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특히나 보수주의자들의 '수사적무기(rhetoric of reaction)'를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로 정리한 부분은 탁월하다. 나도 때론 내 심정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들을 상대방에게(보수적인) 어떻게 설득하며, 왜 내가 설득당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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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27  결정적 순간 보수는 말한다 “관둬라, 소용없다”  

역효과·무용·위험 강조하며 개혁 가로막는 보수의 논리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닮은꼴’


보수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앨버트 허시먼(1915~)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는 예컨대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 논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시장개입에 부정적인 경제학적 시각에서 실업자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의 일부를 돌리는 ‘이전지급’이 야기하는 갖가지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그런 이전지급 방식들은 ‘나태와 타락’을 조장하고, 의존을 부추기고, 더 건설적인 국가의 다른 부양제도들을 파괴해서,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허시먼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이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들이대는 전형적인 ‘수사적 무기’(rhetoric of reaction, 반동의 수사학)로 든 세 가지 명제 가운데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다.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환경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 추천자 우석훈은 이를 “너희들이 뭘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 “그래봐야 너만 더 힘들어진다”는 말로 요약하면서, 차라리 감세가 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던 이명박 대선 공약,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며 이를 ‘줄푸세’라 불렀던 박근혜 경제공약이 이 명제 위에 선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둘째 명제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futility thesis)다. 셋째는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에 얻어낸 소중한 성취들마저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봤자 소용없어!”라는 얘기다.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는 인간과 사회의 활동 목적을 보는 관점이 거의 정반대다. 역효과 명제는 인간 세계를 매우 변덕스럽다고 보고 그 때문에 변화 시도가 뜻밖의 반작용을 낳는다고 보는 데 비해 무용 명제는 세계가 고도로 조직화돼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고치려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고 본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무용 명제가 역효과 명제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역효과가 나더라도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세계와 개입의 여지조차 없는 세계의 차이. 무용 명제는 마르크스주의 사조에 맞서는 무기였고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도 무용론 중심으로 전개됐다. 
  
 
» 앨버트 허시먼(1915~) 
 
위험 명제를 들이대는 쪽은 복지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왕에 얻어낸 성취마저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1944년에 나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 근거를 제공한 이 명제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동의 위에 구축돼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회구성체는 소수단위가 돼야 한다. 그런데 복지를 위한 국가의 역할 증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결국 강제력이 발동되고 예속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장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는 게 복지국가라는 논리다.

처음엔 미약했던 하이에크 주장의 설득력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일어난 68혁명, 학생운동과 베트남전쟁, 유류파동(오일 쇼크), 스태그플레이션 등을 거치면서 사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하이에크와 위험 명제 옹호 집단이 강력하게 대두한 것이다. 이 시기는 또한 팍스 아메리카나가 상징하는 앵글로색슨(미국과 영연방) 주도하의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장기호황이 끝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 등의 자본가들은 이윤율 저하에 따른 축적 위기를 금융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통해 헤쳐나가려 했고 마거릿 대처의 영국 보수당 정권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공화당 정권이 앞장을 섰다.

자유주의자 허시먼이 1985년부터 포드 재단에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가 다룬 주제를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런 전환기였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의기양양하게 세를 불려가며 사회보장 정책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던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정치적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 행태를 보며 당혹과 불쾌감 속에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며 탄식했다. “과잉복지는 일 안 하고 술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 만든다”거나 ‘복지’를 얘기한다는 이유로 보수정당 리더를 그 정당원들이 ‘빨갱이’라 비난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포드 재단은 그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때 영국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1949년에 행한 서유럽의 ‘시민권 발전’에 관한 유명한 강의를 토대로 그가 말한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 곧 프랑스 인권선언이 대표하는 18세기의 시민적 시민권, 보통선거권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정치적 시민권, 20세기 복지국가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허시먼은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들 모두가 언제나 가공할 힘을 지닌 역추진력의 이데올로기와 맞닥뜨려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 “그런 역추진력들이, 계획하고 있던 진보적 프로그램들을 좌절시키고 때로는 수많은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커다란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복지국가가 지금까지 겪은 격렬한 반발은 18세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주장이나 19세기 정치참여의 확대로 인한 맹렬한 공격과 갈등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편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진보와 개혁을 저지하려던 세력이 18세기 프랑스대혁명 이후 20세기 복지국가 논쟁에 이르는 시기에 동원한 보수주의 담론과 주장, 수사법을 좌우한 ‘논쟁의 규범’들을 역사적·분석적으로 살핀다. 바로 그 가공할 역추진력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역효과·무용·위험 명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등과 함께 동아시아국가들 경제성장 기적에 기여한 “다른 종류의 경제학자들” 중 한 명으로 꼽은 허시먼이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91년이다. 레이건 정권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를 이어받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을 지휘하던 당시와 정치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횡행하는 지금의 한국 사정이 닮은꼴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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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대중성을 떠나 이 나라 산천이 골프장으로 '살점이 떼이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 골프의 스포츠적 특징은 논외로 하더라도 골프를 즐기기 위해 우리가 인위적으로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다. 골프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포츠가 '골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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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22  천연기념물 해안사구 ‘골프바람에 휘청’ 

태안 신두리서 120m 거리 ‘27홀 골프장’ 재추진
토양오염 등 우려…문화재청 현장조사 없이 허가 

 

우리나라 최대의 모래언덕(해안사구)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곳에 골프장 건설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환경단체들은 철저한 생태계·환경영향 조사 없이 골프장이 들어서면 환경오염과 사구 훼손이 불가피하다며 반대해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1일 충남 태안군과 문화재청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태안군 원북면 황촌리 일대 75만여㎡ 터에 사업비 1300억원으로 27홀(정규 18홀, 대중 9홀) 규모의 골프장 건설이 추진중이다. 이곳은 천연기념물 431호인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170만여㎡)와 직선거리로 120m 떨어져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사구 형성과 옛 환경을 밝히는 데 학술적 가치가 큰 곳이다.

사업자인 태안기업과 한국건설산업진흥은 지난 6월 태안군에 주민제안서를 제출하고 골프장 건설에 본격 나섰다. 태안기업은 염전·양식장 자리였던 이곳에 2003년부터 골프장 건설을 추진했지만, 충남도의 국토이용계획 변경 신청 반려로 흐지부지됐던 적이 있다. 2005년 당시 태안기업은 충남도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지난 4월에 골프장 예정 부지가 체육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관리지역으로 변경되면서 사업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현재 태안군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주민 소득 증대를 도모”한다며 골프장 건설에 대한 주민 공람 절차를 진행중이다.

환경단체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골프장 예정지와 해안사구 보호구역의 경계지역에 배수로가 있어 이를 통한 토양 오염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골프장 매립공사로 외부 토양이 유입되면서 해안사구에 점토 지대가 생기고, 그로 인해 사구가 훼손될 가능성도 우려한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 등 양서·파충류가 골프장 농약 때문에 피부 호흡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재청의 대응이 안이하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2005년 태안기업의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이 들어왔을 때 해안사구와 골프장의 거리가 “최소 120m”여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붙여 허가했던 바 있다. 지난 9월 다시 접수받은 신청에 대해서도 “사업기간 연장 성격”이라는 이유로, 현장 조사 없는 서면 심사만으로 종전 그대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사업 규모가 달라져 현장 재조사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골프 코스는 5년 전 신청 때의 24홀에서 27홀로 규모가 커졌고, 도로·주차장 등 공공시설이 3만6665㎡에서 9만4984㎡로 2배 이상 확대됐다. 반면, 녹지 면적은 34만3840㎡에서 30만6747㎡로 오히려 10%가량 줄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김금호 사무국장은 “골프장이 들어서면 사구뿐 아니라 어업을 생계로 하는 지역 주민들도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2007년 기름 유출 사고를 이겨내고 해안사구의 생태계가 차츰 회복되고 있는데, 골프장 건설을 다시 추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태안군은 다음달 초 군 도시계획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충남도의 심의·의결을 요청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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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문제다.  과거나 현재나. 양떼에 의해 '삶의 터전'을 뺏긴 400여년 전 힘 없는 영국인들이나 현재 재개발에 의해 자신의 최소한의 '삶의 터전'을 뺏긴 우리네 그들이나. 생존을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여전히 '법'에 의해 처단되고 있다.  ---   '후안무치'

바야흐로 '법'대로 돌아가는 세상이다. 정말 '법'은 중요하다. '법'에 대해 공부 좀 해야겠다. 미래를 위해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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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15  이게 인간의 나라인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1516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 늘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왔다. 이 책을 통해서 모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물론 하나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묘사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의와 평등에 기초하여 누구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사회였다. 모어는 그것을 토지 공유제를 기초로 한, 돈이 필요 없는, 자급자족의 소박한 생활방식이 구현된 사회로 묘사했다. 이 사회에는 화폐가 없는 대신 공동물품저장고가 마련돼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생산한 것을 거기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필요한 생활물자가 모두 늘 거기에 있으므로 누구도 쓸데없는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불안에 쫓기는 일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 책은 단지 가공의 이상사회에 대한 몽상이 아니라 당대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모어는 헨리 8세가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멋대로 ‘영국교회’를 창립하여 스스로 그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했을 때 거기에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처형을 당하기는 했으나 생애 말년까지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한 지배층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대 지배층의 전횡과 탐욕에 끝없이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양심적인 인간이었다. 그 양심이 우회적으로 표현된 게 바로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모어가 볼 때, 당대의 가장 큰 사회적 부정의는 ‘엔클로저’ 현상이었다. 당대 지배층은 양모산업의 발흥에 편승하여 떼돈을 벌기 위해서 농민들의 전통적인 생활 근거지인 공유지를 사유화하여 양떼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어는 이것을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현실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생활 터전을 빼앗긴 백성들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극도의 빈곤을 감수하면서 떠돌이, 걸인이 되거나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지배층의 반응은 이른바 ‘국법’에 의한 가차없는 형벌의 집행이었다.

어떤 점에서 <유토피아>는 이 법치의 근본적 허구성을 폭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범법자를 처벌하기 전에 범법의 원인을 직시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토피아> 속에서 정의와 평등에 기초한 사회질서를 꼼꼼히 묘사했을 때, 모어는 백성들의 생계수단을 강제로 빼앗아놓고 오히려 그 백성들을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는 지배층의 후안무치한 범죄행위에 대한 간접적인, 그러나 통렬한 고발을 행했던 셈이다.

‘용산참사’에 대한 최종적인 법적 판결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책임을 물어 그들에게 무거운 형벌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났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씨의 지적대로, 이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모든 공무집행을 정당한 것으로 판단한 매우 위험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일이다. 그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가 다시 한번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착잡한 것은 500년도 더 전에 토머스 모어가 엄중히 고발한 부조리한 현실이 고스란히 지금 이 사회에서 재현되고 있는, 심히 시대착오적인 상황이다.

용산참사란 무엇인가. 도시 재개발이니 뭐니 하는 온갖 거짓언어를 배제하고,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이 사회의 지배층이 서민들의 생활터전과 생계수단을 강탈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준엄한 ‘국법’은 희생자들의 책임을 묻고,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남편이 불타 죽고, 이제 아들까지 감옥에 보내게 된 어머니(전재숙씨)가 대법원 판결 직후 눈물을 흘리며 했던 비통한 말처럼, “있는 사람 살리고 없는 사람 다 죽이는 이 나라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이것을 인간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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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식  글이다. 개인적으로 이런식의 '글 태도'가 맘에 들지 않을때도 있지만, 우선은 너무 재밌다. 대놓고 비꼬는 이 말투. 아무나 할 수 없는 태도이다. 100% 확신에 차 있거나 혹은 그냥 배설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진중권씨는 물론 전자이겠지만. 근데 어떤 사람들은이런 '진중권'식 태도를 어설프게 따라하는 경우도 종종있는 것 같다. 쥐 뿔도 모르면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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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15   G20, 태산명동에 서일필

하도 난리를 치기에 무슨 사변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그들이 떠들기를, 20개국 정상이 1박2일 다녀가서 생기는 경제효과가 자그마치 450조원. 우리나라 인구를 4500만으로 잡으면 인구 1인당 1000만원의 효과가 있다는 얘기다. 우리 집이 4인 가족이니 무려 4000만원의 효과를 보아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가계에 4000만원어치 효과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1박2일’짜리 행사라면, 차라리 강호동에게 호스트를 맡기지, 그랬다면 최소한 국민에게 짜증 대신 웃음을 줄 수 있었을 게다. 그동안에 벌어졌던 코미디 같은 사건들이 떠오른다. 나라님들 행차하시다가 냄새 맡으실까봐 음식물 쓰레기를 내지 말란다. 누구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발상일까? 음식을 먹지 않으니 똥 쌀 일도 없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이어서 분뇨차 운행도 중단시키겠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G20 행사 기간에 밥 먹고 똥 싸다가는 구속당할지 모르겠다’는 푸념이 들려왔다. 웃을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어떤 이들인가? G20 포스터에 낙서 좀 했다고 구속영장씩이나 청구하는 엽기취향을 자랑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정상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공급되는 물에 수질 감시를 위해 금붕어를 집어넣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이건 거의 디즈니 만화영화 <니모>의 상상력이다. 듣자 하니 대한민국의 환경의식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라나? 수질 감시라면 역시 4대강의 로봇물고기. 거기에 각하표 로봇물고기를 넣었다면 한국의 아이티 기술도 과시할 수 있었을 게다. 듣자 하니 행사장 주변 감나무의 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철사로 묶었다고도 한다. 나를 팔로잉하는 어느 트위터러가 비꼬기를, “이건 세계 최초의 과일 SM 결박 시리즈다.”

G20에 관한 교육을 한답시고 초등학생들에게 환율에 관한 숙제를 내주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유신헌법에 관한 숙제를 내주던 게 생각난다. 보라, 이것이 한국의 저력이다. 이미 1970년대에 초등교육에서 헌법을 논하는 수준에 도달한 우리 교육의 수준. 그게 어디로 가겠는가? 2010년대에 한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무려 환율을 논한다. 과연 G20 의장국 자격, 충분하다. 외신도 부러웠던지 오직 한국에서만 가능한 이 영재교육(?)의 실상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고 한다.

돌아가면서 학급 회장을 맡기는 반에서 자기 아들 회장 됐다고 요란하게 떡 돌리는 치맛바람 엄마의 극성이랄까? 어차피 돌아가면서 여는 회담에 저토록 목을 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다. 사실 엠비의 인생철학은 고 이주일씨의 유명한 말로 요약된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문제는 실패한 정권에서 이젠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는 것, 그래서 안으로는 4대강, 밖으로는 G20에 저토록 광적으로 집착하는 것일 게다. 포스터에 낙서 좀 했다고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검찰의 광기도 여기서 합리적인 설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슬픈 것은 이게 희극의 대본이 아니라 현실의 기록이라는 사실에 있다. G20을 통해 우리는 뭘 얻었을까? 한국이 그래 봤자 아직은 국제행사에 유난을 떨며 국민을 상전들 모시는 머슴 취급하는 후진국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깨달음? G20은 끝났다. 정상들은 돌아가고, 우리 머리 위로 450조원짜리 돈벼락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정권에서는 열심히 성과를 자랑하나, 외신에선 시큰둥한 모양이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던가? 허탈하겠지만, 태산이 부르르 떠는 그 난리가 고작 쥐 한 마리가 일으킨 소동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ps :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5천 만명이다.(몇 만명 모자르긴 하지만)


, G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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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목도리 네트   


올해 학교에서의 나의 업무 분장은 생활지도부 기획B이다. 뭐 옆에 앉아 계신 기획A 선생님께서 거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나는 그 옆에서 몇 가지 일만 하는 처지라 솔직히 기획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기획은 기획인지라, 나름 여러가지 일을하며 배우고 있다.

솔직히 이 학교에 와서 생활지도부에 배정받고 정말 좌절했다. 왜, 내가 가장 가기 싫어하는 생활지도부로...그러나 3년 있어보니 오히려 지금은 잘된 일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내가 3년 동안 있지 않았다면 평생 모를 여러가지 학생지도에 대한 노하우를 배운 듯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의 업무 중 연말에 하는 '사제동행' 프로그램이 있다. 뭐 거창하게 이름 붙일것도 없긴하지만. 흡연, 폭력, 벌점 상위자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활지도부장선생님과 대화, 운동, 식사 등을 하는 시간을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거 뭐더러 하는지. 돈 아깝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큼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해에 이 프로그램을 지켜본 내 느낌은 '의미 있다'이다.

교실에서는 그렇게 기운없고, 목표없고, 맹한 녀석들이 자기네들끼리 족구를 하는데 정말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하는게 아닌가. 물론 거기서도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있는 아이들도 더러 있기는 하다. 어디가나 예외와 주류를 벗어나는 존재들은 있기 마련이니.
근데 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이들이 족구를 하려 하는데, 족구 네트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네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네트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체육부 가서 물어볼끼?"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에 어떤 한 아이가 자기 목도리를 벗더니, "야 목도리 있는 사람 다 나 줘봐"하더니 목도리를 서로 연결해서 네트에 묶는것이다.  



"아 이거다!"

그 아이들에게 학교 내에서의 교실은 억압과 실패, '재미없음'의 공간이겠지만, 교실 밖 운동장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좋아하는 친구와의 시간과 공간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저절로 웃음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노는' 모습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난 저 아이들이 교실에서도 저런 모습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은 어쩔 수 없이 들었다.

그런 교실이 현실화될수는 있는 걸까? 요즘 유행처럼되다시피 한 핀란드 교실의 모습을 보면 그런 교실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한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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