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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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엔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을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림의 윤곽이 사람의 형체란 걸 알 수 있었다. 측면 15도로 향한 얼굴의 형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보자마자 누군지 단박에 알만큼 친숙한 인물은 아니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제야 떠오르는 얼굴. 바로 폴 오스터였다.


 

폴 오스터의 소설 <바움가트너>는 정원사란 의미의 바움가트너란 성을 가진 노교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0년 전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은퇴를 앞둔 노교수. 이것만으로도 주인공인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일상이 어떨지 떠올랐다. 오랫동안 함께 삶을 꾸려왔기에 서로의 존재는 마치 공기처럼 사소한 일상의 곳곳에 자연스레 녹아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한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배우자의 사망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라고 한다.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 스트레스 수준을 넘어 염증이나 심하게는 심장 질환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될까. 어떤 일이 일어날까.

 

10년이란 세월은 쓰나미 같던 슬픔을 어느 정도는 잠재울 수 있겠지만 완전히 치유하진 못한다. 언제, 어떤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무의식 깊숙하게 가라앉은 상실은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말 것이다. 바움가트너에게도 그랬다. 일상의 루틴이 아주 사소한 일로 어긋나는 것이 시작이었다. 아차 하다가 냄비를 태우고 손에 화상을 입는다. 가사도우미(플로렌스 부인)의 딸 로지타에게서 플로렌스 씨가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흥분한 로지타를 간신히 안심시키지만 실은 그도 이미 심리적으로 동요가 된 상태. 어두운 지하실 층계를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바닥으로 구르고 만다.


 

저게 시작이었다. 그는 혼잣말을 한다. 오늘의 첫 사고, 그로 인해 다른 모든 사고가 생겨나는 바람에 끝없는 사고로 얼룩진 하루가 되어 버렸지만..-31


 

오래전 중고가게에서 고작 10센트 주고 구입한 냄비를 시커멓게 태운 일은 바움가트너에게 잊고 있던 아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내를 처음 만난 그 날을. 거기다 10년 만에 들어간 아내의 서재에서 그는 그녀의 발표하지 않은 글을 발견하게 된다. 또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팔다리에서 환지통이라는 통증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환지통에 호기심이 생긴 바움가트너는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마치 그에게 환지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68

 


20244월 폴 오스터는 세상을 떠났다. <바움가트너>는 폴 오스터의 1주기에 맞춰 출간된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삶과 죽음, 기억과 정체성, 상실과 고통을 심오한 철학처럼 풀어놓았는다. <빵 굽는 타자기>, <폐허의 도시>,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만나지 못한 작가 폴 오스터. 그와의 첫 만남이 마지막 작품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바움가트너가 상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을 따라 과거로 향하듯 나도 그렇게 해볼까. 그의 작품을 거꾸로 읽어보자. 의미있는 책읽기가 되지 않을까.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보는데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저렇게 하얀 구름이라니. (중략) 지구에는 불이 붙었고, 세상은 타오르고 있는데, 그래도 지금 당장은 이와 같은 날이 있으니 즐길 수 있을 때 이런 날을 즐기는 게 낫다. 이게 그가 보게 될 마지막 좋은 날일지 누가 알겠는가.-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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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폴 오스터 정말 좋아해서 그의 책을 다 찾아서 읽은 적도 있네요. 그리고 달의 궁전 이후 좀 시들해졌는데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서 이 책은 읽어야겠다하고 있어요. 몽당연필님 리뷰 보니까 역시 읽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