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시인선 56
김명기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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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무 오래 중심을 잃고 살았다

 

- 직진금지

 

 

 

2.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는 계간 시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명기의 시집이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어떤 사람의 고뇌와 슬픔을 그린다. 그 중 하나의 시 직진금지를 보자. 직진금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생각의 고뇌를 그렸다. 시인은 아버지의 말이 수긍이 간다.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기만 하는 삶.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삶. 그 삶들이 내게 사무치게 다가올 때,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에서 시인은 꺠닫는다. 너무 오랫동안 중심을 잃고 살아왔음을. 그 깨달음이 자신을 살아가게 해야 한다는 걸.

 

 

 

3.

 

한 시만 보았지만, 이 시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삶, 그 삶들에서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야 하고, 중심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어쩌면, 나도 마찬가지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중심을 잃고 살아왔다. 누군가의 말들을 수긍하면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맞나, 이게 정말 맞나를 몇 번이고 되뇌어 보는 삶. 그 삶들은 비록,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좋은 이미지로 남으나, 정작 나 자신의 삶은 이리저리 흔들려, 제대로 한번 꽃피기도 힘든 삶. 그러나 그 이면의 너머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삶이기에, 언젠가는 제대로 꽃 피우리라는 희망. 비록, 중심을 잃고 나는 쓰러지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그 방황의 너머 너머에는 반드시 삶의 진실이 있일 것이고, 그 진실된 삶은 나의 미래를 제대로 데려가리라 하는 믿음.

 

 

너무 오래 중심을 잃고 살았다

 

는 깨달음이 주는 메시지. 중심을 잃고 살았기에, 나 자신이 그걸 깨닫는다면, 결국은 나 자신의 삶 너머로 갈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붙잡고 오늘을 살아가기로 한다. 삶은 그렇게 다가오니까. 삶은 그렇게 나를 너머너머로 데려가니까.

 

- 걷는사람에서 도서를 증정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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