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기러기
폴 갤리코 지음, 김은영 옮김, 허달용 그림 / 풀빛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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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직장 일 때문에 알게 된 교수님이 계셨다. 첫인상에서부터 인품이나 성격, 직업, 배경,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정말 좋은 조건을 갖추셨다. 내가 신랑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옆지기가 되어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언니에게 넌지시 얘기했다. 이러이러한 분이 계신데 언니가 만나보겠냐고. 선뜻 좋다고 대답하는 언니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있지....그 교수님, 다~아 좋은데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으셔서 다리를 좀 절룩거리시거든. 절대 심하진 않고. 목발도 없이 다니시고....직접 운전까지 하시니까. 그 정도면 만나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어때?”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언니의 표정이 달라졌다. 니가 제정신이냐며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언니 중매 한 번 서려다 오히려 혼쭐이 났다.




나와 신랑은 지금도 한번씩 그 교수님을 얘기한다. 이 세상에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있겠냐고, 신체조건이 일반 사람과 좀 다르다는 게 그리 큰 문제일까. 부족한 점 서로 감싸주고 메워가면서 사는 게 부부 아니겠냐고...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필립 리야더. 앨더강의 버려진 등대에  혼자 살면서 새와 자연의 풍경을 그린다. 곱사등이에 왼팔마저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진 그를 마을 사람들은 ‘등대에 사는 흉측한 난쟁이’라 부르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기형적이고 흉측한 외모에 가려진 그의 따뜻한 가슴, 사람과 동물, 자연을 사랑하는 넉넉한 마음을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프리다란 소녀가 다친 흰기러기를 안고 필립을 찾아온다. 그는 흰기러기에게 ‘길 잃은 공주님’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치료해주는데 그 일을 계기로 프리다는 매년 흰기러기가 필립을 찾아올 때면 등대를 방문하게 된다. 자신만의 공간, 등대에서 혼자 생활하던 필립은 흰기러기와 프리다에 의해 외로움이란 감정을 알게 되고 닫힌 마음도 조금씩 열려가고 있었다. 프리다 역시 필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됐는데...




당시 유럽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던 2차 대전은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틈도 주지 않았다. 영국 군인들이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되어 있는데 항구마저 파괴되어 해군수송선이나 구축함도 그들을 구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립은 그들을 구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떠난다. 흰기러기와 함께.




필립과 흰기러기의 뒷이야기는 당시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졌다. 죽음이 눈앞에 바싹 다가온 그들 앞에 흰기러기와 한 남자가 작은 돛단배를 타고 나타나 밤새 해변과 바다를 왕복하면서 700명을 구해냈다고.




“사람들이, 그러니까 병사들이 사냥꾼 총에 맞은 새들처럼 바닷가에 버려져 있어. 프리다, 너와 내가 우리로 데려와 보살펴 주었던 다친 새들처럼 말이야....도와워야 해, 프리다. 도움을 기다리는 새들을 구하러 가듯이, 난 병사들을 도우러 가야 해.” - 49쪽.




<흰기러기>에서 필립이 영국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것처럼 <작은 기적>의 페피노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인 당나귀 비올레타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나선다. 병든 비올레타를 세상 사람들은 고치지 못하더라도 신이 만든 무엇이든 아끼고 사랑했던 성 프란시스라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굳게 믿었던 페피노. 오로지 성 프란시스의 무덤 앞에 비올레타를 데려가기 위한 소년의 순수한 마음은 7백년이 넘도록 굳게 닫혀 있던 벽을 허물고 기적을 일으킨다.




필립과 페피노.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흉측하고 볼품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소외당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어느 누구보다도 빛나고 아름다웠으며 감동적이었다. 짙게 가라앉은 어둠을 밝히는 촛불 같았다.




다만 한 번만으로는 그들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나의 이해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불과 120여쪽에 <흰기러기>, <작은 기적>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상대적으로 내용이 짧은 편이다. 또 미사여구가 극히 절제된 문장과 수묵화로 그려진 삽화는 왠지 건조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오헨리상을 수상했다더니 너무 과장된 거 아닌가...?




다음날 한번 더 책을 들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지났을 때, 느닷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프리다를 사랑하면서도 차마 전하지 못한 필립의 마음이 흰기러기의 날개짓에 실려 프리다에게 전해졌을 때처럼 내 가슴을 가로막고 있던 둑이 터져버렸다.




마치 <시네마 천국>에서 중년의 토토가 어린 시절 신부의 검열로 인해 잘려나간 수많은 영화 속의 키스 장면을 이어붙인 테이프를 보며 울음이 터져나올 때처럼 필립과 프리다의 안타까운 사랑이 하루 중에도 수시로  파도처럼 밀려와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목울대까지 울컥 차오르는 울음을 감추려고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페피노의 두려움과 절망이 전염이라도 된 듯 잠든 아이의 얼굴을 자꾸 확인하곤 했다.




책을 읽는건 불과 1시간도 채 안 걸렸지만 그 몇 배, 몇 십 배 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책 <흰기러기>. 장영희 교수는 <내 생애 단 한번>에서 ‘영혼도 큰 소리로 말하면 듣는다’고 했는데 아주 잠깐이지만 필립과 프리다, 그들 영혼의 만남을 목격한 기분이 든다.




태어날 때 그대로, 아무것도 더하거나 덜한 것 없는 순수한 영혼이 또 하나의 순수한 영혼과 소통했다. - 70쪽.




* 뱀꼬리 : 너무나 감동적인 책이지만 옥의 티는 피해갈 수가 없다. 사소한 오탈자가 아닌 등장인물의 이름이 바뀌었다.




118쪽. “네, 신부님, 꼭 그래야 한다면 페피노를 드리겠어요. 하지만 제발, 제발 페피노가 제 곁에 조금만 더 오래 함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 비올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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