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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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ze.co.kr/articleView.html?no=2018071623137291971

이 글을 읽는데, 팡쓰치 생각이 났다. 

날아오르는 여성 뮤지션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엄마라는 현실,에 대한 묘사가 팡쓰치를 떠오르게 했다. 이성과 감성, 영혼과 육체, 이상과 현실, 문명과 야만, 성과 속,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이 모든 대립항 속에 은유가 있다. 지금의 나는, 이 대립항 사이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존한 다음에야 누릴 수 있는 문명이고, 이상이고, 영혼이고 이성이라는 면에서 오히려 땅이, 속이, 야만이, 현실이, 육체가 감성이 중하다고도 생각한다. 

살아 남는 게 가장 중하고, 뭐든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이미 살아 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이상과, 가치, 사랑에 대한 말들이 있고, 가끔은 그 말들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가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왜 그 때 살아돌아와서 고맙다, 고 한 마디를 안 해줬냐'고 원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아이 캔 스피크,에서 그런 장면이 있다-


사랑,처럼 허명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있을까.

첫 눈에 사로잡히는 사랑,이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게 하는 무자비한 감정으로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말들로 차고 넘치는가. 그런 사랑이 어딘가에 있으니, 이렇게 이야기되겠지만, 또 그런 사랑이 그렇게 특별히 살아남은 이유는 그렇게 특별하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가 특별하길 원한다는 건,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 되길 원한다는 건 행복이나 건강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읽지도 않고 인용으로 아는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처럼 말이다. 


살아남는다는 건, 허명에 휘둘리지 않아야 겨우 가능하다. 

이미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거라고 전시되는 삶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그 속에서 자기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자신을 들여다보아야, 설명할 수 없는 몸의 감각을 무시하지 말아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 


팡쓰치를 억압하던 언어의 감옥을, 문학의 허명을 생각했다. 

자신의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리궈화의 태도나, 부모까지 비난하는 가운데에서 강경하게 살아남는 궈샤오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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