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뒹글고 있는 지나간 신문들을 뒤져보다가 한겨레신문에서 월요일마다 나오는 '함께하는 교육'에 있는 기사 두 개를 스크랩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스티브잡스에 관한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왜 '애플'의 제품에 열광할까? 또한 잡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일까? 어찌보면 현실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잡스의 죽음과는 '무관'한 이들 아닌가? 하등의 관련도 없는 이들이 눈물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죽음에 슬품을 표하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죽음에는 그리 쉽게 '애도'를 표하지 않는 것은 씁쓸할 따름이다) 그의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고 있다.
우리들은 단지 그의 죽음을 '돈'으로서만 이용할 뿐이다. 교보문고에 가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포인트에 잡스의 책이 '산떠미'처럼 쌓여 있다. 말 그대로 '산떠미'처럼. 그래서 더욱 손이 가지 않지만, 그건 나 같은 사람만 해당되는 듯 하다.(불티나게 팔리는 듯 하다. 그런데 들리는 애기로는 '오역'이 심하다고 한다. 하긴 번역을 그렇게 빨리 했으니...)
서론이 길었다. 읽었던 기사를 옮겨본다.
한겨레신문 2011.11.14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
요즘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이 뜨고 있다. 지난해 3월 처음 나왔는데 채 2년도 안 돼 가입자가 2500만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위력을 보여줬다. 한데 카카오톡을 만든 회사 ‘카카오’ 이사회의 김범수 의장 이력은 독특하다.
1992년 삼성에스디에스(SDS)에 입사했던 그는 1998년 ‘한게임’을 만들었다. 이 한게임과 네이버커뮤니케이션이 2000년 합병해 탄생한 회사가 엔에이치엔(NHN)이다. 엔에이치엔은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와 국내 최대 게임사이트 한게임 등을 운영한다. 2007년 8월 네이버를 떠난 뒤 몇 년 소식이 뜸했던 그는 갑자기 카카오톡을 들고 나타났다. 부침이 심한 인터넷 분야에서 한 사람이 여러 번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김범수 의장은 ‘스타 시이오(CEO)’라고 불린다.
그런데 그는 지난 10월19일 경제전문지 <머니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악착같이 살지 말라”고 했다. 성공한 사람은 대개 노력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그는 달랐다. 김 의장 인터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화 <올드보이>를 보면 15년을 가두잖아요. 최민식이 ‘어떤 놈이 대체 날 가뒀나’ 고민하고 관객들도 그 느낌을 쫓아가죠. 하나씩 비밀이 풀어지니까 ‘저래서 가뒀구나’ 하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유지태가 딱 한마디 합니다. ‘당신이 틀린 질문을 하니까 틀린 답만 찾을 수밖에 없다’고. ‘왜 가뒀나가 아니라 왜 풀어줬나가 올바른 질문이다’라고 말이죠. 거기서 땅 때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 의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인지하는 능력,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리더의 능력은 답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어떤 어떤 문제를 풀어봐’라고 말이죠. ‘어떤’ 문제를 풀어보라고 할지가 경쟁력이죠.”
김 의장은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왜’냐고 묻는 학문이다. 이에 비해 실용성 학문들은 ‘어떻게’를 중시한다. 10월5일 사망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사진)는 인문학을 중시했다. 잡스는 지난해 1월27일 아이패드 발표회장에서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liberal arts & technology)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했다”는 말을 남겼다.
잡스는 항상 본질을 추구했다. 잡스는 리드대학을 한 학기 만에 중퇴한 뒤 철학과 인문학 강의를 몰래 들었다. 이러한 잡스의 성향은 독특한 경영 철학으로 발전했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본질만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한데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쓸모없다던 인문학이 자본주의 극대 발전기에 다시 주목을 받는 건 역시 인문학이 ‘쓸모 있다’는 게 여러 사건을 통해 증명됐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11.11.14 스티브 잡스 같은 프리젠터가 되고 싶다면?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http://image.aladin.co.kr/product/282/76/cover150/8959060984_1.jpg)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셋을 설득의 기본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토스, 즉 성품이다. 말이 좀 어눌하면 어떤가. 사람에게 신뢰가 가면 무슨 말을 하건 믿고 싶어진다. 반면, 사람 됨됨이가 의심스러울 때는 번지르르한 말에도 의심이 갈 테다.
파토스, 즉 감정은 그다음으로 중요하다. 기쁠 때와 슬플 때, 자신의 감정에 따라 똑같은 말도 달리 다가오는 법이다. 훌륭한 연설가는 듣는 이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안다. 때로는 필요한 감정을 부추기기도 한다. 적절히 흥분시키거나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식이다.
로고스, 즉 논리도 놓쳐서는 안 된다. 주장할 때는 ‘팩트'(fact·사실)를 정확하게 내놓아야 한다. 또한, 주장을 앞뒤가 맞게 펼쳐야 한다. 흐릿한 사실과 어물쩍대는 논리로 그럴싸하게 얼버무리려 해서는 안 된다.
맛깔스런 표현과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 적절한 동작. 이런 ‘말의 장식’들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갖춘 뒤에야 의미가 있다. 진실된 가치와 감동, 논리가 살아 있는 내용, 여기에 적절한 표현과 매력적인 목소리, 동작이 더해질 때 호소력은 한껏 높아질 테다. 이렇다면 말하는 법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무엇보다 에토스를 충실하게 다져야 한다. 그런 다음 파토스를 길러야 한다. 로고스 교육은 이 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주변의 논술학원들을 둘러보라. 대부분은 이 셋을 거꾸로 가르칠 테다. 학생들은 논리적으로 따지는 법부터 배운다. ‘논리 감각’을 익힌 뒤에는 ‘고급 논술 과정’이 이어진다. 감동적으로 말하고 쓰는 방법을 익힌다는 뜻이다. 파토스, 품성에 대한 교육은? 거의 보지 못했다. 논술을 배워서 인격이 훌륭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이렇게 배운 학생은 ‘입만 까진 아이’가 되기 쉽다.
2500년 전 소피스트들도 다르지 않았나 보다. 소피스트란 논·구술 교사, 프리젠터(presenter), 변호사를 합쳐놓은 듯한 직업이었다. 그들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서 많은 돈을 벌었다. 다음의 이야기는 파토스 없는 논리 교육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한 젊은이가 소피스트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했다. 자신이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도록 가르쳐주면 엄청난 수업료를 내겠다면서 말이다. 소피스트는 반색을 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세월이 흘러, 마침내 젊은이는 재판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수업료를 내려 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소피스트는 제자를 고발했다. 법정에 나란히 선 스승과 제자. 먼저 선생이 주장을 펼친다. 이 재판에서 이기건 지건 젊은이는 수업료를 내야 한다. 내가 이긴다면 당연히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 만약 젊은이가 이겼다면? 그래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 젊은이는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게 해주면 수업료를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학생의 변론이 뒤를 이었다. 나는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재판에서 이긴다면 당연히 수업료를 줄 필요가 없다. 재판에서 져도 마찬가지다. 선생에게는 첫 재판에서 이겼을 때만 돈을 주기로 했다. 첫 재판에서 패배했는데, 왜 내가 그에게 수업료를 주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스승과 제자는 똑같은 논리 위에서 정반대 주장을 펼친 셈이다. 이는 소피스트들이 주로 썼던 ‘디소이로고이'(dissoi logoi)라는 기술이다. 이렇듯 인격을 가다듬지 못하는 논리 교육은 사기꾼만 만들어낼 뿐이다.
<위대한 연설>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소피스트 10명을 소개하는 책이다. 지은이 김헌 교수는 앞의 예와는 다른 소피스트들의 모습을 들려준다. 큰 선생은 인품도 훌륭하기 마련이다. 소피스트들도 다르지 않았다. 굵직한 소피스트들은 에토스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알았다.
예를 들어보자. 리쿠르고스의 연설 기술은 아주 빼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진정성이 있었다. 조국 아테네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직함은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였단다. 그는 돈을 주무르는 재무장관을 무려 12년 동안이나 했다. 사실, 아테네에서 재무장관은 1년씩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리쿠르고스는 편법을 썼다. 1년을 근무한 뒤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올리곤 했다. 일종의 ‘바지 장관(?)’을 쓴 셈이다. 이런데도 아테네 시민들은 너그러이 눈감아 주었다. 리쿠르고스의 깨끗한 돈 관리와 능력을 믿은 덕분이다. 훌륭한 성품은 원칙과 논리마저도 뛰어넘게 한다.
아테네 최고의 연설가로 꼽히는 데모스테네스는 또 어떤가. 그는 리쿠르고스와는 많이 달랐다. 데모스테네스는 돈에 약했고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이럼에도 시민들은 데모스테네스를 언제나 환영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아테네를 집어삼키려는 마케도니아에 맞선 ‘독립투사’였다.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에토스’는 자잘한 잘못을 덮어버렸다.
이제 우리 시대 최고의 프리젠터인 스티브 잡스를 돌아보자. 그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애플의 제품을 직접 프레젠테이션했다. 숱한 최고경영자(CEO)들은 잡스를 흉내 내기에 바쁘다. 최고경영자가 노타이 차림으로 회사 제품을 직접 소개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처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들은 우리네 논술학원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지 않을까? 호소력의 뿌리는 논리가 아닌 에토스에 있다. 잡스의 매력은 ‘창조와 개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에토스에서 뿜어져 나왔다. 겉모습만 따라 해서는 결코 잡스처럼 되지 못한다.
감동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진정성이, 에토스가 무엇인지부터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그리스 10대 연설가들의 명성은 하나같이 말재주가 아닌, 인간적인 매력에서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ps : 검색해보니 연설과 관련된 이런 책들도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책들이지만, 연설, 그들의 '말'에 대해서는 궁금해서라도 읽고 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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