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판
그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
1
재판장 : 당신의 생년월일은?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내가 태어난 그 당신 생년월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소.
재판장 : 당신은 어떻게 태어났소?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나는 자연에 의해 잉태되고, 바람에 의해 길러졌소.
재판장 : 당신은 스스로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소?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사람은 누구나 다 정신병자요. 모두 미친 년놈들 뿐이오.
재판장 : 당신은 인생을 부정하시는군요?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할 뿐이요.
재판장 : 당신이 행하는 그 수많은 거짓말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지 알기나 하오?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물론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소.
재판장 : 증거가 이렇게 많고, 저 많은 사람들이 다 증인인데, 없다고?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그건 그들이 생각할 때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오. 사람들은 언제나 순간순간 말하기를 주저하지.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당신은 저렇게 받아들이면 그건 거짓말이 되지. 그럴 경우는 아주 흔하오. 그런 상호관계가 지속될 때, 결국 서로에게 신뢰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오직, 거짓말만 존재할 뿐이오.
재판장 : 이유를 모르겠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요?
합리적 의심이 가는 죄수 : 우리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군. 묵비권을 행사하겠소.
재판장 :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심문을 중지하겠소.
재판장의 망치 : 땅땅땅
(풍경묘사)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2
말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법보다
말이 먼저 있었다. 그래서 말은 인간적이다.
- 오규원 「4개의 노트」에서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재판장에게 다가가 반문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방금 영구불변의 시간이라고 했소?
재판장 : 그렇소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영구불변의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오?
재판장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소.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건 변화하고 있소. 그런데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구불면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군?
재판장 : 당신은 지금 나를 포함한 법정 전체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 아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물론, 잘 알고 있소.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난 그걸 즐기고 있소. 당신이 흥분하면 할수록,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인정할 뿐이오. 내 말이 틀렸소? 그리고 난, 당신이 흥분하는 것을 즐기고 있소. 당신이 자꾸 흥분하면 할수록 난 자꾸 당신을 괴롭히고만 싶소. 당신이 그럴수록, 날 자꾸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 아시오?
재판장 : 그만 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나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계시는군? 하지만, 당신이 날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도 내가 바뀌진 않소. 당신은 당신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에 불과하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오. 내 말이 틀렸소?
(배경설명) 서기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다가왔다.
서기 : 틀렸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틀렸다고? 이유를 대 보시오.
서기 : 이유를 왜 대야 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 말이 틀렸다고 했잖소?
서기 : 난 서기일 뿐이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서기 : 내가 당신의 말을 기록하는 데 왜 이유가 있어야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슨 소리요?
서기 : 난 당신 말이 틀렸다고 말했을 뿐이오. 당신, 왜 살아?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내게 아주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변명하려 할 거요. 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오. 그렇듯이 나 역시 당신 생가기 틀렸다는 걸 말하는 것 뿐이오. 됐소?
(상황설명)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은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두들겼다. 서기는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지는 해 저편으로 사라졌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다시 혼자 남은 영혼 속으로 들어갔다.
또 다시 재판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무죄 추정의 죄수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에게 말을 걸어오려 한다.
그 동안, 내리던 폭우가 가라앉고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영구불면의 시간 동안,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무죄 추정의 죄수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 I'll be back~ (3편으로 다시 돌아올께~)
3
시작에서 중요한 건
끝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끝을 보고 시작한다면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낸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일단 시작하고 보자라는 사고방식
무작정 저질러놓고 보는 일
이것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 보자하고 시작했으면
끝은 봐야 할 거 아닌가
무죄추정의 죄수는 한참동안 말을 걸려 했으나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천둥번개가 멈춘 짜증나는 날씨를 바라보면서 무죄추정의 죄수를 등지고 서 있었다. 합리적의 의심의 죄수 역시 무죄추정의 죄수가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 중요한 건
답을 맞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를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는 것이
삶에서의 가장 큰 과제가 된다
- 나는 지금
<인생>이란 문제를
열심히 푸는 중이다.
여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게 망설이는 동안,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현명과 지혜의 바보"란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재판장이 물어보기 전에,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먼저 그에게 질문을 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떻게 된 거요? 재판장이 바뀌다니?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는 땅 밑으로 기어들어갔소. 내가 못 마땅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비웃을 상대가 없어 섭섭할 뿐이오.
현명과 지혜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나는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당신은 비웃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하기에 너무 큰 존재요. 당신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소.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상대는 당신같이 넓고 큰 마음을 지닌 존경하고픈 사람이 아니라, 내가 비웃을 수 있는 상대요. 그런 사람은 적어도, 내게 우월감을 느끼게 해 주거든. 당신의 마음은 넓고 크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당신을 비웃는다 해도 당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거요. 그 이유가 당신하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요. 됐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그렇다면, 오늘도 여전히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하겠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야, 물론이지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에겐 콤플렉스가 많은 듯 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건 내가 아닌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거요.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소. 그리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은 비웃고 당신보다 잘난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았소.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많지 않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오? 어떻소? 당신의 콤플렉스가 어떤 건지 말해 보지 않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미쳤소? 내가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할 것 같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오 틀렸소. 난 사람이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럼, 무엇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뭏든 난 사람은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자기비하가 강하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할 뿐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것이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소? 지금까지 당신은 내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 아시오? 그러면서 당신은 나하곤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이제,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볼 차례가 된 것 같군. 변호사를 선임하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나를 대신해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지금부터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심리설명) 영구불변의 시간은 너무 지루하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가많이 앉아, 증인들이 증언하기를 기다렸다.
5.
말이란
하고 나면
속은 시원하지만
괴롭기는
더욱 괴로운 것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그런 시간들이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만남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첫 번째 증인, 등장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녀를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도저히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또 그녀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를 어떻게 아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증인의 이름은?
이름없는 여인 : 전 "이름없는 여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은 왜 이름이 없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제 이름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의 이름일 왜 지웠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죠.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왜 지워지지가 않았죠?
이름없는 여인 : 저 사람 때문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제게 이름일 지어주셨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께 이름을요? 놀랄 만한 사실이군요.
이름없는 여인 : 예,저 사람은 제게 "이름없는 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증인, 증인은 지금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름없는 여인 : 예,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이름없는 여인"과 "이름없는 여자"란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름없는 여인 : "여인"과 "여자"란 말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세요. 그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예, 좋습니다. 그럼, 저 사람을 만나고 난 이후 저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없는 여인 : 더 이상 없습니다. 저 사람은 단지 저를 지워버렸을 뿐입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어떻게 지웠죠?
이름없는 여인 : 저의 이름을 지워버렸죠.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로선 이해하기가 힘든데, 좀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름없는 여인 : 자세하게요? 어떤 게 자세한 거죠? 이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판사님은 제게 무얼 기대하세요? 제가 저 사람에 대해 무얼 말하길 바라시죠? 저 사람을 욕해줘야 하나요? 아니면, 저 사람과의 그날 밤 일에 대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저 사람은 그날 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를 텐데요? 저 역시 아는 거라곤, 제 이름을 지워버렷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단지, 그게 다라구요. 판사님., 판시님도 원하세요? 자세하게 알려드릴까요? 자세하고 알고 싶으시면, 오늘 밤 제게로 오시죠? 어때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려요? 그래요, 자세하게 가르쳐 드리죠. 판사님은 자세하게 알 권리가 있을 테니까요. 결국은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죠. 판사님 역시 가면을 쓴 천사에 불과해요. 모두들 날보고 손가락질을 하죠. 하지만 그 손가락질 하는 사람 대부분은 날 알아요. 내가 자세하게 모든 걸 가르쳐 드리니까요. 난 그들에게 이러죠. 제발 욕해 달라고요. 왜인지 아세요? 안 그러면 그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명예가 실추되면 곧, 내게서 멀어질 테고, 그러면 제 밥줄도 끊기고 말 테니까요. 오늘 밤 또 제 이름을 지워주시지 않겠어요?
(상황셜명)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렇게 위엄있고 현명하다고 판명 나 있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것을 보니,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기분도 유쾌해졌다. 결국, 저 판사도 이 가련하고 노련한 여인네 앞에선 꼼짝을 못하는구나.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만하시오. 다음 증인을 불러오시오.
이름없는 여인 : 판사님, 기억하세요. "이름없는 여인"의 방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독백) 나는 상상한다. 주위의 시선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판사의 모습. 그리고 몰래 찾아갈 "이름없는 여인"의 방. 그 방에는 매일 자기의 이름을 지우는 여인이 또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판사를 기다리며, 꽃단장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면,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날 판사의 얼굴표정 - 겉으론 위엄있지만 온갖 이물질들이 잔뜩 끼어이는 속내 -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역겨운 일이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
'이름없는 여인은 아름다웠습니다’
6
- 인생은 어쨌든 정당한 것
내 마음은 하늘처럼 열려 있다
<카마수트라>
두번쨰 증인이 채택되기 전에, 1박 2일 동안 재판장은 휴정을 선언하였다. 그가왜 1박 2일이란 시간을 주었는지 말하진 않지만, 모두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무죄추정의 죄수가 합리적 의심의 죄수 앞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머뭇거리면서 말하기를 꺼렸던 무죄추정의 죄수의 태도는 너무도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죄추정의 죄수 : 당신은 왜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 거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잠시 뜨금했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난, 감추는 거 없소.
무죄추정의 죄수 : 감추는 게 없다구요? 당신은 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려고 하죠? 사람이란 동물은 합리적인 사고방식만을 가지고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불합리한 것이 합리적이기도 하죠. 당신은, 당신의 문제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하기를 꺼리는 거죠? 사실, 한가지 문제의 무게가 큰 것이라면,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모두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마음 놓고 괴로워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괴로움이 가시고 나면 안정을 되찾기가 쉬워지지만, 사소한 문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렇죠.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고민을 하냐고. 그리고 이런 경우가 한두번으로 끝나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쌓이게 되면 병이 되죠. 사실, 가장 위험한 정신상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그것들을 쌓아두었을 때입니다. 당신의 문제는 그것들을 쌓아두었다는 데 있습니다. 쌓아놓은 점수들을 한꺼번에 잃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죠. 그렇듯, 당신은 한꺼번에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쌓아놓은 것들을 단 한번에 풀려 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러므로써 당신은 스스로를 철저하게 감추는 아이러니에 빠져버린 거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어째서 죄수가 되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바로 방금과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사람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할 때가 있죠. 사람의 마음을 지나치게 정확하게 꿰뚫면 많은 걸 잃게 되요. 그것이 저의 죄목이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흥미있는 죄목이군.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의 죄목은 뭐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바로 당신과 반대되는 죄목이오. 당신은 당신 죄를 너무 잘 알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나의 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소. 이 나라는 정말 우습기만 하오. 왜 죄없는 사람을 이리 가두어 두려만 하는지, 정말 난 이해를 못 하겠소. 혹시, 죄가 있다면 말하지 않은 죄? 그것도 죄가 될 수 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결과에 따라선 될 수 있쬬.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과?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었느냐보다는 결과로 판단한다는 것이죠. 모두들 결과만 보려 해요. 당신이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당신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왜 당신을 감추려 하느냐고 물어본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감추려 하지 말고 털어놔요.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 쏟아내 버려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뭐가 두렵죠?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요? 이 나라의 형벌에는 석방 아니면 사형밖에는 없습니다. 극단적이죠. 석방되면그야말로 다인은 저주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말을 할 때 절대로 흥분을 해서는 안돼요.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에 맞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젭니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라도 하세요.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지요. 물론, 당신이 영원토록 저주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난 이제 그만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저의 재판은 쉬는 시간이 너무 없어요. 판사가 너무 서둘러요. 판결이나 제대로 내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합리적의심의 죄수 독백) 나는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말을 하지 않은 죄를 지은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정말, 말하지 않은 죄를 저지른 것일까?
7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의 얼굴에선 근엄한 표저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엔 묘한 웃음이 번졌다. 왠지 그 웃음은 비굴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 뿐이다. 그는 어젯밤 "이름없는 여인"의 이름을 완전히 지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은 지금쯤 곤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상처뿐인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재판장, 어떻소? 나랑 내기하지 않으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뜬금없이 무슨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하시겠소? 안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허…. 이 양반, 웃기는 양반이구만.
합리적의 의심의 죄수 : 하시겠다면 말씀드리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하겠소. 당신이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면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코 터무니없는 내기는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렇다면, 말해 보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먼저, 내기의 조건부터 걸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어떤 걸 원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만약 이 내기에서 내가 이긴다면 나를 풀어주는 조건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터무니 없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나에겐 무엇이 돌아오는 것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이기면 "이름없는 여인"을 선물하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지금 농담하시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농담이 아니오. 첫 번째 증인의 "이름없는 여인"은 시작에 불과하오. 앞으로 수도 없이 "이름없는 여인"은 등장할 것이오. 물론, 언제 등장할지는 모르지만, 아뭏든 나의 재판 과정으로 보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듯 한데, 그 여인을을 모두 선물하겠소. 한가지 충고하자면, 그 여인들은 첫번째 "이름없는 여인"같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오. 내가 그 여인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소. 어떻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당신이 이기면?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이기면 나를 풀어주길 바라오. 그리고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요,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런데 무엇으로 내기를 하자는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사랑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무슨 말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소. 하지만 난 그녀 아닌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소. 그녀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사람이오.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오. 그것이 내기의 조건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곘군.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난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오. 비록, 지금은 당신을 경멸하지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난 다인의 존경을 바란 적은 없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잘 들어보시오.. 당신은 진정,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오? 그러고도 존경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군. 다인이 진정 존경을 받는 재판장이 되려거든, 우선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같은 사람이 아니오. 당신같이 이중적인 사람도 아니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말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오. 그게 궁금하거든, 직접 노력해 보시오.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당신에겐 흥미거리 중 하나가 될 텐데?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듣고 보니 흥미롭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떻소? 하시겠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재미있군. 내가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절대로 할 수 없소.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내기하겠소. 당신은 나의 자존심을 자주 건드리는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것도 내 취미 중 하나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악취미군.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겐 좋은 취미요.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좋소. 아뭏든, 재판은 이후로 미루겠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장담하지만, 앞으로 재판은 진행되지 않을 것이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 그건 두고 봐야 알지.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경멸의 눈빛으로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현명과 지헤의 바보란 하늘 재판장 역시, 합리적 의심의 죄수를 경멸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확신했다. 저 녀석은 결코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없어. 그녀는 경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눈빛은 언제나 따뜻한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그 눈빛이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다시 어두운 지하 동굴로 들어갔다.
8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재판은 어떻게 되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글쎄요. 아직 진행 중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힌은 스스로 죄를 지었따고 생각하오?
무죄 추정의 죄수 : 전 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론, 죄가 되지 않는 것도 죄가 될 수 있고, 죄가 될 수 없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죠. 문제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재판장과 배심원의 마음을 어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군요. 재판장도 만만치 않게 저를 잘 파악해요. 서로 대등하다 보니, 꽤나 힘겨운 싸움입니다. 댁은 어떠십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마 곧 풀려나게 딜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럴 듯한 사기를 치셨나 보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한텐, 궂이 설명을 할 필요가 없으니 무척 편하군.
무죄 추정의 죄수 : 하지만, 조심하시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사기는 믿을 만한 게 못돼요. 너무 자신감이 지나치면, 화를 자초할 수도 있어요. 항상,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놔야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 방법이 잘못된다는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에 항상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아, 재판이 또 시작되는군요. 제대로 얘기할 시간조차 없으니, 무척 섭섭하군요. 또 뵙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의 말을 다시 되뇌어봤다. 항상, 철저하게 대비한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9
아 아직 멀었다 나는
저 굴뚝의 정신의 닿으려면!
- 고진하 「굴뚝의 정신」에서
재판장이 바뀌었다는 어이없는 소식을 들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또 누구요? 前판사는 어디갔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前판사요? 못 들으셨어요? 사기죄로 구속되었어요. 재판장이 재판을 받는 드문 경우가 발생한 거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사기죄라니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당신이 내기를 하셨더군요. 그 여자분을 상대로 사기를 치셨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결국, 그녀의 사랑을 얻었다는 말이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사랑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제분을 잉태하셨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번엔 내가 충격을 받을 차례군.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도 될까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엇을 묻고 싶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그 여자분, 정말 사랑하셨나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미안하오. 그건 사기였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원인은 당신한테 있었군요. 前 판사는 마치 자신이 당신인 양 행동했어요. 당신이 지상에 계셨을 때는 참 따뜻한 눈빛을 지녔더군요. 당신이 그 여자분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 여자분이 당신을 사랑한 거였죠? 前 판사는 당신의 사기를 알고 있었어요. 한번 크게 상처받은 사람은 좀처럼 쉽게 다른 사람에게 가지 못해요. 前 판사는 아주 쉽게 그녀를 얻었죠. 하지만 그 판사는 한 가지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어요. 아무리 속이려 해도 때론 속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던 거지요. 당신을 사랑한 그 여자분은 당신을 너무도 그리워해 잠시 그 재판장이 당신인 것처럼 착각했지만, 곧 당신이 아니란 걸 알아챘어요.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신고를 해 온 거죠.
이렇게 되면, 게임은 누가 이긴 게 되나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모르겠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여전히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꺠우치지 못하는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내가? 뭘? 잘못했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재판이 끝나면 알게 될 거예요. 변호사 선임은 여전히 안 하실 건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소. 난 아직 그 생각엔 변함이 없소.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좋아요. 그럼, 재판을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0
문득
살아가면서
난 진정
진실로서의 사랑을 해보았을까?
라는 물음을 던져보건대
"난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무죄 추정의 죄수 : 쉽지 않으신가 보군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군요.
힙리적 의심의 죄수 : 판사가 또 바뀌었소.
무죄 추정의 죄수 : 자만은 담배나 술보다 더 좋은 기호품이죠. 하지만, 그것은 마약 같은 거지요. 한번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면 헤어나기 힘듭니다. 당신은 이미 그 자만이란 것에 익숙해지셨더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잘 봤군. 당신 역시 마찬가지 아니오? 아니라면, 당신하고는 상대할 필요가 없는 걸로 아는데.
무죄 추정의 죄수 :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과 내가 틀린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당신은 분명하게 그 자만심을 드러내지만, 나의 경우는 그 자만을 철저하게 겸손아란 덕목으로 위장하죠. 그것은 곧, 당신은 철저하게 솔직한 사람이고 나의 경우는 위선자라는 얘기가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럼 그것도 알겠군. 난 당신같은 사람을 경멸한다는 것.무죄 추정의 죄수 : 물론, 알지요. 당신과 나는 서로를 너무도 잘 알기에 서로를 경멸한다는 것도. 하지만, 결국에 이기는 것은 당신처럼 솔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 거죠. 당신께 그걸 깨우쳐 주고 싶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헛수고 하신 것 같은데.
무죄 추정의 죄수 : 결코 그렇지 않지요.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난 내가 무죄로 석방됨으로서 저같은 위선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을 당신께 증명하려 하는 것 뿐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요?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이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지요. 그리고 난 내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알리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참 우스운 소신을 가지고 있군. 당신은 당신이 하고싶은 일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나 보군.
무죄추정의 죄수 : 떄론 목적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죠. 이번이 그런 경우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 이런 비리를 알리고 싶어도 내가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오. 당신이 죽고 내가 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요?
무죄 추정의 죄수 : 아마도 그것은 이 세상이 제대로 되어 간다는 증거가 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얘기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왜 불가능하지?
무죄 추정의 죄수 : 당신은 도무지 현실판단 능력이 없군요. 현실을 똑바로 주시하세요. 아직도 몽상 속에서 헤메이십니까? 그래서는 안돼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세요. 당신은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재판의 유죄선고는 사형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소한 사람은 당신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셨고, 당신 편이 되어 줄 증인조차 확보하지 못 했어요. 재판에 승산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당신 혼자 아무리 증언하고 당신 혼자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다른 모든 증인들이 당신의 말이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겁니다. 재판이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재판은 당신의 유죄를 얼마나 명확하게 판단하느냐를 가려줄 뿐입니다. 당힌이 아무리 죄가 없다고 우긴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또 당신을 도와줄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결코 진실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심리독백)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지금까지 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몰고 온 듯 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11
- 비로소
- 재판이
- 시 작
- 되었다
출렁이는 물결의 판사 : 두번째 증인 나와주세요
꽤나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두번째 증인이란 말에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좀 당황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질문이 하나 있는데?
최후의 판사 : 하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증인은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이 재판은 언제 끝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재판이 지루하신가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소.
최후의 판사 : 당신은 참을성을 배워야 합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런 건 필요없소. 어서 빨리 이 재판이 끝나길 바랄 뿐이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최후의 판사 : 무엇이든 쉽게 이루어지는 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진짜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당신은 가짜이며 당신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죠.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죠. 죄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 모두는 가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발전이란 흔히, 문명 속에 갇힌 기계적인 것들만을 말하죠. 그것들은 치열한 머리싸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이 재판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미 죄인이라느 전게 있습니다. 지금 판단하는 것은 죄질의 크고 작음이지 유죄냐 무죄냐가 아닙니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이제 그걸 당신께 깨우쳐 드리려 합니다. 제 이전의 판사는 모두 당신을 재판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제자이기도 하지요. 모두들 당신의 독설에 넘어가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면 몰라도 前 판사처럼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성별을 지닌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절대로 당신이 나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테니 걱정 없을 거구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왜 그렇게 확신하오?
최후의 판사 : 당신은 당신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여자들을 유혹하지 않아요. 과연, 당신이 나를 유혹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을까요? 어차피 당신은 유죄인 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승산없는 싸움이군. 그런데 왜 그리 질질 끌지? 어서 빨리 나를 사형대에 보내주시오.
최후의 판사 : 당신을 빨리 보낼 수는 없어요. 당신이 죄를 지은 건 분명한데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당신이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석방될 수가 있으니까요. 다만, 판결에 관계없이 당신은 유죄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 뿐이에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렇다면 당신을 유혹할 필요가 있겠군.
최후의 판사 :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판결은 제가 내리지 않아요. 당신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 저는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재판을 진행할 뿐이지요. 그것이 판사가 하는 역할입니다. 판사의 권리를 남발해서는 안 되죠.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은 존경하고 싶은 사람이군.
최후의 판사 : 아직은 아니군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죠.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는 일이 당연한 일인 듯 넘어가는 세상입니다. 사실, 누구에게든 존경받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 충고해 드리죠. 당신은 지금 당신 변호사 역할까지 하신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묵비권 행사를 할 권리가 있는 동시에 또 없기도 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와 피고인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말을 모두 다 받아주기도 하며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재판은 더 오래 진행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변호사 선임권을 박탈당합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최후의 판사 : 좋습니다. 잠시 휴정합니다.
증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들어갔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우스웠다. 이 모든 게. 모두 가짜라고? 자기도 가짜? 어떤 면에서? 그리고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변호사를 비웃기 시작했다. 세상엔 진짜도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속으로 속으로 외치면서.
12
- 이것들은 무시로 깜빡거리며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
그 짧은 순간들을 참을 수 없는
(저 등뒤에서, 푸욱, 찔려지는 칼날)
깜박거리는 표지들은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위험하다. 깜빡거리며
-이문재 「저 깜빡이는 것들 - 산책 詩 5」에서
최후의 판사 : 세번째 증인, 나와 주세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잠깐, 두번째 증인은 어떻게 된거요?
최후의 판사 : 한번 나온 증인은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이유가 뭐요?
최후의 판사 : 모든 사람은 한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우습군.
최후의 판사 :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아니, 하지 않겠소.
최후의 판사 : 꿋꿋하시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어차피 내가 나를 살려내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살려줄 수는 없소.
최후의 판사 :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을 살려내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의 목숨을 연장시켜 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조금 더 산다고 해서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 될 거 같소? 나는 이제 저물어 가는 사람일 뿐이오. 죽음 아니면 영원을 택하겠소.
최후의 판사 :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많은 걸 이룩할 수는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같이 능력있는 사람은 그렇겠지.
최후의 판사 : 아닙니다. 당신같은 분도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를 결코 알 수 없겠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권력에 무릎꿇지 않았으며 당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변호사 선임을 하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도대체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난 변호사 선임을 할 생각은 없소.
최후의 판사 : 좋습니다. 세번째 증인,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피고에게 어떤 피해를 당하셨습니까?
세번째 증인 : 저 자는 내 약혼녀를 뺏었습니다.
최후의 판사 : 어떻게 뺏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세번째 증인 : 그녀는 저와 약혼을 하고 난 후, 저 자를 보게 됐는데, 그 후 저 자에게 푸욱 빠져 저와의 약혼을 파기했습니다.
최후의 판사 : 증인, 그러면 그 후 증인의 약혼녀는 어찌되었습니까?
세번째 증인 : 혼자서 저 자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자의 애기도 낳았습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는 잠시 멍했다.
합리적 의심의 죄수 : 잠깐, 판사님, 내게도 말할 기회를 주시오.
최후의 판사 : 피고는 변호사의 역할도 겸한다는 걸 명시하십시오. 발언은 잠시 후 해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습니까?
세번째 증인 : 예, 틀림없이 저 자와 결혼하여 애기까지 낳았고 저 자는 바로 죽었습니다.
최후의 판사 : 예, 알겠습니다. 증인, 수고하셨습니다.
최후의 판사 : 이제 당신이 어떠 죄를 저질렀는지 아시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의 죄수 : 무슨 말이오? 난 그녀와 결혼한 적도 없고 더군다나 애를 가질 만한 일을 한 적은 더더욱 없소. 뭔가 잘못되었소.
최후의 판사 : 아닙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보이는 것들만 보려 하기에 당신의 죄를 모르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결혼한 적도, 애를 낳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前 판사와 내기를 거셨던 것을 기억하세요. 제가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죄가 됩니다. 당신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칭한 누군가가 또 그녀를 괴롭힐지 모릅니다. "이름없는 여인"을 지우는 것처럼 당신은 당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하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재판을 마칠 때가 된 것 같군요.
합리적 의심의 죄수 : 그럼 난 유죄가 되는 거요?
최후의 판사 :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당신을 판결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께 판결을 내릴 것입니다. 판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당신을 석방할 수도 사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판결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땅.
13.
(합리적 의심의 죄수의 독백) 내 방에 있던 무죄 추정의 죄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형되었는지, 또는 석방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그 죄수에 비해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죄수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나는 그에게 내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영구불변의 시간 동안 판결이 내리길 기다려야만 했다. 천둥이 치고 소리만큼의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면서 비가 퍼부었다. 자연이 나를 향해 기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통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