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사랑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강좌에 참석하면 강사로 오신 교수님들께서 강의시작 전에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에....이 주제는 우리 대학원생들 한 학기(혹은 1년) 과정인데....이걸 90분에 여러분께 알려드리려고 하니, 참....어렵습니다. 슬라이드 자료만도 엄청난데...하지만 뭐, 할 수 있는데까지 달려봅시다.”


그리고 90분 동안 땀을 흘리며 열심히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몸이 피곤해도 감히 졸수가 없다. 강의 주제에 관해 초보자인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핵심만 추려서 전달하기 위해 교수님은 얼마나 애쓰셨을까...


<이덕일의 역사사랑>도 그런 수고로움이 절실히 느껴지는 책이었다.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풀어서 쓰는 것도 힘든 일인데 분량은 정해져있다. 한 꼭지마다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그 속에 지나온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비춰보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 중엔 시사적인 면에서 뒤처지거나(칼럼으로 쓰여진 것을 모아서 출간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저자의 책으로 출간된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처음 알게된 사실이 몇 배 더 많았다.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아동들이 7,8세 무렵부터 과거 공부에만 전념한다고 한탄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요즘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수능에 메달린다는 것과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편지로 두 아들을 교육시켰다는 것, 세종때 영의정이었던 황희가 아들이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자 관복을 입고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니 앞으로 손님의 예로써 대하겠다”는 대목은 나의 자녀교육관을 돌아보게 했다.


또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주몽>과 관련해서 드라마에선 한사군의 제철 기술이 우리보다 뛰어나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연.청동 합금같은 고도의 합금 기술은 고조선이 한나라보다 훨씬 앞서 나타났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중국보다 문명이 낮았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책읽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대목도 많았다. 특히 만주벌판에 우뚝 서있는 비석이 광개토대왕비란 사실을 최초로 파악한 사람이 일본 참모본부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일제는 과거의 역사를 지배하는 자가 현실의 인식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고 100년전 비석의 반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여년 후인 지금,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으로 변해가는 현실은 우리가 과연 과거역사를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도 있는지도 모른다. - 109쪽.


또 지금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이끌어가는 사람이 일제 식민사학자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현재까지도 그것이 정설로 되어버렸다는 것이나 우리는 동북공정뿐 아니라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와도 싸워야 한다고 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얼마나 소홀히 대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이 책의 제목에서 사랑이 愛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저자가 역사학자이자 칼럼리스트니까. 하지만 책표지를 자세히 보고서야 내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의 사랑은 舍廊이다. 옛날 사대부를 비롯한 양반집에 있던 사랑방의 그 사랑!! 대화의 장인 그곳에서 옛날 사람들이 시국을 한탄하며 열띤 토론을 별였듯 이제 우리도 대화를 살려야할 시점에 왔다는 것이다.


역사를 사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역사를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서 대화를 해야한다는 뜻이 아닌가...그야말로 절묘하다. 멋지다!! 


역사는 더 이상 국사가 아니다. 흔히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역사 공부에 담을 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를 공부하는 전문지식인만의 영역이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산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 큰 강이 되고 그 강이 바다로 이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역사도 미래와 맞닿아있다.


박물관 강좌에 오신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다가올 미래는 역사전쟁시대다. 어느 나라가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힘이 생기고 돈(관광수입)도 생긴다...고. 역사에 있어 더 이상 방관자의 자세를 고집하지 말자.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와 다정한 대화를 나눠보자. 그것이 바로 다가올 역사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슬리의 비밀일기
앨런 스트래튼 지음, 이장미 그림, 박슬라 옮김 / 한길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마음 놓고 아이 기르기엔 너무나 험한 세상이다.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유괴, 성폭행, 살해와 같은 사건들이 심심찮게 벌어지는 요즘은 남자아이라고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주변 사람도 무작정 믿을 수 없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하질 않던가.


아침에 현관을 나서서 오후에 돌아올 때까지 아이는 수많은 위험요소에 노출되어 있다. 오죽하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의 알람장엔 ‘낯선 사람 따라가지 않기’ ‘마치면 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기’와 같은 글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적혀 있다.


청소년들도 상황이 다르진 않다. 세계에서 인터넷강국으로 통하는 우리나라에서 10대 청소년들이 범하는 성범죄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라 한다. 그래서 어둡고 외진 밤길에서 제일 무서운 건 10대 중.고등학생 몇 명이 무리지어 있을때라는 말도 있다. 내가 어릴적만 해도 아이는 낳기만 하면 저절로 알아서 큰다고 했는데, 요즘은 아이를 낳는 것보다 무사히 기르는 게더 큰 걱정거리다.


이 책의 주인공인 레슬리는 자칭 불량소녀다. 다른 여자를 만나 엄마와 자신을 버린 아빠가 죽도록 밉고, 자신에게 소리지르는 엄마 역시 지겹고 못마땅하다. 유일한 친구였던 케이티와의 사이도 예전같지 않고 왠지 멀게 느껴진다.


어딘가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데가 없어진 레슬리는 선생님의 지시로 쓰게된 일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제이슨과 사귀면서 벌어진 일들, 제이슨이 술취한 자신을 성폭행하면서 거듭되는 요구와 폭행들을...왜냐면 그것은 비밀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 비밀일기를 몇몇 선생님이 읽으면서 곪은 상처가 터지듯 사건이 불거진다. 그리고 레슬리는 고민에 빠진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그냥 덮을 것인가 아니면 드러내어 잘잘못을 가릴 것인가. 결국 레슬리는 맞서 싸우는 쪽을 택한다.


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런 게 없다. 내가 앞으로 되고 싶은 사람, 혹을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한테는 - 366쪽.


미국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레슬리처럼 폭행을 당한 자녀에게 당당히 맞서라고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까.


대학을 졸업한지 1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교수님이 계신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첫 시간인데도 그 교수님은 우리에게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하셨다. 주제는 <피임법에 대하여>. 그뿐이 아니다. 기말고사때 이런 문제를 내셨다. <자녀를 성폭행으로부터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로 나는 제대로된 성교육을 대학졸업반때 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뭐라고 답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몇 번을 생각해봐도...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해주고 항상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리 가족은 널 사랑한다고....


나는 아직도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건지 모르겠다. 이런 운명일까. 아니면 숙명? 이런 일이 일어난데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거라면 대체 그건 뭘까?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거라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는 게 무척 기분좋은 일이라는 것뿐이다. -375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석란1 2007-05-1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승의 날에 쿵쿵 선생님들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우연찮게 여고 시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학교시절 남선생님들께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백하더군요.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던 걸 큰 행운으로 여겨야겠더군요. 덩치가 작아서 덕을 본 샘이라고 해야겠죠. 그래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했습니다.
 
 전출처 : 글샘 > 도종환, 스승의 기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떤 감정을 사랑이라고 하는 건가..

           이런 것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난 이 의문에 대해 한번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사랑이란 감정은 누군가를 마냥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하는 정도로만 여겼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느낄 수 있는 고뇌나 아픔은 언제나 괄호밖에 두고 외면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의미있는 일이었다.


사랑의 여섯 가지 이름이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보통 책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편이고 단편이라 길이도 짧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알맹이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글이 술술 읽힌다고 신이 나서 책장을 팍팍 넘기다보면 책을 다 읽고 나서 꼭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작가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주장하는 바가 뭐야? 엉?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이 책은 될 수 있는한 천.천.히...꼬오꼭 씹으면서 읽으려고 무진장 애썼다. 더구나 지금까지 터키문학, 터키작가는 접하지 못했기에 바짝 신경을 곧추세웠다.


풍자문학의 거장이자 터키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작가 아지즈 네신은 이 책에서 사랑의 여러 감정이나 모순들을 얘기하기 위해 동물과 식물, 혹은 인형과 대리석 조각상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랑이란 언제나 벌꿀처럼 달콤하지 않으며 5월의 햇살처럼 따스하지 않을뿐 아니라 때로는 집착하고 이용하고 배신한다고 말한다. 마치 빨강과 초록이 보색관계라서 함께 있으면 서로를 더 돋보이게 해주듯 사랑 역시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모두 인정할 때 사랑은 빛난다고...


이 책에 선보인 여섯 가지의 사랑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처음의 <빛나는 것, 그것은>과 마지막의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이었다.


<빛나는 것, 그것은>에서는 독수리와 물고기 익투스의 사랑이 그려지고 있는데 살아가는 환경이 하늘과 바다로 완전히 다른 그들이 서로를 동경하다 못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또 익투스와의 소중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독수리의 모습은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이야기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마치 현대판 <인어공주>라고 할까....


모든 여자는 자신의 바다, 그리고 모든 남자는 자신의 하늘을 품고 있어. 아니면 반대로 모든 여자는 자신의 산을, 모든 남자는 자신의 바다를 품고 있지. 그들은 상대방의 낯선 매력에 빠져들곤 하지.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에서 서로 맞닿을 수 있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없지.  - p36.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은>에서는 튤슈란 여인인을 찾아 온세계를 떠도는 한 노인이 등장하는데 문제는 그 튤슈란 여인이 누구인가...하는 것이다.


제가 모르는 곳의 모르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제가 모르는 여자가 튤슈입니다. 저는 그녀를 찾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 믿음 하나로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죠. -p179~180


튤슈란 여인을 찾아다니는 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어서 틈만 나면 아무 주소로 “너를 사랑해 튤슈”라고 전보를 치고 매일 광장에 나가 사람들에게 튤슈를 사랑한다고 목청껏 외치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사랑이란 이렇다...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단정짓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마다 존재하는 이유는 다릅니다. 그리고 저의 존재 이유는 튤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튤슈를 사랑하면서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 p187


이 책을 읽다보면 꼭 한여름밤의 꿈 속을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삽화는 또 얼마나 이쁜지...그야말로 환상적이다. 8살난 아들이 자기 책이라고 착각할만큼.


너무나 이쁜 이 책에도 옥의 티는 있었다. 오자와 탈자가 눈에 띄었다.

p19. 제왕 독수 --> 제왕 독수

p22. 마침내 다다가 물었다 --> 다가가 물었다.


문맥도 매끄럽지 못했다.

p26. 아주 낮게 춤을 추며 날며 --> 아주 낮게 춤을 추듯 날며..

 



내게 이 책 <튤슈..>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되돌아보게 했다. 각자의 삶에 따라 사랑의 빛깔도 달라진다는 것...그러니까 결혼한 중년의 내게 있어 사랑은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나머지 때로 무심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거 왠지 너무 서글픈데...ㅠㅠ


사랑이란 매 순간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완전하게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멀리 달아나버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입니다.  - p143.


유일한 마술, 유일한 힘, 유일한 구원, 유일한 행복.

사람들은 이것을 소위 사랑이라고 부른다.    - 헤르만 헤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5-10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경구가 인상적입니다. 삽화는 여인네로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툴슈는 삶의 열정이나 꿈 같은 추상적인 이름이겠지요. 아니면 신이라 할 수도
있구요. 님, 맛깔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시간 상자 베틀북 그림책 86
데이비드 위스너 지음 / 베틀북 / 2007년 4월
구판절판


역시 데이비드 위즈너다. 지금까지 그의 그림책을 여섯권 봤는데 여섯권 모두 대만족이다.

척 보기에도 빨간색 표지가 무척 강렬하다. 앞표지의 정중앙에 자리한 검은색 원, 저게 대체 뭐지?...하는 생각에 표지를 쫙 펼치니 그제야 정체가 드러난다. 다름아닌 물고기의 눈이다. 그리고 그 물고기 눈동자에 비친 어떤 물체....저건 또 뭘까?

이렇게 표지에서부터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휘어잡은 <시간상자>. 그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 책의 주인공인 소년이 물건 채집과 관찰에 취미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 이 속표지가 암시하고 있다.




부모님과 바닷가에 놀러온 소년은 소라게와 게를 관찰하던 중 파도로 인해 백사장에 밀려온 수중카메라를 발견한다.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수중카메라, 필름까지 들어있다. 어떤 사진이 찍힌 필름일까...궁금한 마음에 현상소에서 사진을 찾는다. 그런데!!

아니, 이럴수가!! 바닷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 무리 중에 괴상한 녀석이 하나 있다. 로봇 물 고기인가?

더 황당한 것은 소파에 앉아있는 문어들!! 포장이사 콘테이너 속에 들어있던 소파며 전등, 탁자, 어항을 가져와서 멋들어진 거실을 꾸몄다. 게다가 큰 문어 한 마리가 책을 들고 있는데 그 앞엔 아기문어들이 모여 있다. 혹시 책을 읽어주는 스토리 타임?

거북의 등엔 소라껍질로 이뤄진 작은 마을이 있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에 초록색 생명체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는 게 아닌가.





또 비행접시를 타고 단체여행을 온 외계인들의 여러 모습들. 물고기를 막대기로 찌르는 외계인 장난꾸러기와 아차 하는 순간에 카메라를 떨어뜨린 외계인까지 하는 행동은 지구인과 똑같다.


그리고 불가사리섬! 옆에 있는 불가사리섬과 서로 손짓하면서 어딘가로 가는데 혹시나 지나가는 고래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하지만 소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바로 단 한 장의 사진!



마치 거울을 들고 거울을 쳐다보는 것처럼 사진 속에 아이가 있고, 그 속에 또 다른 아이...소년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현미경을 가져오고 10배, 25배, 40배, 55배, 70배 확대하고 그 카메라로 제일 처음 사진을 찍은 소년을 보게 된다.

사진 한 장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들여다본 소년은 자신의 모습을 찍고 카메라를 바다로 던진다.




바다에 던져진 카메라는 오징어와 커다란 물고기, 해마에 의해 운반되다가 바다밑으로 가라앉는데 거기에 펼쳐진 건 다름아닌 인어마을이다. 기둥처럼 늘어서 있는 말미잘 사이엔 가로등이 있고 아파트처럼 보이는 산호초엔 불이 켜져 있는 등 도시의 밤풍경과 똑같다.

그리고 다시 바다로 떠오른 카메라는 돌고래와 파도에 실려 남극을 지나 어느 해안가에 이른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시점의 변화에 따른 시간의 변화다. 처음 소년의 눈으로 본 현재의 시간에서 카메라의 시선으로 본 사진 속에 펼쳐진 과거의 모습, 다시 바다로 돌아간 카메라를 바다 속 생물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재진행이자 미래의 모습...은 단순히 놀라운 수준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특히 이 책 <시간 상자>는 올해 칼데콧 상을 받았는데 책 속에 펼쳐진 상상력은 그림책을 보는 나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곳곳에 숨겨진 여러 장치로 인해 글 없는 그림책임에도 전혀 밋밋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이 없는 점을 100% 살려서 그림책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그림책의 그림은 단순한 삽화나 일러스트가 아니라 글로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마디로 그림책이 작은 미술관인 셈이다. 프랑스 그림책 편집자인 크리스티앙 브뤼엘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를 포함한 이미지들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그림과 그림 사이를 읽는다는 것이다. "

출간하는 책마다 자신의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데이비드 위즈너! 이쯤되면 도대체 그의 머릿속은 어떤 구조로 생겼는지 궁금해진다. 또 다음에 그가 어떤 세계를 우리 앞에 내놓을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