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창수가 선택한 대표시 3선
1) 초록빛의 0
2) 0시 속 0시
3) 그리움에 걸리다
초록빛의 0
빛이 빛을 쪼여 한낮의 모든 걸 매기고 있다 그 빛은 내게 모든 걸 다 주려 하진 않고 있어 나는 빛에게 말한다 내게 바람을 달라 내게 비를 달라 내게 구름을 달라 그 빛은 그럼 나는 당신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느냐고 무작정 따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람을 쐬러 모두에게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푸르른 하늘이 나를 반기는 척 하더니, 이내 숲의 저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머물렀고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더니 이야기는 저 바다 너머 어딘가로 떠나겠다고 했다
자꾸만 허둥대기만 하는 어떤 날에 슬픔이 슬픔이 아니게 된 어느 날에 사랑을 하기만 하고 싶던 그 날에 나는 삶이라는 아주 흔한 것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내게 이야기를 붙이지 않게 될 그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바다에게 투정했더니 바다는 그럼 나는 너의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고 내게 묻고 있었다
아주 오랜 후 어느 날 나는 바다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그것은 꿈인 듯 지금인 듯 나중인 듯 했다 그리고 내게 닥쳐온 그 지금은 어느 덧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달라진 나중을 이야기하려 했는데 지금은 내게 꿈이냐고 꿈인 거냐고 나는 맞을 거라고 맞을 거라고
0시 속(續) 0시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귀뚜라미, 울지 않는다
창밖, 이미 떠 있는 달은
이별을 삼키고 날아가는
슬픈 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허공에 뜬
해돋이가 선명하다,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울지 않고,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과거로 돌아간 이별도
슬픔으로 남지 않는다.
저 혼자 우는 달,
저 혼자 뜨는 해,
세상이 비춰진 곳에서는
이별을 슬픔이라 말한다.
세상의 뒷골목에서
날지 못하는 새
목마른 울음에 지쳐간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0시를
조금 지난.
그리움에 걸리다
- 이 시에 뭔가 있을 거라 기대를 하고 있다면 생각을 거두어 주시길…
목소리 낮춰 소망함. -
마지막 남은 알록달록한 껍질이
친구에 의해 벗겨지던 그때
희미하게 보이던 모든 것이
비로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창 밖, 한바탕 벼락이 내리고
소나기에 묻히는 신음소리
조금 거부반응이 있기는 했지만 이내
세상을 감싸는 침묵이 깊숙이 찾아오고
오름가즘을 오르내리는 숨소리만이
깊어가는 여름밤을 채워내고 있었다.
끼익끼익 삐걱이며 살과 살을 파고드는
섹스의 한 중간쯤
나는 비로소 그들에게서 고개를 떨구었고
그날 새벽
천정이라고는 있지도 않은 다락방에서
혼자서 수음을 했다
삶이란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상투적인 질문을 하고 있을 때
간밤의 천둥처럼 벨소리가 울리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며
친구는 마지막 인사를 한다
투우욱 -
끊어지는 저편 너머
나의 이상형이 끼루룩거리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희망도 남기지 않은 채
멍한 다락방에서 뚜욱뚝 떨어지는
천둥소리가 울리는 여름이 되면
해마다 찾아오는 그녀의 신음소리에
나는 가끔씩 슬픔을 내뱉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