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책이 새 옷을 입고 있는데, 나는 구판이 더 좋다. 


1. 인재시교(https://blog.aladin.co.kr/hahayo/9371196)














단 한 권의 육아서를 읽는다면 인재시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권으로 묶였던 책이 인성편과 공부편으로 나뉘어서 '좋은 엄마가 좋은 선생님을 이긴다'는 제목의 두 권만 살 수 있는 상태다. 

자질에 맞추어 가르침을 베푼다,라는 제목의 육아서는 직접적인 제목으로 분책되었다.

같은 내용인 데도 아이를 키우는 철학서 같던 책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실용서처럼 보인다. 실용서는 권하기에 너무 노골적이라 일부러 구판을 찾는다. 


2. 상상의 초가교실














상상의 초가교실, 이 힘센 상상1,2 로 나뉘어져서 새로 나왔다. 

상상의 초가교실, 은 각각의 완결된 이야기들이 있고,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상상은 조연일 때도 주연일 때도 있다. 각각의 이야기가 가지는 관계는 상상의 초가교실,이라는 제목이 힘센 상상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힘센 상상1,2보다는 상상의 초가교실,이 더 좋은데 다 절판이고 재출간 계획조차 없다니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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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비슷한 것으로 우언(寓言)이라는 것이 있는데, '천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나온 "장자(壯子)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해의 천제(天帝)를 숙(儵 *)이라 하고, 북해의 천제는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천제는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홀은 자주 혼돈에게 놀러갔는데, 혼돈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고도 치밀하였다. 어느 날 숙과 홀이 어떻게 하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하기를, '사람은 모두 다 눈,코,귀,입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음식을 먹고 하는데, 혼돈에게는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뭔가 부족함이 있지. 우리가 가서 그를 위해 구멍을 몇 개 뚫어주는 게 어떨까'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둘은 도끼와 끌 등을 가지고 가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게 되었는데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이레 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다 뚫게 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혼돈은 그의 친구들이 구멍을 뚫어주자 도리어 가엾게도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 p20, 중국신화전설 1, 위앤커, 전인초/김선자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16)


寓言 살우, 말씀언 


*儵 빠를 숙

    잿빛(靑黑繪), 남해임금(南海帝), 독화당하다(禍毒), 갑자기(忽), 빠르다(速)

    攸(바 유) + 黑(검을 흑)    

** 忽 소홀히 할 홀

      잊다, 홀연, 돌연, 문득, 다하다, 멸하다, 올(누에 입에서 나오는 실)

      勿(말 물) + 心(마음 심)

*** 混沌 섞일 혼, 어두울 돈

      混 [혼]섞이다(雜), 흐리다(濁), 합하다(合), 덩어리지다(氣末分)

         [곤]오랑캐이름(西戎名)

          水(물 수) + 昆(맏 곤, 형 곤)

      沌 [돈]어둡다(不明貇), 기운 덩어리(元氣未分), 혼돈(混沌), 엉기다(不開通貌), 물기운(水勢形容), 돌다(轉轉), 막히다(不通塞)

          水(물 수) + 屯(진칠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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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랩 걸

https://blog.aladin.co.kr/hahayo/13372988

여기서 저자는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럼 도대체 엄마란 뭘까? 엄마가 뭐길래, 아빠가 되겠다고 하는 걸까?

남자여서 아빠고, 여자여서 엄마인 게 아니라면, 과연 엄마는 뭘까?











2.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3054698

완벽한 엄마는 아이에게 성장할 공간을 주지 못한다. 

엄마는 필요에 반응하되, 어리석음을 연기?하여 아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아빠는 추상 세계-사회-에 존재하지만, 엄마는 아이와 함께-가정- 존재하는 어른이기 때문에 너무 완전한 어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완벽한 어른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 사는 아이는 어른이 되는 걸 두려워하고, 어른이 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평화로운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점점 자라지 못하는 어른이 가득 차는 것은, 길어진 수명과, 직접 살아내기보다 이야기를 구경하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책 속에는 역시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아이들을 비웃고 대신 해 주는 아빠도 등장하기는 한다. 부모란 역설인가 싶기도 하네.  



3. 젠더

https://blog.aladin.co.kr/hahayo/13206446

명백하게 아이의 잘못이라고 해도, 엄마는 아이를 감싸고 아빠는 아이를 야단친다,고 가족을 묘사한다. 

엄마인 나는 남편이 아이를 혼낼 때마다, 아이의 대변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엄마인 나는 내가 아이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자만한다. 

엄마와 아이의 연결은 아빠와 아이의 연결보다 동물적이고 직접적이고, 감정적이다. 








4. 파친코

https://blog.aladin.co.kr/hahayo/13512685


선자는 노아를 결국 이해하지 못한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주고, 먹이고 입히면서 물적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추상의 영역에서 엄마는 무력하다. 









5.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https://blog.aladin.co.kr/hahayo/10227225

엄마와 아빠,는 상징하자면, 

속과 성일까. 

자연과 문명일까. 

땅과 하늘일까. 

감성과 이성일까. 








읽지 않은 책 중에 '엄마됨을 후회함'이라는 책이 있고 이 책을 읽고 마립간님이 남긴 서평(https://blog.aladin.co.kr/maripkahn/8861264)에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성범죄수사대SVU 에피소드와 아동학대 뉴스를 보면서 '여자이기만 한 여자들'(https://blog.aladin.co.kr/hahayo/12329640)이라는 글을 썼었다. 


역할로서의 '엄마'가 없다면 아이는 살아남기 어렵다. 엄마는 먹이고, 입히고, 보호한다. 아이가 절대적으로 약한 순간부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고 돌본다. 보호하고 돌보지만, 그 역할은 한정적이고, 완벽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에 나아갈 여지를 만든다. 지금 생존의 많은 부분이 돈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라는 역할에는 이제 경제활동도 포함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기 전에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아이를 낳기 전에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도 썼었다.

엄마라는 역할은 추상성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추상성은 아빠다. 성공, 명예, 이상, 이 모든 추상성은 아빠,라는 추상적인 존재에게 의존한다. 랩걸의 저자가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아빠만을 선명하게 그렸던 것에 삐딱해지던 심사는 '엄마말고 아빠가 되겠다'는 저자의 결심에 폭발해서 생각은 이어진다. 그 결심은 삶을 구성하는 어떤 부분들을 무시하는 말처럼 보였다. 


이렇게 쓰면서도, 이게 전부 딸인 나의 생각이라는 자각이 닥쳤다. 

보통은 여자에게 배정된 엄마의 수고를 알면서도 자신은 하려하지 않고 심지어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추상성이 비대해진 문명세계의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남성인 아들은 어떤 입장일까 궁금해진다. 엄마에게 보호받으면서 아빠가 되어야 하는 아들에게 엄마와 아빠는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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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윌스미스가 아카데미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을 때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둘 다 나쁘지만 윌 스미스가 아예 매장되는 것은 과하지 않나,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으려나. 아이는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에서 보고 어느 정도 서구의 반응이 수긍이 되더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http://https:www.youtube.com/watch?v=_atVK7RjUmA)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서구권,은 윌스미스가 크게 잘못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가족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 많다. 그렇지만, 그건 맥락을 오해하고 있는 거다. 윌 스미스 가족의 지금까지의 어떤 태도가 그런 농담을 가능하게 했고, 윌 스미스는 그 전까지 웃다가 부인을 보고 나가서 때린 거라면서, 제목조차 '여자에게 휘둘려 모든 것을 잃고 있는 남자'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조종해, 감정적으로든 뭐로든, 조종해서 자신의 뜻 대로 움직이게 만들었어. 그러면 누가 더 나쁜 사람이야? 조종한 사람, 조종당해서 나쁜 짓을 한 사람."

"둘 다 나쁘지. 연예계에서 벌어진 일도 그랬잖아?"

"그래, 둘 다 나쁘지. 둘 다 나쁜데, 우리 나라는 조종한 사람을 더 나쁘다고 말하는 문화인 거고, 나는 그게 더 좋은 문화라고 생각해. 윌 스미스 부인이 윌 스미스를 조종해서 자신의 혼외정사를 수용하게 했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혼돈의 정체성을 넘기고, 윌 스미스를 불안하게 만든 것도 나쁘고, 크리스 록이 말로 그런 윌 스미스를 자극하는 것도 나쁘다고." 

물어본 것에 대해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뭔가 부족해서 쓰고 싶다.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는 계속 남자는 질서, 여자는 혼돈,이고 질서가 혼돈을 정리하지 못해서 아이들이 폴리 아모리에 플루이드 젠더, 따위의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이 가족의 문제가 윌 스미스가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질서를 잡지도 못 했으면서, 그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가부장 노릇을 하겠다고 폭력으로 행사했다고 문제삼는다.


내가, 폭력은 절대 안 되,를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로 자극하는 것에도 당연 책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역시 윌 스미스의 업계퇴출이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유읽남,조차 그 동영상 제목을 그렇게 뽑은 걸 보면, 그 부인을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 갈다. 나도 윌 스미스가 좋은 여자를 만나지 못한 것 같다. 


폭력은 절대 안 된다,라는 말은 '폭력이 무엇인가'를 정의해야 한다. 언어폭력도 폭력이고, 방임도 폭력이고, 시선도 폭력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폭행,만 폭력인 양 저런 말을 붙인다는 데 의아하다. 브런치에서 '모욕에 맞서는 방법'(https://brunch.co.kr/@youngmusic/139) 이라는 글을 보고 공감하고는, 저자의 책에 나는 공감할까 의심했다. 한국이 폭력이 허용되는 나라라서 윌스미스 옹호론이 크다는 글(https://brunch.co.kr/@brunchog1f/17)도 보이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은유로서 말하자면, 남성의 방식이 물리적인 충돌과 폭력이라면, 여성의 방식은 대화와 교묘한 괴롭힘이나 조종이다. 남성의 폭력이 제도적으로 여러가지 해결책들을 만들어왔다면, 여성의 폭력은 문화를 통해 제어되어 왔다. 문제를 해결하는 긍정정인 방식은 대화가 맞지만, 말 그 자체가 무해한 것은 아니다. 말로도 사람을 찌르고 죽일 수 있다. 말이라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점점 말들도 법적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성적인 문화에서는 교묘한 괴롭힘을 비열하다고 보지만, 여성적인 문화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미개하다고 본다. 그래서 물리적 폭력은 여성적인 문화에서 더 적고, 여성적인 문화권에서는 교묘한 괴롭힘이나 말을 이용한 조종에도 물리적 폭력만큼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라는 오래된 경구처럼,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여성적인 문화는 생각하는 거다. 강한 힘을 우위에 두는 남성적인 문화는 부드러운 통제나 조종조차 제압하지 못하는 남성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서구권에서 윌 스미스가 심하게 비난받는 이유는 서구의 문화가 남성적이기 때문이고-부인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나 가부장이 되지 못한 것조차 윌 스미스의 잘못이다!-, 한국에서 윌 스미스가 옹호되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여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https://blog.aladin.co.kr/hahayo/13486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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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대목이 있었다. 

책의 저자는 근근히 공부를 이어가는 대학원생일 때, 명절을 맞아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선배와 선생님께 드리는 이야기를 한다. 선물을 드리는데, 선배가 '뭐하러 하느냐, 안 해도 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런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가'싶어 상처받았다고 쓴다. 

그럴 수는 있지만, 나는 나도 그렇게 말할 사람이라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모든 선물이 그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후배들이, 해외여행에서 돌아와서 여행지의 과자 따위를 돌릴 때, 나도 그렇게 말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걸 받을 자격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나의 자격은 주는 사람이 정하는 거고,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기는 하지만, 또 선물은 그렇게 선,하지만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학생일 때 군대도 안 간 젊은 영어선생님이 친구가 그 선생님께 준 음료수를 면전에서 다른 사람에게 건넬 때 '준 사람 성의는 생각도 안 하세요?'라고 따진 적도 있는데, 지금은 선물이 선물이려면, 준 순간 그 사람의 처분에 맡겨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선물과 함께 건네지는 나의 마음은, 받는 사람의 마음에 빚이 된다. 

다른 의견 속에 궁금해서 적어놓은 책 '세계에서 제일 이상한 사람은 누구인가(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3478318&start=slayer)도 문화에 따라 선물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튜브에서 은괴와 초콜릿 중에 고르라는 인터뷰 내용을 보고 초콜릿을 고른 사람이 교육수준이 낮아 은이 비싼 줄 몰라서라는 해석을 보고도(https://www.youtube.com/watch?v=ga-oNV-OVxc&t=533s) 나는 역시 의심하는 거다. 누구나 더 가치있는 걸 원할 거라는 WEIRD한 서구인의 시각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선물하는 사람은 뇌물이 아니더라도 댓가를 바란다. 노골적이고 경제적인 무언가는 아니더라도, 최애가 내 선물을 들고 사진이라도 SNS에 올려주기를 바라는 거 같은 것. 그게 어렵나,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참. 

지금의 나는 선물이 선물이려면, 건네 준 순간 모든 처분은 상대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 

그리고 선물은 어쩌면 우월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속의 저자가 가지는 슬픈 마음-나는 이런 작은 선물조차 할 수 없는가-은, 선물을 하면서 느끼려는 어떤 뿌듯한 마음이 좌절되서라고 생각하는 거다. 늘 무언가를 받던 작은 존재였다가, 이제 줄 수도 있는 존재가 되면 스스로 기분이 좋은 걸 안다. 

선물은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다. 상대가 감사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정말 끔찍한 -바느질도 못하는 주제에 옷을 만들어 선물하려고 한 적이 있고, 1년 중 처음 생일을 맞은 언니가 언제나 그 끔찍한 선물을 수령했다- 선물을 제 기분에 신이 나서 여기 저기 뿌린 적도 있고. 남편이랑 아이들 게임 다운받아 주는 걸로 싸운 적도 있고, 어린 친구에게 '책은 싫어요'라는 귓속말을 들은 적도 있다. 내가 하는 선물에도 의도가 있고, 나는 그 의도를 자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의 취향을 권하는 마음, 너보다 나의 취향이 나을 거라는 자부심, 같은 게 선물을 고를 때 있다는 거다. 어렵고 귀한 분께 몇 날 며칠 선물을 고르지 못하는 마음과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쉽게 골라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나의 우월감의 표현이고 나의 취향의 어쩌면 강권이고, 그래서 나는 쉽게 선물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를 골라 선물하고 싶던 마음이, 그래 역시 돈을 주고 직접 고르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로 바뀌었다. 내가 엄마에게 주고, 엄마가 다시 아이에게 주는 용돈의 트라이앵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받고 싶은 마음보다 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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