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1
마른 나뭇가지
햇살에 타들어간다
너를 바싹,
태우고도 남을 세월
벽이 있다
벽 2
성냥개비 쌓아간다
널 기다리는 동안
완성된 탑
무심코 흘린 한숨
무너져 내리는.
벽 3
긴긴 세월 대답없는 너에게 나는 조금씩 지쳐간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너의 인내도 인내지만 이제는 나도 너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답 없던 네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내 인내력이 극도(極度)에 달해 네 대답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내게 넌 대답한다 너의 대답은 그것이었구나 바로 그것이었구나 오늘도 침묵하는 너는 어둠 속에서 저 맑은 세상을 바라다본다
0시 속(續) 0시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귀뚜라미, 울지 않는다
창밖, 이미 떠 있는 달은
이별을 삼키고 날아가는
슬픈 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허공에 뜬
해돋이가 선명하다,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울지 않고,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과거로 돌아간 이별도
슬픔으로 남지 않는다.
저 혼자 우는 달,
저 혼자 뜨는 해,
세상이 비춰진 곳에서는
이별을 슬픔이라 말한다.
세상의 뒷골목에서
날지 못하는 새
목마른 울음에 지쳐간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0시를
조금 지난.
목욕탕-개화(開花)
1
거품 부풀린 탕 속의 물뿌리, 깊게 흘러 넘쳐, 가장자리 섬세한 물결을 이룬다. 배관(配管)의 낡은 통로로 오래 묵은 때들이 배설(排泄)된다. 탕 안 가득 자연 향내 하수구로 흐른다. 동트는 날마다 게워지는 향내 뒤 아픔 서성이는 물살이 소리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탕 안 가득 움츠린 사람들 종일 지쳐 때묻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자랑스럽게,
아들의 때를 밀어주는 아버지, 거품 부풀려 한 올 두 올 얽어가는 때타월의 심심한 액체, 요란한 방울 소리로 흘러내린다. 세월 따라 흐르는 어르신들의 걸죽한 입담, 탕 안 가득 메우고 절제된 수증기 절제된 온도 절제된 사랑. 까르륵 소리와 함께 흘러 비워져가는 마음. 창문으로 들어찬 어둠이 내내 흐렸던 하루를 잠재운다.
2
소리 없이 아침이 들어찬다. 밤새 헤어진 꼭지 틀어 새해는 콸콸콸 넘쳐 흐른다. 텅텅 빈 탕 안 가득, 한 주름의 물결이 맑은 마음 주르륵 배수구로 흐른다. 한 줄기 밝은 물줄기 맑게 비추어 아름다운 탕 안,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조용하다. 밤새 움츠렸던 사람들 비로소 기지개를 켜면, 희망 가득 안은 인사 나누는 얼굴에 미소 가득하다, 거품
사라진 탕 속의 물뿌리 흘러흘러 야위었던 시간이 채워져 간다. 흐르는 물결이 다시 일어서고 껄껄껄 걸죽한 웃음소리 절제되어 탕 안 가득 번진다. 세월이 매만진 자리, 새로 쌓인 때들이 물뿌리에 실려나간다.
3
탕 안의 비좁은 창가 겨우 비집고 힘차게 뻗은 하얀 빛줄기, 비로소 햇살을 인식할 때쯤 떠오른 아아 한 줄기 저 강한 마음.
물살에 부풀은 새해가 힘찬 포효로 일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