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키드 1 - 엘파바와 글린다 ㅣ 위키드 6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초승달이 뜬 어두운 밤, 검은 옷, 검은색 뾰족 모자, 검은 고양이, 하늘을 나는 빗자루. 마녀하면 생각나는 것들이다.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를 죽게 하거나 저주의 주문을 외워 사람을 두꺼비 같은 동물로 바꿔버리는 마녀는 지혜롭고 용감한 영웅이 꼭 물리쳐야할 악당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마녀의 그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린 한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키키. 13살이 된 키키가 마녀 수행을 위해 고향을 떠나 도착한 바닷가 마을에서 ‘마녀배달부’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은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를 큰아이와 나는 무척 좋아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키키와 사람의 말을 하는 검은 고양이 지지가 나오는 <마녀 키키>를 당시 6살이었던 큰아이가 어찌나 좋아하는지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 밝고 경쾌한 내용에 혹시 후속편이 제작되진 않을까...10년쯤 훌쩍 넘어 성숙한 여인이 된 마녀 키키의 활약을 또 볼 수 있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다.
그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얼마전 내 앞에 한 명의 마녀가 나타났다. <위키드>의 초록색 표지 속엔 초록빛 피부의 마녀가 미소 짓고 있다. 한쪽 입꼬리만 씨익 올리고 웃는 모습에서 당돌하고 자존심 강한 여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온다. 초록빛 피부가 오히려 신비롭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엎은 초록색 마녀의 감동적인 이야기. 뉴욕, 런던, 도쿄를 강타한 뮤지컬 <위키드>의 원작이란 문구의 띠지를 두른 이 책은 마녀가 노란 벽돌길을 걸어가는 도로시 일행을 근처 나무에 숨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도로시의 신발에 유난스레 집착하는 마녀. 단순히 동생이 신던 신발이기 때문일까?
목사인 아버지 프렉스와 부유하고 혈통있는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 멜레나 사이에서 네스트 하딩스의 트롭 3대손이 태어난다. 하지만 고대하던 아기는 피부가 초록색인데다 날카로운 상어이빨을 한 여자아이였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사랑이 아닌 ‘악’이 깃들어 저주받은 불길한 존재로 여겨진 아기. 프렉스는 딸에게 엘파바란 이름을 지어주지만 여느 아버지처럼 따스하게 품어주지는 않는다. 더구나 둘째를 임신한 멜레나는 야클이란 점쟁이 노인에게서 의문투성이의 이상한 예언을 듣는다.
십대후반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로 성장한 엘파바는 시즈 대학에 입학하고 금발의 미녀 갈린다와 룸메이트가 되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갈린다를 비롯한 동생 네사로즈, 보크, 티벳, 피예로, 애버릭 같은 친구를 사귀기보다 인간처럼 지적인 능력과 영혼을 가진 동물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딜라몬드 박사와 함께 동물 이동 금지령를 저지하는 연구를 하지만 어느날 박사가 갑작스런 의문사를 당하면서 엘파바는 동물들의 생존과 권리보호를 위한 투쟁 단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끼얹은 물에 의해 죽음을 맞는 서쪽 마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위키드>. 저자는 이 책에서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서쪽 마녀가 왜 사악한 마녀로 표현되는지, 정말로 죽어 마땅한 인물인지 얘기해보고자 했다고 한다. 서양고전 명작동화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오즈의 마법사>의 숨겨진 이면을 저자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닮았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소설로 재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만큼 그다지 성공적인 작품은 아닌 듯하다. 초록색 피부를 지닌 앨파바의 출생부터 성장하고 서쪽 마녀로 죽는 순간까지의 삶의 여정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서 소설의 구성이 허술하고 느슨해지고 말았다.
독재자인 마법사에 대항해 차별과 박해받는 동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더불어 오즈를 구하고자 했던 서슴없이 마녀이길 자처했던 앨파바. 그녀의 삶을 지루하게 늘어놓기보다 영웅적인 눈부신 활약에 초점을 맞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앨파바가 극장 앞에서 마담 모리블을 죽이려고 할 때나 민병대에 의해 사리마 가족이 잡혀가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이제야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맛보겠구나...했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사건이 흥미진진해지려고 할 때 계속 진행되지 않고 도중에 멈춰버리곤 했다. 활활 잘 타오르는 모닥불에 찬 물을 끼얹은 격이다.
사실 초록색 피부의 여전사!! 얼마나 매력적인가. 앨파바가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보다 지적이고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하늘을 나는 빗자루를 타고 오즈의 곳곳을 누비면서 스릴 넘치는 모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어야 한다. 하지만 협소한 공간의 실내에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이 소설이 서쪽 마녀의 이야기니 시작부터 이미 죽음이 예고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를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로 표현했을지 궁금했다. 악당이 분명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 그런 서쪽 마녀를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소설 속에서 만난 서쪽 마녀는 악당이라 할 수도 없었고 초록색 피부 외엔 그다지 특징이 없었다. 역시...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