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국대 명예교수로 계신 천병희 교수가 아마도 이쪽 분야에서는 진짜 전문가인듯 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등 원전번역은 선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이쪽 파트는 문외한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조만간에 읽을 예정이다. 예전에 잠깐 관심이 가서 왼쪽 위에 있는 <그리스 비극 걸작선>을 미리 구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적 비극작품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인간사 그 무엇이든 비극 아니면 희극이겠지 하면 그리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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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9.10 사랑과 분노, 본질은 같은 하나의 불덩어리
고전 오디세이 ⑭ 뜨거운 연인에서 복수의 화신이 된 메데이아
» 남편의 배신에 대한 복수와 자식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는 메데이아를 주제로 앙리 클라그만이 1868년에 그린 유화. 현재 프랑스 낭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난 일요일의 일이다. 급한 일이 있어 택시를 타게 되었다. 길이 조금 막혔다. 자연스럽게 택시 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분의 말이다.
저는 외국에서 살다가 2년 전에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한국 생활은, 숨이 너무 막힙니다. 가끔 섬뜩합니다. 택시 운전을 하니까, 교통 문화가 거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다들 마음에 칼날이 서 있습니다. 혀가 창끝입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격한 반응을 합니다. 다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도 말입니다. 만나서 소주 한잔이면 뚝 털어버릴 일인데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난 상처들이 너무 깊은 것 같습니다.
노모가 외국 생활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한국에서 모시기 위해 잠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큰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다른 택시 기사들보다는 생계 면에서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가 조금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산다는 지적은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아니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요사이 방송을 지배하는 드라마가 바로 그 증표일 것이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그것이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두 편 정도 방영되더니, 요즈음은 우리네 안방을 아예 점령해버렸다. <문화방송>(MBC)의 <황금물고기>, <에스비에스>(SBS)의 <자이언트>, <한국방송>(KBS)의 <제빵왕 김탁구>와 같은 인기 절정의 드라마 한 편쯤은 누구나 볼 것이기에 말이다. ‘막장’이라 하면서도 드라마에 열광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들이 ‘복수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복수극에 열광하면서 몰입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다들,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사는 것” 같다던 택시 기사의 말에서 찾고자 한다. 이 “가슴에 불덩어리”가 바로, “어떤 사람 혹은 집단으로부터 손해를 입었거나 상처 받았을 때에 생겨나는 심리적인 반응”이라고 <복수의 심리학>의 저자 마이클 매컬러프가 정의한 ‘복수’의 실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슴에 불덩어리가 왜 생기고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해명을 심리 분석으로부터 찾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해명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이른바 복수극의 원조인 <메데이아>를 소개하고자 한다.
<메데이아>는 기원전 431년에 상연된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5~406)의 작품이다. 당시 드라마 경연 대회에서는 3등을 했다. 어쩌면, 이 드라마의 ‘막장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의 도구로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식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할 정도의 ‘불덩어리’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또한 어쩌다가 그토록 활활 타올랐을까? 사연인즉 이렇다. 옛날 그리스의 이올코스라는 지방에 펠리아스(Pelias)라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당시 이 지역을 통치했던 아이손(Aison)이라는 왕을 내쫓고 왕권을 차지해버린다. 이에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Iason)이 왕권의 반환을 요구한다. 그러자 펠리아스는 이아손에게 황금양 모피를 찾아오면 왕권을 되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이아손은 ‘아르고’(Argo)라는 배를 타고 흑해 연안의 콜키스라는 지역으로 간다. 이아손은 그곳에서 그 지역을 통치했던 아이에테스(Aietes)의 딸이었던 메데이아(Medeia)를 만나게 된다. 첫 만남의 순간을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 기원전 43~기원후 17/18)는 이렇게 묘사한다.
왕이 미뉘아이족에게 무시무시한 고역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동안에/ 메데이아 가슴에는 사랑의 뜨거운 불덩어리가 타올랐다.(<변신 이야기> 제7권 7~9행)
사랑의 불길을 꺼 보려 애써보지만, 메데이아는 결국 사랑의 불덩어리를 온 가슴에 품는다. 사랑을 위해서 그녀는 아버지의 나라 콜키스를 배반한다.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 압시르토스가 이아손을 추격하자, 그를 서슴지 않고 죽여 버린다. 사랑을 위해서 그녀가 못할 짓은 어떤 것도 없었다. 황금양 모피를 바쳐도 왕권을 이양하지 않자, 그녀는 펠리아스를 토막 내어 살해해 버린다. 그것도 펠리아스의 딸들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이렇게 사랑을 위해 그녀는 모든 것을 ‘올인’했고, 마침내 이아손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아손이 이올코스에서 코린토스로 추방당한다. 하지만 아이도 둘이나 낳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나 행복은 여기까지다. 어느 날 가난과 추방 생활에 지친 남편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공주 크레우사와 새 결혼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메데이아의 반응이다.
아아, 아버지! 아아, 조국이여! 수치가 밀려오네요./ 아아 이러자고, 오빠까지 죽이며 고향과 조국을 배신했단 말인가!(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165~167행)
사랑에 올인한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대사다. 사랑의 불덩어리가 분노의 불덩어리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번에는 복수에 그녀는 모든 것을 건다. 메데이아를 두려워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복수의 실행에 필요한 하루의 말미를 얻은 그녀는 결혼 선물로 독이 묻은 드레스와 머리띠를 아이들의 손에 쥐여 보내어 왕과 공주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복수의 절정에 이르러 자신이 낳은 아이들까지도 죽여 버린다. 이아손의 혈통을 끊는 것이 그녀에게는 가장 큰 복수이고, 어차피 자식들이 코린토스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에서였다.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히 막장의 극치라 하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 복수극이 아니다. 그래도 고전의 반열에 드는 비극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사랑을 저울질한다면, 어떤 것이 더 힘 있고 강한가에 대한 물음이 <메데이아>의 핵심 쟁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가슴의 불덩어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사랑의 불덩어리나 분노의 불덩어리가 실은 같은 힘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힘이 크면 클수록, 배신에 대한 분노의 힘도 그만큼 큰데, 헌신이 배신으로 돌아올 때에 사랑의 힘이 분노의 힘으로 그 모습만 바꾼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사랑과 분노는, 드러나는 현상은 다르지만 본체는 같은 ‘어떤 것’인 셈이다. 요컨대, 그 ‘어떤 것’이 메데이아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덩어리’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불덩어리’가 실은 막연히 생겨난 충동은 아님에 주목하자. 메데이아의 사랑이 분노로 바뀐 데에는 더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남편 이아손이 교환 정의(iustitia commutativa)의 규칙을 어겼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도 기본적으로 주고-받음이고, 따라서 오고-감(去來)의 공정성과 형평성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데이아의 헌신에 대해서 이아손이 돌려주는 것은 배신뿐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한다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누군가에게 뜨거웠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애인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며,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뜨겁게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돌아오는 것이 배신이라면, 가슴은 다시 뜨거워질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가슴의 불덩어리’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군가를 혹은 뭔가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그 사랑이 근본적으로 정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무엇인 한, 사람은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러니까 정의가 사랑의 기본 바탕인 한, 사람들의 ‘가슴의 불덩어리’도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실은 저 ‘가슴의 불덩어리’의 실체일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이 복수 드라마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것도 바로 ‘정의’(正義)를 갈망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안재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