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위키드 6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초승달이 뜬 어두운 밤, 검은 옷, 검은색 뾰족 모자, 검은 고양이, 하늘을 나는 빗자루. 마녀하면 생각나는 것들이다.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를 죽게 하거나 저주의 주문을 외워 사람을 두꺼비 같은 동물로 바꿔버리는 마녀는 지혜롭고 용감한 영웅이 꼭 물리쳐야할 악당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마녀의 그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린 한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키키. 13살이 된 키키가 마녀 수행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착한  바닷가 마을에서 ‘마녀배달부’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를 큰아이와 나는 무척 좋아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키키와 사람의 말을 하는 검은 고양이 지지가 나오는 <마녀 키키>를 당시 6살이었던 큰아이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 밝고 경쾌한 내용에 혹시 후속편이 제작되진 않을까...10년쯤 훌쩍 넘어 성숙한 여인이 된 마녀 키키의 활약을 또 볼 수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얼마전 내 앞에 한 명의 마녀가 나타났다. <위키드>의 초록색 표지 속엔 초록빛 피부의 마녀가 미소 짓고 있다. 한쪽 입꼬리만 씨익 올리고 웃는 모습에서 당돌하고 자존심 강한 여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온다. 초록빛 피부가 오히려 신비롭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엎은 초록색 마녀의 감동적인 이야기. 뉴욕, 런던, 도쿄를 강타한 뮤지컬 <위키드>의 원작이란 문구의 띠지를 두른 이 책은 마녀가 노란 벽돌길을 걸어가는 도로시 일행을 근처 나무에 숨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도로시의 신발에 유난스레 집착하는 마녀. 단순히 동생이 신던 신발이기 때문일까?




목사인 아버지 프렉스와 부유하고 혈통있는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 멜레나 사이에서 네스트 하딩스의 트롭 3대손이 태어난다. 하지만 고대하던 아기는 피부가 초록색인데다 날카로운 상어이빨을 한 여자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사랑이 아닌 ‘악’이 깃들어 저주받은 불길한 존재로 여겨진 아기. 프렉스는 딸에게 엘파바란 이름을 지어주지만 여느 아버지처럼 따스하게 품어주지는 않는다. 더구나 둘째를 임신한 멜레나는 야클이란 점쟁이 노인에게서 의문투성이의 이상한 예언을 듣는다.




십대후반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로 성장한 엘파바는 시즈 대학에 입학하고 금발의 미녀 갈린다와 룸메이트가 되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갈린다를 비롯한 동생 네사로즈, 보크, 티벳, 피예로, 애버릭 같은 친구를 사귀기보다 인간처럼 지적인 능력과 영혼을 가진 동물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딜라몬드 박사와 함께 동물 이동 금지령를 저지하는 연구를 하지만 어느날 박사가 갑작스런 의문사를 당하면서 엘파바는 동물들의 생존과 권리보호를 위한 투쟁 단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끼얹은 물에 의해 죽음을 맞는 서쪽 마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위키드>. 저자는 이 책에서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서쪽 마녀가 왜 사악한 마녀로 표현되는지, 정말로 죽어 마땅한 인물인지 얘기해보고자 했다고 한다. 서양고전 명작동화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오즈의 마법사>의 숨겨진 이면을 저자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닮았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소설로 재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만큼 그다지 성공적인 작품은 아닌 듯하다. 초록색 피부를 지닌 앨파바의 출생부터 성장하고 서쪽 마녀로 죽는 순간까지의 삶의 여정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서 소설의 구성이 허술하고 느슨해지고 말았다.




독재자인 마법사에 대항해 차별과 박해받는 동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더불어 오즈를 구하고자 했던 서슴없이 마녀이길 자처했던 앨파바. 그녀의 삶을 지루하게 늘어놓기보다 영웅적인 눈부신 활약에 초점을 맞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앨파바가 극장 앞에서 마담 모리블을 죽이려고 할 때나 민병대에 의해 사리마 가족이 잡혀가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이제야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맛보겠구나...했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사건이 흥미진진해지려고 할 때 계속 진행되지 않고 도중에 멈춰버리곤 했다. 활활 잘 타오르는 모닥불에 찬 물을 끼얹은 격이다.




사실 초록색 피부의 여전사!! 얼마나 매력적인가. 앨파바가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보다 지적이고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하늘을 나는 빗자루를 타고 오즈의 곳곳을 누비면서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한다. 하지만 협소한 공간의 실내에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이 소설이 서쪽 마녀의 이야기니 시작부터 이미 죽음이 예고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를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로 표현했을지 궁금했다. 악당이 분명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 그런 서쪽 마녀를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소설 속에서 만난 서쪽 마녀는 악당이라 할 수도 없었고 초록색 피부 외엔 그다지 특징이 없었다. 역시...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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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웃음 어디 갔지? - 생각하는 그림책 1
캐서린 레이너 지음, 김서정 옮김 / 청림아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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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월 24일 목요일. 날씨 : 해. 제목 :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번다.>

 

오늘은 속담책을 보았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번다. 근대 이상하다. 완전 내가 곰이고 엄마가 주인이다. 기분나쁘다. 비교하자면 엄마는 기와집이고 나는 초가집이다. 너무나 기분나빠서 화가 나서 화산폭팔할 것 같다. 근대 오늘 공부는 너무 많아 힘들어죽겠다. 너무나 힘들다. 끝.

큰아이가 지난 겨울방학때 쓴 일기다. 늘 한 페이지의 절반 정도만 쓰던 아이가 왠일로 한 페이지를 꽉꽉 채웠다. 도대체 뭘 썼길래? 궁금해서 봤더니 이런 내용일 줄이야...매일 조금씩 하기로 약속했던 문제집이 너무 많이 밀려서 야단을 쳤는데 그 사정을 모르시는 담임선생님께서 이걸 보시면 날 어떻게 생각하실지, 안 봐도 비디오다. 엄마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고쳐달라고 부탁해볼까. 아니, 불만이 가득 찬 아이에겐 소용없는 일이겠지...싶어 단념했다. 문제의 일기 때문에 엄마가 요렇게 가슴앓이를  하는 줄도 모르고 개학날 아침 아이는 일기장이 든 가방을 자랑스레 등에 메고 현관을 나섰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외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큰아이의 불만은 그 날 하루만의 얘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야단보다 잔소리를 싫어한다더니, 정말인가보다. 무슨 얘길해도 툴툴대고 짜증을 낸다. 예전에 비해 잘 웃지도 않는다. 밝게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예쁜 아이였는데...왜일까? 뒤늦게 태어난 동생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 웃음 어디 갔지?> 이 책에는 웃음을 잃어버려서 슬픈 호랑이 아우구스투스가 웃음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덤불 밑에 들어가고 높은 산 꼭대기에도 올라가고 깊은 바다와 사막에도 가보지만 웃음을 찾지 못한다. 그러다 갑자기 만난 비를 피하느라 물웅덩이에서 철퍽 거리며 한참 놀고나서야 깨닫게 된다. 웃음이 바로 자기 코 밑에 있다는 걸. 행복할 때면 언제나 웃음은 거기 있다는 걸. 

무척이나 짧고 간단한 내용이다. 반면에 그 속에 든 뜻은 깊고도 심오하다.


 

주인공인 호랑이 이름부터 범상치않다. 바로 ‘아우구스투스’.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이자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아우쿠스투스. 만약 황제인 그가 웃음을 잃어버려 슬픔에 빠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온 백성이 그의 웃음을 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았을까. ‘황제의 웃음을 찾아주는 이에겐 금은보화, 혹은 공주와 결혼시키겠다’고. 하지만 호랑이 아우구스투스는 달랐다. 그저 쭈우욱 기지개를 켠 뒤 웃음을 찾아 나선다. 없거나 잃은 건 다시 찾으면 된다는 간단하고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림 역시 시원시원하다. 얼핏 보면 붓 가는 대로 대충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흑갈색으로 서슴없이 죽죽 그려진 호랑이 줄무늬는 다른 사물이나 배경에 비해 호랑이를 더 돋보이게 했다. 더불어  독자의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오로지 호랑이의 동작이나 표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건 바로 호랑이의 눈이다. 밀림에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맹수 호랑이의 눈을 점 하나 콕, 찍어놓는 말다니! 정말 대담하다. 그리고 신기하다. 하나의 점에 불과한 호랑이의 눈이  어느 순간 씽긋 웃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걸 아이는 처음엔 이상하다, 줄무늬 때문에 어떤 게 눈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몇 번 반복해서 보던 어느날 드디어 아이는 “호랑이 표정, 진~짜  웃겨”하고 쿡쿡 웃음을 뱉었다. 오호라....드디어 웃는구나!!



 
이때를 놓칠새라 아이에게 물었다. “호랑이가 왜 웃는 거야?”  “웅덩이에서 물장구 치는 게 재밌어서”  “호랑이는 행복이 뭐래?”  “재밌는 거”   “넌 언제 행복한데?”  “멋진 장난감 살 때랑 맛있는 거 먹을때”...순간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을 살포시 누르고 “엄마랑 아빠랑 동생보다 더?”  “음...” 이럴수가!! 고민할 게 뭐 있냐? ㅠㅠ “만약 가족이 함께 있는 거랑 장난감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어쩔거야??”  “그럼, 가족!!”   "그래, 행복은 머~얼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거...그게 바로 행복이네!!"  앗싸!! ^^

 

호랑이 아우구스투스가 웃음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행복이란 결코 잡을 수 없는 무지개가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모든 곳에 있다는 진실을.

 

참, 표지에서부터 줄곧 옆모습만 보이던 호랑이가 웅덩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난 마지막에 가서야 정면을 바라보는데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치 책을 보고 있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네는 듯하다.

 

 

행복에 대해 막연하게 갖는 생각-이상-과 지금의 생활-현실-을 웅덩이에 자신을 비춰보듯 마주봐야 한다고.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그 다음엔? 숙제를 끝낸 아이가 밖으로  놀러나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모든 곳에 있는 행복을 만끽하라고. 

 

아이와 얘길하고 책장을 덮으면서 무척 홀가분했다.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막 해결한 느낌. 혹시나 그 기분이 달아날까봐 얼른 아이를 꼬옥 안았다. 덩치는 크지만 아직 어린 아이. 이 아이의 마음을 그동안 너무 몰라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이란 그리 거창하지 않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나 역시 잊고 살았다. 


너 그거 아니?  행복은 세상 모든 곳에 있지만 엄마는 니들이 웃을 때가 젤루 행복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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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기러기
폴 갤리코 지음, 김은영 옮김, 허달용 그림 / 풀빛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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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직장 일 때문에 알게 된 교수님이 계셨다. 첫인상에서부터 인품이나 성격, 직업, 배경,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정말 좋은 조건을 갖추셨다. 내가 신랑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옆지기가 되어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언니에게 넌지시 얘기했다. 이러이러한 분이 계신데 언니가 만나보겠냐고. 선뜻 좋다고 대답하는 언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있지....그 교수님, 다~아 좋은데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다리를 좀 절룩거리시거든. 절대 심하진 않고. 목발도 없이 다니시고....직접 운전까지 하시니까. 그 정도면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어때?”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언니의 표정이 달라졌다. 니가 제정신이냐며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언니 중매 한 번 서려다 오히려 혼쭐이 났다.




나와 신랑은 지금도 한번씩 그 교수님을 얘기한다. 이 세상에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겠냐고, 신체조건이 일반 사람과 좀 다르다는 게 그리 큰 문제일까. 부족한 점 서로 감싸주고 메워가면서 사는 게 부부 아니겠냐고...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필립 리야더. 앨더강의 버려진 등대에  혼자 살면서 새와 자연의 풍경을 그린다. 곱사등이에 왼팔마저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그를 마을 사람들은 ‘등대에 사는 흉측한 난쟁이’라 부르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기형적이고 흉측한 외모에 가려진 그의 따뜻한 가슴, 사람과 동물, 자연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을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프리다란 소녀가 다친 흰기러기를 안고 필립을 찾아온다. 그는 흰기러기에게 ‘길 잃은 공주님’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치료해주는데 그 일을 계기로 프리다는 매년 흰기러기가 필립을 찾아올 때면 등대를 방문하게 된다. 자신만의 공간, 등대에서 혼자 생활하던 필립은 흰기러기와 프리다에 의해 외로움이란 감정을 알게 되고 닫힌 마음도 조금씩 열려가고 있었다. 프리다 역시 필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됐는데...




당시 유럽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던 2차 대전은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틈도 주지 않았다. 영국 군인들이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되어 있는데 항구마저 파괴되어 해군수송선이나 구축함도 그들을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립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떠난다. 흰기러기와 함께.




필립과 흰기러기의 뒷이야기는 당시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죽음이 눈앞에 바싹 다가온 그들 앞에 흰기러기와 한 남자가 작은 돛단배를 타고 나타나 밤새 해변과 바다를 왕복하면서 700명을 구해냈다고.




“사람들이, 그러니까 병사들이 사냥꾼 총에 맞은 새들처럼 바닷가에 버려져 있어. 프리다, 너와 내가 우리로 데려와 보살펴 주었던 다친 새들처럼 말이야....도와워야 해, 프리다. 도움을 기다리는 새들을 구하러 가듯이, 난 병사들을 도우러 가야 해.” - 49쪽.




<흰기러기>에서 필립이 영국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것처럼 <작은 기적>의 페피노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인 당나귀 비올레타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다. 병든 비올레타를 세상 사람들은 고치지 못하더라도 신이 만든 무엇이든 아끼고 사랑했던 성 프란시스라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페피노. 오로지 성 프란시스의 무덤 앞에 비올레타를 데려가기 위한 소년의 순수한 마음은 7백년이 넘도록 굳게 닫혀 있던 벽을 허물고 기적을 일으킨다.




필립과 페피노.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흉측하고 볼품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당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느 누구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웠으며 감동적이었다. 짙게 가라앉은 어둠을 밝히는 촛불 같았다.




다만 한 번만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나의 이해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불과 120여쪽에 <흰기러기>, <작은 기적>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상대적으로 내용이 짧은 편이다. 또 미사여구가 극히 절제된 문장과 수묵화로 그려진 삽화는 왠지 건조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헨리상을 수상했다더니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




다음날 한번 더 책을 들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지났을 때, 느닷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프리다를 사랑하면서도 차마 전하지 못한 필립의 마음이 흰기러기의 날개짓에 실려 프리다에게 전해졌을 때처럼 내 가슴을 가로막고 있던 둑이 터져버렸다.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중년의 토토가 어린 시절 신부의 검열로 인해 잘려나간 수많은 영화 속의 키스 장면을 이어붙인 테이프를 보며 울음이 터져나올 때처럼 필립과 프리다의 안타까운 사랑이 하루 중에도 수시로  파도처럼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목울대까지 울컥 차오르는 울음을 감추려고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페피노의 두려움과 절망이 전염이라도 된 듯 잠든 아이의 얼굴을 자꾸 확인하곤 했다.




책을 읽는건 불과 1시간도 채 안 걸렸지만 그 몇 배, 몇 십 배 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책 <흰기러기>. 장영희 교수는 <내 생애 단 한번>에서 ‘영혼도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다’고 했는데 아주 잠깐이지만 필립과 프리다, 그들 영혼의 만남을 목격한 기분이 든다.




태어날 때 그대로, 아무것도 더하거나 덜한 것 없는 순수한 영혼이 또 하나의 순수한 영혼과 소통했다. - 70쪽.




* 뱀꼬리 :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지만 옥의 티는 피해갈 수가 없다. 사소한 오탈자가 아닌 등장인물의 이름이 바뀌었다.




118쪽. “네, 신부님, 꼭 그래야 한다면 페피노를 드리겠어요. 하지만 제발, 제발 페피노가 제 곁에 조금만 더 오래 함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비올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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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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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키스하는 연인의 에로틱(?)한 모습을 띠지로 두른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를 처음 봤을 때 당연히 연인들의 사랑, ‘베아트리체’란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삶을 다룬 책이려니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어이없게도 ‘베아트리체’란 이름에서부터 어긋났다. ‘베아트리체’란 단테의 생애를 통해  사랑과 시혼(詩魂)의 원천이 되었던 여성으로 그 존재 여부에 대해 이상설(理想說), 상징설 같은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데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그것도 모르고 난 ‘주인공의 등장이 왜 이렇게 늦는거야’라고 투덜댔으니...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이래서 고전은 꼭 읽어야 하나보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그 해 여름이 있었다’고 시작한 소설은 1970년대 바다가 보이는 스페인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화자인 ‘나’가 당시 십대 후반이었던 주변 친구들의 일상과 우정, 사랑, 더 나아가 그들의 청춘을 돌아보고 추억하는 내용이다. 표지엔 단 네 명의 소년(?)이 그려져 있지만 책 속엔 훨씬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인 미겔리토는 신장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옆 침대에 있던 환자가 죽고 난 후 그의 가족에게서 단테의 <신곡>을 건네받는다. 죽어간 남자에게 있어 그 책은 버팀목이었고 구원이었다. 미겔리토 역시 죽을 힘을 다해 그 책의 몇 구절을 외우고선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의 연인, 베아트리체 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룰리가 유혹에 흔들리면서 그들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마치 아름다운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는 순간 끝이 예고되어 있는 것처럼.




바람벽 파코는 머리숱이 적은데다 내세울만한 외모도 아니다. 다만 집이 부유하여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에 늘 젊은 여자들을 잔뜩 태우고 다니면서 사랑을 나누는데 파코 일행은 그 자동차 안을 여기저기 뒤져서 나오는 여자들의 음모를 수집한다. 멧돼지란 별명으로 불리는 아마데오 눈니에겐 빼어난 미모의 고모가 있다. 섹시한 미국 여배우 ‘라나 터너’가 되길 꿈꾸는 그녀는 동네 사내 아이들에게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온몸에 뒤덮힌 털이 고민거리인 아벨리노 모리타야와 카르타고 투구 아가씨, 라피, 뚱땡이, 살덩이...그들이 서로 만나 어울리면서 성에 눈떠가고 고민하고 상처받으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화자인 ‘나’의 시점을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 다른 소설에 비해 특이했다. 1인칭 시점의 소설임에도 ‘나’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독특한 전개방식. 그래서 초반엔 스토리의 흐름을 잡아내기가 힘들었지만 조금 지나자 그들이 몇 명씩 무리지어 다니며 여러 일을 벌이는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앞뒤의 내용을 서로 이어붙이고 연결지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그 해 여름이 있었다...11쪽.




여름과 성장...이 둘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의 우정과 상처, 성장을 다룬 책을 보면 ‘여름’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한다. 계절적 배경이 여름이거나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는 경우...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언뜻 생각나는 소설 중에 <열 네 살의 여름> <여름이 준 선물> <우리들의 여름>이 있다. 그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자신의 외모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고 ‘삶’이나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수시로 변하는 생생한 자연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특별한 게 없다. 언니들처럼 거리에서 만나는 잘생긴 남학생 때문에 가슴을 두근대지도 않았고 학교의 총각선생님이 무작정 좋아서 꽃이나 선물을 한 적도 없고 좋아하는 연예인 따라 콘서트에 가거나 연예인 사진 같은 걸 사서 모으는 취미도 없었다. 친구와 늘 붙어 다녔거나 지금까지 연락이 자주 오가는 친구도 딱히 없다.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결혼하면서 먼 지방이나 외국으로 가버린 탓도 있지만...한마디로 밍숭밍숭 재미없는 아이였다.




스페인의 영국인 거리를 배경으로 사내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소설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거리상으로는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할 정도로 거리가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왠지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 봄이 차례로 오듯이 아이도 어른이 되기 마련이라는 아주 당연한 삶의 법칙, 순리를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사진을 찍어왔다. 그 사진들 중 어떤 것이 우리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마지막 사진 한 장이 우리가 진정 누구였는지 밝혀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미겔 다빌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 해 여름이 우리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것을. -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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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조용한 집안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이가 자고 있어서 얼른 수화기를 들어야 하는데도 왠지 받기 싫어질 때가 있다. 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날 알지도 못하면서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전화...“안녕하세요. 사모님, 여기 부동산투자 회산데요. 좋은 투자정보 알려드리려고...” 둘째, 내 이름 석 자만 아는 경우, “안녕하세요. @@@님. 저희 &&&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회원님 같은 우수회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를...” 솔직히 이 두 전화는 별 거 아니다. 무시하고 끊어버리면 되니까. 문제는 세 번째 경우다.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이 노래가 생각날 정도로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 썩 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앞의 경우처럼 싹 무시할 수도 없다. 근데 그 친구가 대뜸 집에 오겠단다. 오겠다는 사람 막을 수 없을뿐더러 오랜만에 친구들 얘기 좀 들어볼까...하는 마음에 초대를 한다. 하지만 결국엔 후회를 한다. 내가 왜 오라고 했던고...ㅠㅠ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만난 적 없던 그들은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고 싶은, 내 소망을 아주 가뿐히 넘긴다. “그래, 그냥 집에 있는거야? 아무 일도 안하고? 남편이 뭐라 안해?” “요즘 세상에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가 어딨니? 이런 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무능력하다는 증거야” 그리곤 자신의 방문목적을 드러낸다. ‘이거 써보면 정말 좋다’는 판매에서부터 ‘나랑 같이 일하자’는 다단계사업, ‘이것 하나는 준비를 해두라’는 보험에 이르기까지...난데없이 등장해선 평화(?)로이 살고 있는 날 휘저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내게 한동안 뜸...했던 친구의 전화는 경계대상 1순위다.




<패싱>의 주인공 아이린은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받고 한참 망설인다. 발신인은 없지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데다 내용 역시 어떨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읽어보기 싫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편지를 읽고 만다. 두려움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봉투를 자르고 접힌 편지를 꺼낸다.




‘패싱’. 백인 행세하기란 설명이 작은 글씨로 쓰인 이 책은 아이린이 옛 동창생이었던 클레어의 편지를 받고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떠올리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짧은 부분에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와 사건들이 숨어있는 듯하다.




그건 네 잘못이야, 아이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내가 그때 시카고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끔찍하고 황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 18쪽.




팔월, 태양이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던 날, 방문차 시카고에 있던 아이린은 시원한 바람을 찾아 호텔 옥상 카페를 찾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클레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여성. 백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녀들은 백인처럼 보일뿐 흑인의 피가 흐르는 흑백혼혈이다. 12년만에 만난 둘은 백인 행세, 패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클레어의 남편이 ‘내 가족에 검둥이는 절대 안된다’는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아이린 자신은 물론 클레어 역시 흑백혼혈이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리고 2년 후, 클레어가 뉴욕으로 찾아오면서 아이린과 클레어는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화려하고 매력적인 외모와 밝고 쾌활한 성격을 부러워하는 반면에 그녀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생활방식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는 건 않을까 막연히 불안해하는데...




“내가 전혀 너와 같지 않다는 걸 넌 못 알아차렸니?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난 어떤 일도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버려. 정말이야 르네, 난 위험해” -152쪽.




이 소설의 화자는 아이린이다. 하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인 클레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본질을 숨겨야했던 클레어.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아이린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동안 자신이 외면해왔던 흑인들의 세계에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지만...




아이린과 클레어, 서로를 동경하고 질투하다 결국 치명적인 결말을 맞는 그들의 얘기를 담은 이 소설은 무척 빨리 읽혀진다. 200쪽을 조금 넘긴 소설의 길이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저자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책에 몰입하게 만드는 듯하다. 특히 후반에 클레어를 질투하면서도 그녀의 비밀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아이린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흑백혼혈인의 자기 정체성과 그들간의 갈등,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다룬 소설 <패싱>. 저자인 넬라 라슨은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자 대표작인 이 작품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흑인들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지만 집필활동을 접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라이브의 여왕으로 불리는 어느 흑인혼혈 여가수의 얘기가 생각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제발, 제발....아기가 절 닮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자신의 몸에 깃든 또 하나의 생명, 그 아기가 자신을 행여 닮을까봐 매일 불안에 떨었다는 얘기를 무심코 흘렸었는데...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이린과 클레어, 그녀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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