세운 노숙인 문제점의 주요 골자는 사회적 안전을 위협하고 환경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발생한 ‘노숙인 사망으로 인한 (노숙인들의) 역사 내 난동사건’을 비롯해 노숙인이 야기한(혹은 노숙인이 야기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사고들이 사례로 언급됐다. 물론 ‘뉴욕 지하철 노숙자 실화 화재사건 관련 개황(요약)’이라는 또 하나의 자극적 사례를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서울역 쪽의 책임이 거론됐을 만큼 의문스러웠던 노숙인의 죽음 정황은 철저히 배제된 채, 그들을 추방·격리할 근거가 되는 사례만 선별적으로 제시됐던 것이다. 결국 서울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부합하는 시민’의 안전과 권리 보호를 위해, 그리고 ‘공공 공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 노숙인의 공간적 배제를 합리화했다. 또한 추방의 대안으로 ‘보호시설’을 제시함으로써 특정 공간으로 그들을 포섭할 수 있는 기제까지 갖추었다. 결국 배제의 기제와 포섭의 기제가 공존하는 이런 방식을 통해 서울시는 ①공공 공간에서 거리 노숙인을 추방할 수 있었고, ②‘보호시설 입소’라는 명분을 제시함으로써 노숙인의 인권을 고려한 ‘인도적’ 대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으며, ③지배사회가 권장하는 공간(쉼터·시설 등)으로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으로의 재편입을 꾀할 수 있었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앞둔 지금, 정부는 임대주택을 매입해 노숙인에게 ‘그룹홈’을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기존 쉼터는 항상 인원이 초과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자활 의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을 갖춰 정상적인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추진 중인 사안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결국 거리 환경 정비를 통해 거리 노숙인을 은폐하려는 전략적 공간 배치의 일환일 뿐이다.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거리 노숙자들에 대한 특별보호대책’을 발표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거리 노숙인은 ‘공공 공간에 있으면 안 될 존재’ ‘사회적으로 은폐해야 될 존재’로 치부됐기에 ‘국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노숙인 대상 인문학 수업은, 공공 공간의 배제와 포섭에 응하지 않는 거리 노숙인에게 가해지는 ‘제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인문학을 통해 그들의 자립 의지를 키우게 한다는 취지로 개설된 서울시의 무료 강좌다. 수업에 참여한 사람은 시에서 주도하는 일자리 배정에 우선권이 주어진다. 문제는 쉼터나 시설에 입소한 노숙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거리 노숙인은 제외된다는 사실이다. 공간적 재배치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전략의 도구로 인문학 수업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거리 노숙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래서 시스템에 동화되지 못하는 그들을 제재하거나 강제로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주류 사회의 시도는 굉장히 ‘타당하게’ 비친다. 결국 필자는 “‘틀림’이 ‘다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로 점철된 주류 사회는 시스템을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통일성’을 주요 가치로 내건다. 이 과정에서 ‘차이’는 ‘틀림’이 돼버린다. 거리 노숙인을 노마드적 주체로 바라보는 이상적 세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름’이 ‘틀림’이 돼버리는 세상이라면 그 사회는 굉장히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김준호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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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세계를 바꾼다
니혼게이자이신문사 지음, 강신규 옮김 / 가나북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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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전에도 글을 부탁받아 책 리뷰 글을 한번 써보았는데, 같은 부탁을 또 받아 리뷰를 작성했다. 허접하지만...글은 자꾸 써야지 늘듯 하다.

2010.11.16  인구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세계 

최근에 경험한 일을 시작으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결혼하면서 살기 시작한 아파트에서 얼마 전 이사를 했다. 만으로 약 3년 정도 살았는데 정이 들었는지, 이사할 생각을 하니 좀 아쉽운 마음이 들었다. 이사하기 전까지만. 막상 이사를 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새 집에 적응을 했다.(같은 단지에 조금 큰 평수대의 집으로 이사했다) 새로 이사한 동이 좀 큰 평수라 그런지 전에 살던 동에서는 아이들도 많이 보이고 신혼부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여기는 대부분 50대 이상의 주민들만 보인다. 그리고 아기를 돌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사는 곳에 따라 그곳의 인구 구성원이 다르니 분위기가 다른 것이 당연하겠지만, 동마다 이렇게 차이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분위기가 사뭇 달라 멋쩍은 적이 많다. 예를 들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아주머니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든가 시시콜콜한 애기들을 하는 등 아파트(?)같지 않은 주민들간의 친근한 모습들이 나에게는 아직 어색하기만 하다. 근데 문제는 이런 친근함이 어색함을 넘어 불편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주민들간의 ‘협의’ 되었다는 명목하에 아파트 옥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웃어 넘겼다. 하지만 갈수록 도가 지나치게 경비아저씨가 제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데 항의하는 건지 따지니, 4층에 사는 사람인데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관리사무소에 가서 따졌더니 관리소장이라는 사람도 뭔가 않다는 듯이 대답을 하더라, 내가 보기에는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연히 밤에 쓰레기를 버리려 나왔다가 그 4층에 사는 사람을 만났다. 이 사람은 예전에 주민들간의 합의된 사항이고 주차장에서 애들이 노는데 차들이 왔다 갔다 하면 위험하고, 공기도 나빠진다며 지상 주차장에 주차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것들은 다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 1층과 2층 사이 중간층에 엘리베이터 승강장이 있는데 계단만 있고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라든가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가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아주머니한테 애기가 있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기 불편하다고 하니, 이 아주머니 왈 “휠체어 타는 장애인들도 다 지하에 주차하고 잘들 다닌다.”, “같이 사는 공동체이니 협조해 달라”라는 것이다. 도무지 약자인 장애인들과 신경쓸 것이 많은 아이 엄마들에게 고통을 당연히 요구하는 그 아주머니의 어긋난 공동체 의식에 난 할 말을 잃어 버리고 흥분하여 대화를 마무리 했다. 비단 이런 일이 이 아주머니 한 사람의 의식차원의 문제일까? 우리 주위에는 사람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주위의 도시 환경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휠체어, 유모차가 다닐 수 없는 곳들이 너무도 많다. 한번 상상을 해보라 만약 나 혼자 유모차를 끌고 서울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2시간 동안 돌아다닌다면 나에게 어떤 장애물들이 다가올지?

2010년 대한민국은 온통 저출산과 고령화에 대한 애기들로 넘쳐나지만 막상 실질적으로 왜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지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것이 현실이다. 바야흐로 인구문제가 ‘진짜 문제’인 시대인 것이다. 오늘 소개할 <인구가 세계를 바꾼다>는 일본의 일간신문 니혼게이자이 기자들이 인구라는 렌즈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인구가 정치, 경제, 사회, 국제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힌 책으로 2005-2006년 같은 신문에 연재된 기사들을 정리한 책이다. 책은 1장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인구문제’, 2장 ‘사회적 불균형과 왜곡’, 3장 ‘대이동 시대의 빛과 그림자’, 4장 ‘저출산의 충격’, 5장 ‘비즈니스 지각변동’, 6장 ‘인구에 농락당하는 국가와 세계’ 총 6개의 챕터로 나뉘어 있으며, 챕터마다 ‘데이터로 읽는 미래’와 전문가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 책은 ‘인구가 곧 정치’라는 명제를 가지고 취재한 해외 각국의 사례들을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터키의 EU 가입 문제이다. “2005년 10월부터 유럽연합 가입에 나선 터키의 인구는 7400만 명 가량이다. ‘인구는 앞으로 20년 동안 약 25퍼센트 늘어날 것’”이다. “유럽연합통계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터키의 출산율은 2006년 2.35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14세 이하 비율도 대략 30퍼센트로 유럽연합 확대 전인 기존 가입국 15개국보다 2배나 높다. 35세 이하는 63퍼센트에 달한다. 이에 반해 2006년 말 기준으로 유럽연합 국가 중 인구가 가장 많은(약 8270만 명) 독일은 출산율이 1.33에 지나지 않아 2년 연속 전년도 인구를 밑도는 감소 국면에 들어서 있다. 빠르면 2010년대에는 전체 인구에서 터키가 독일을 앞지를 것이다.” 위와 같은 인구 변화는 단순히 수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새 가입국 터키는 유럽연합 내의 의사 결정에서 독일과 똑같은 14퍼센트 가까운 투표권을 쥐게 되며, 유럽의회에서 12퍼센트의 의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인구가 정치 주도권을 지배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인구 변화는 정치적 역학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다. ‘자살자 수 연간 5만 명’, 어느 나라 일까? 우리와 가까운 러시아의 애기다.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1000명 당 자살 건수를 나타내는 ‘자살률’ 상위 10개국에 속하는 나라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옛 소련 제국 7개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 ‘소련이 붕괴한 후 급속히 진전된 경제·사회 변화의 흐름에 뒤처진 사람들이 ’외상성 신경증’에 빠져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유명 연예인의 잇따른 자살과 증가하는 자살률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데, 러시아는 정치적 급변과 사회·경제적 특징으로 인해 증가하는 자살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어 남의 나라 애기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와 좀 다른 부분도 있다. “러시아에서 자주 일어나는 자살의 특징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보다 6배나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50대 이상에서 자살률이 높아지는 선진국과는 달리, 2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한창 일할 나이인 남성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보드카 등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는 전통과 민족성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많은 전문가가 자살의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빈곤’을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3000만 명에 이른다는 알코올 의존자의 남녀 비율은 6대 1이며, 교통사고 사망자는 30세까지 남성의 비율이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남성 평균 수명이 59세로 짧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참고로 2010년 현재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 75.9세이다) 이 밖에도 미국의 인구 이동 특징, 경제 발전을 위해 정부까지 나서 해외에 인력을 송출하는 필리핀이 두뇌 유출로 오히려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현상, 이민자들의 선거권이 국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 등 다양한 지구촌 모습들이 도표와 그래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읽기 편한 책의 크기와 정감 가는(개인적으로 약간 누런색의 용지를 좋아한다, 필기하기도 좋고 종이에 연필 스치는 느낌이 너무 좋다) 종이 재질도 장점 중 하나라고 애기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국가별 단편적인 내용만 나열했을 뿐이며, 나열한 인구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에 대한 고민은 전무한 편이다. 5장 ‘비즈니스 지각변동’을 보면 “농산물을 놓고 자동차 연료와 식량이 서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 국제식량정책연구소의 폰 브라운 소장은 ‘에너지와 식품 가격이 같이 움직이면서 양자의 수급 상황이 불안정해지는 시대에 돌입했다’고 경고했다. 그로 말미암아 농산물 발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이른바, ‘에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에 대한 현실 인식은 표피적인 수준에 국한되어 있다. 에그플레이션을 식량과 에너지문제로만 또한 세계의 식량 수급 문제를 단순히 브릭스 국가의 인구 증가에만 두기에는 현실의 다국적 곡물 기업의 횡포와 파워가 너무도 큰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군데군데 번역의 어색함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년도를 표기하는데 있어, 1797년을 정조 21년이라고 애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건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데이터로 읽는 미래-세계 인구의 3분의1이 이슬람교도’ 부분에서 이슬람교도수를 두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내용의 앞뒤 그리고 그림 설명이 매치되지 않는 부분들은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하지만 교양적 수준에서나 고등학교 세계지리 시간에 학생들에게 동기부여와 인구와 관련된 기초지식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는 좋은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

ps : 박길성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의 인터뷰 중에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적인 대안이 있어 옮겨 적는다. “가정 내에서의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사회에서는 다양한 제도를 거쳐 남녀평등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지만, 가정 내 남녀 평등은 옛 전통과 남녀의 역할에 관한 인식 차이 때문에 뒤처져 있다. 그렇지만 남성도 집안일과 아이 그르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남녀평등 문화를 실현해야 여성이 육아 부담을 덜어 편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남자로서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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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 명예교수로 계신 천병희 교수가  아마도 이쪽 분야에서는 진짜 전문가인듯 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등 원전번역은 선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이쪽 파트는 문외한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조만간에 읽을 예정이다. 예전에 잠깐 관심이 가서 왼쪽 위에 있는 <그리스 비극 걸작선>을 미리 구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적 비극작품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인간사 그 무엇이든 비극 아니면 희극이겠지 하면 그리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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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10  사랑과 분노, 본질은 같은 하나의 불덩어리  

고전 오디세이 ⑭ 뜨거운 연인에서 복수의 화신이 된 메데이아 
 
 

» 남편의 배신에 대한 복수와 자식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는 메데이아를 주제로 앙리 클라그만이 1868년에 그린 유화. 현재 프랑스 낭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난 일요일의 일이다. 급한 일이 있어 택시를 타게 되었다. 길이 조금 막혔다. 자연스럽게 택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의 말이다.

저는 외국에서 살다가 2년 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 생활은, 숨이 너무 막힙니다. 가끔 섬뜩합니다. 택시 운전을 하니까, 교통 문화가 거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다들 마음에 칼날이 서 있습니다. 혀가 창끝입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격한 반응을 합니다. 다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말입니다. 만나서 소주 한잔이면 뚝 털어버릴 일인데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난 상처들이 너무 깊은 것 같습니다.

노모가 외국 생활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한국에서 모시기 위해 잠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큰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다른 택시 기사들보다는 생계 면에서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가 조금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산다는 지적은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아니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요사이 방송을 지배하는 드라마가 바로 그 증표일 것이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그것이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 편 정도 방영되더니, 요즈음은 우리네 안방을 아예 점령해버렸다. <문화방송>(MBC)의 <황금물고기>, <에스비에스>(SBS)의 <자이언트>, <한국방송>(KBS)의 <제빵왕 김탁구>와 같은 인기 절정의 드라마 한 편쯤은 누구나 볼 것이기에 말이다. ‘막장’이라 하면서도 드라마에 열광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들이 ‘복수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복수극에 열광하면서 몰입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다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다던 택시 기사의 말에서 찾고자 한다. 이 “가슴에 불덩어리”가 바로, “어떤 사람 혹은 집단으로부터 손해를 입었거나 상처 받았을 때에 생겨나는 심리적인 반응”이라고 <복수의 심리학>의 저자 마이클 매컬러프가 정의한 ‘복수’의 실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슴에 불덩어리가 왜 생기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해명을 심리 분석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해명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이른바 복수극의 원조인 <메데이아>를 소개하고자 한다.

<메데이아>는 기원전 431년에 상연된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5~406)의 작품이다. 당시 드라마 경연 대회에서는 3등을 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막장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의 도구로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식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할 정도의 ‘불덩어리’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또한 어쩌다가 그토록 활활 타올랐을까? 사연인즉 이렇다. 옛날 그리스의 이올코스라는 지방에 펠리아스(Pelias)라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당시 이 지역을 통치했던 아이손(Aison)이라는 왕을 내쫓고 왕권을 차지해버린다. 이에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Iason)이 왕권의 반환을 요구한다. 그러자 펠리아스는 이아손에게 황금양 모피를 찾아오면 왕권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이아손은 ‘아르고’(Argo)라는 배를 타고 흑해 연안의 콜키스라는 지역으로 간다. 이아손은 그곳에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이에테스(Aietes)의 딸이었던 메데이아(Medeia)를 만나게 된다. 첫 만남의 순간을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기원전 43~기원후 17/18)는 이렇게 묘사한다. 
 

왕이 미뉘아이족에게 무시무시한 고역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동안에/ 메데이아 가슴에는 사랑의 뜨거운 불덩어리가 타올랐다.(<변신 이야기> 제7권 7~9행) 
 

사랑의 불길을 꺼 보려 애써보지만, 메데이아는 결국 사랑의 불덩어리를 온 가슴에 품는다. 사랑을 위해서 그녀는 아버지의 나라 콜키스를 배반한다.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 압시르토스가 이아손을 추격하자, 그를 서슴지 않고 죽여 버린다. 사랑을 위해서 그녀가 못할 짓은 어떤 것도 없었다. 황금양 모피를 바쳐도 왕권을 이양하지 않자, 그녀는 펠리아스를 토막 내어 살해해 버린다. 그것도 펠리아스의 딸들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을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올인’했고, 마침내 이아손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아손이 이올코스에서 코린토스로 추방당한다. 하지만 아이도 둘이나 낳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행복은 여기까지다. 어느 날 가난과 추방 생활에 지친 남편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공주 크레우사와 새 결혼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메데이아의 반응이다.


아아, 아버지! 아아, 조국이여! 수치가 밀려오네요./ 아아 이러자고, 오빠까지 죽이며 고향과 조국을 배신했단 말인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165~167행)


사랑에 올인한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대사다. 사랑의 불덩어리가 분노의 불덩어리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번에는 복수에 그녀는 모든 것을 건다. 메데이아를 두려워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복수의 실행에 필요한 하루의 말미를 얻은 그녀는 결혼 선물로 독이 묻은 드레스와 머리띠를 아이들의 손에 쥐여 보내어 왕과 공주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복수의 절정에 이르러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도 죽여 버린다. 이아손의 혈통을 끊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큰 복수이고, 어차피 자식들이 코린토스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히 막장의 극치라 하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 복수극이 아니다. 그래도 고전의 반열에 드는 비극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저울질한다면, 어떤 것이 더 힘 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메데이아>의 핵심 쟁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가슴의 불덩어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사랑의 불덩어리나 분노의 불덩어리가 실은 같은 힘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힘이 크면 클수록, 배신에 대한 분노의 힘도 그만큼 큰데, 헌신이 배신으로 돌아올 때에 사랑의 힘이 분노의 힘으로 그 모습만 바꾼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사랑과 분노는,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본체는 같은 ‘어떤 것’인 셈이다. 요컨대, 그 ‘어떤 것’이 메데이아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덩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불덩어리’가 실은 막연히 생겨난 충동은 아님에 주목하자. 메데이아의 사랑이 분노로 바뀐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남편 이아손이 교환 정의(iustitia commutativa)의 규칙을 어겼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도 기본적으로 주고-받음이고, 따라서 오고-감(去來)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헌신에 대해서 이아손이 돌려주는 것은 배신뿐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누군가에게 뜨거웠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애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며,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뜨겁게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오는 것이 배신이라면, 가슴은 다시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가슴의 불덩어리’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그 사랑이 근본적으로 정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무엇인 한, 사람은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러니까 정의가 사랑의 기본 바탕인 한, 사람들의 ‘가슴의 불덩어리’도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실은 저 ‘가슴의 불덩어리’의 실체일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이 복수 드라마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것도 바로 ‘정의’(正義)를 갈망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안재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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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국가. 범법자. '법대로 하자' 등등 우리들의 일상에서 법과 관련된 일련의 용어 사용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이 알고 있는 '법'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왜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그것에 대해 애기하며 판결하는 법관들의 말에 왜 수긍해야만 하는걸까?

왜? 생계를 위해 불법주차한, 한달에 200여 만원 버는 노점상들에게는 과감하게 과대료를 부과하면서 몇 천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불법, 탈법으로 증여한 대기업과 그 총수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 걸까? 과연 이게 합당한 '법치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받아들여도 좋은 걸까?  

이런 고민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이며 책인듯 하다. 9월달 기사이지만 책상에 쳐박혀 있는 것을 지금에서야 읽고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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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10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 강화의 필요조건  

사회적 맥락에서 본 법치주의
위정자 권력 남용 막으려 도입
‘좋은 법관’이 사법독재 막을 것  
 

 

돌베개 출판사의 ‘석학 인문 강좌’의 하나로 나온 <왜 법의 지배인가>는 법철학자 박은정 서울대 교수의 ‘법치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이다. 지은이는 법 자체를 고립적으로 다루지 않고,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법의 지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문제를 파고든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의 내적 관계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과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해주는 관계에 있으며, 민주주의가 꽃피려면 법의 지배가 꼭 필요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은이는 ‘왜 법의 지배인가’라는 이 책의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법의 지배’라는 말에 대해 먼저 성찰한다. 지은이가 이야기의 실마리로 끌어들이는 것이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의 대표작 <법의 제국>이다. 드워킨은 머리말에서 우리 모두가 “법의 제국의 신하”이자 “법의 방법과 이념의 신하”로서 “정신적으로 법에 얽매여 있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드워킨의 이 말을 법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한다는 법지상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 ‘법의 지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드워킨의 수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법의 지배’는 자칫 오해하면 법지상주의나 법물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가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한다. 법의 지배가 강화되면 민주주의가 오히려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법치와 민주의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도 한몫을 하고 있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가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숙고하게 된 것은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라고 말한다. 민주화 이전 50년 동안 우리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야 할 목표로 생각했으며, “민주주의 씨를 뿌리면 저절로 꽃이 피어 민주법치 사회가 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법부가 대통령 탄핵이라든가 행정수도 이전 같은 정치 문제의 최종 해석권을 행사하면서 ‘법의 지배’에 대한 의구심이 솟아나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의 경우 사법부가 “과거 권위주의 시절 통치체제의 하부구조였던 제도나 관행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민주화 이후 급격한 자율환경에 노출되면서 그 역량을 시험받고 있다”고 말한다. 법의 지배에 대한 사람들의 의구심에 사법부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와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원론적으로 나는 법치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문제제기에 찬성하지 않는다. 강한 사법은 민주주의를 부흥시키고 약한 사법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말해야 옳다.” 지은이가 보기에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다리를 묶고 함께 달리는 ‘2인3각’ 경기의 두 사람과 같은 관계여서 어느 한쪽이 넘어져선 다른 한쪽도 달릴 수 없다. 지은이는 법의 지배라는 이념이 권력자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해 도입되고 발전한 것임도 강조한다. “법치주의는 위정자들이 시민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위정자에게 요구하는 사항”이며 “시민의 준법의식을 강요하기 위한 위정자의 구호가 아니라, 권력의 일탈을 경고하기 위한 시민들의 구호”인 것이다. ‘법치’의 내용도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의 심화와 연관됨을 보여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법치는 권력남용을 제어하기 위해 도입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로 나아갔고, 마침내 자유의 실질적 내용인 사회권을 보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법의 지배야말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인 셈이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치의 사법화’에 대해서도 걱정만 하지 않는다. 정치 문제를 사법적 판단에 맡기는 ‘정치의 사법화’는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다. 헌법규범이 생활규범으로 정착하는 과정의 부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치의 사법화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또 입법권력과 행정권력을 사법권력이 제어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균형 원리에도 맞다. 다만 사법화 경향이 과도해져서 사법부의 권력이 남용에 이르면 ‘사법독재’로 빠질 수도 있다. 요컨대 ‘법의 지배’가 ‘법관의 지배’로 타락하고 마는 것인데,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좋은 법관’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법관이 좋은 법관인가. 지은이는 여러 자질을 거론하는데, 요약하면 “법만 아는 게 아니라 사회문제와 사회의 여망을 아는 법관”이 좋은 법관이다. 또 법관은 소통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그 소통 능력으로 법정을 ‘정의의 극장’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넓게 받아들여 “법정을 합리적 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것은 더없이 중요하다.” 이렇게 좋은 법관이 ‘법의 지배’의 이념에 충실할 때 민주주의가 더 확고해질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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