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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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신작 <黑山>의 후기 중 일부분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니. 이 대목을 중얼거리며 소설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이내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는 말에 가로막혀 한 발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말의 낭떠러지 앞에서 상념들이 거침없이 풀렸다.
남풍이 부는 초겨울의 해안가를 벗어나 흑산으로 들어가는 약전에게 뭐 그리 큰 희망이 남아 있었을까, 상복을 입고 배론으로 떠나는 안개 자욱한 새벽 황사영에게 기약할 날들이 있었을까, 제 목숨 하나를 위해 염탐하고 밀고하는 박차돌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준비되어 있었을까, 군소리없이 약전을 받아들이는 순매의 몸에는 또 어떤 열락이 허락되었을까, 그럼에도 고등어나 날치나 게처럼 누구도 단념할 수 없는 삶이라니. 기막히고 뒤숭숭한 마음은 절로 터져 누군가에게 따진다. 신기하게도 돌아오는 응답은 황사영이 무릎 꿇고 바치는 기도문이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 기도문 안에는 낡고 무력하고 위압적인 세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리고 기도문 밖에는 매 맞지 않고 굶지 않고 사람이 가축처럼 팔리지 않는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또한 새로운 세상은 노래같은 기도문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에 이미 세워졌다. 꼭 올 것만 같은 세상이고 반드시 와야만 하는 세상이 매 맞고 굶어 죽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이었다. 방울 세 개를 단 기발로는 어쩔 수 없는 마음들이 이미 차고 넘쳤음을,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기에 두려운 세상이고 갈급한 기도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돌아온 저 기도문이 나는 더 싫었다. 차라리
어서 맞아 죽게 하소서. 
어서 굶어 죽게 하소서.
당신 보기에 이런 우리가 불쌍하거들랑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엎어서라도 우리를 구하소서.
그럼에도 주여 당신이 새로운 세상을 내어 줄 수 없거들랑 
삶을 단념하는 우리를 기꺼이 품에 안으소서.
이렇게 고쳐서 기도하고 싶었다. 
기도가 될 수 없는 말이고 말도 안되는 말이다.  
       
책을 덮고 속표지에 그려진 '가고가리'라는 괴수의 그림을 보았다.
김훈이 시조새의 화석 사진을 보면서 그렸다는 괴수 '가고가리'는 어딘지 엉성하고 조악했다. 괴수는 태초로부터 하늘과 바다와 땅에 함께 있어야 할 풍경 같았지만 그럼에도 열외 존재처럼 느껴졌다. 모든 불행의 근원이 그림 한 장 안에 다 들어있는 듯 했다.
저리 생긴 것이 가고 또 가는구나.
가고 또 간다,라는 말이 그제야 눈물겨웠다.
처음부터 이 소설은 가고 또 가야만 하는 것들의 이야기였구나. 그러니 처음부터 함부로 가늠하고 휘저을 수 없는 이야기였구나. 뭐든 끝까지 가보지 못한 내가 끝도 없이 가는 것들의 속내를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문학이라도 불온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무참했다. 끝까지 버텨보지 못한 나는 말도 마음도 아꼈어야 했는데 후회는 늘 이렇게 아무런 힘이 없다. 

눈 앞에 흑산이 보이고 해안에서 무심히 생선의 아가미를 들여다보았을 약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심 나도 그렇게 가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어설프게 떠들지 않고 어줍잖게 휘젓지 않으며 그렇게 가고 또 가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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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1-12-0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사실 별 생각안하고 들었다가, 많이 멍했었어요.

굿바이 2011-12-08 12:02   좋아요 0 | URL
그대처럼 나도 짧게 남길 걸....

나는 배론성지도 갔었고, 절두산도 갔고, 흑산도 갔는데... 그래서 더 멍했었어. 진짜 멍-------

風流男兒 2011-12-09 09:26   좋아요 0 | URL
길게 쓸 능력이 안되서 짧게 남기고 있어요 요즘은 :)
쓰다가 어느 순간 보면 너무 어설프고 부끄러워요 ㅎㅎㅎ

웽스북스 2011-12-09 12:13   좋아요 0 | URL
저도요. ㅜㅜ 길게 쓰는 것이 뭐든 어려운 것 같아요.
굿바이님의 글을 읽는 걸로 늘 아쉬운 마음을 달랜달까요.

그러니까 글좀 많이 많이 써주십셔~ 굽신굽신

흰 그늘 2011-12-0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굿바이님.. 그동안 홉스골 호숫가로 가신줄 알았드랬어요^^
흑산에도 가셨던 거여요..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어설프게 떠들지 않고 어줍잖게 휘젓지 않으며
그렇게 가고 또 가면 좋겠다 싶다.' 정말이지 마음에 담을수 있엇으면 하는 말이네요..

굿바이 2011-12-08 12: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흰그늘님 잘 지내고 계시죠?
참으로 반가워요~:)

그나저나 홉스골 호숫가에 정말 가고 싶은 날들입니다~!

비로그인 2011-12-07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남한산성]에 여러 번 등장하는 말이 떠오르네요.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김훈은 늘 그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걸까요? ( '')~

굿바이 2011-12-08 12:06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런 마음으로 쓰지 않을까 싶네요 ;)

저는 작가의 <현의 노래>와 <내가 읽은 책과 세상>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이후의 작품은 어떤 건 기대가 컸던 것도 있고...여튼 한 편이라도 더 남겨주시면 좋겠다 싶어요 :)

2011-12-08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12-1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휘젓고 다니는 요상한 한 뇨자가 있는가 봅니다..
(어흥, 그러면 쓰나?...)

흑산에 계속 눈길이 가긴 가는데.. 언제 읽지 싶네요...
줄세워둔 책들에 밀려 한 일년쯤 뒤? ㅎㅎ엄살이고요 굿바이님 리뷰 읽고 나니까
급속도로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굿바이 2011-12-14 12:38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도 알고 계셨군요?^^

저도 책상에 쌓인 책이...아무래도 몽땅 팔아야겠습니다 ㅋㅋㅋ
김훈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찌찔한 삶을 위로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고, 그래서 또 답답하고!

블리 2011-12-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리포트 마감이라 [흑산]으로 7장짜리 글을 썼는데 여기서 또 언니의 흑산을 만나니 반갑고 아프고;; 이런 책을 독서 과정 분석 과제로 내주신 교수님께 고맙기도 하고 -리포트 아니었음 읽지 않았을테니- 따지고 싶기도 하고 -아니, 분석을 하기엔 너무 절절한 얘기들이 잖아요;- 뭐 그런 맘으로 썼어요. 전 박차돌과 한녀의 얘기 이후로 계속 속이 울렁, 왈칵~ ㅠㅠ 교수님 덕에 분석하다 보니 평정심으로 돌아왔지만. 마침 이번 주 `낭독의 발견` 녹화가 김훈 편이란 걸 알게 돼서 방청신청 했는데 되려나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제 방학입니다. 너무~ 좋아요! ^^

굿바이 2011-12-20 08:44   좋아요 0 | URL
오호~ 블리의 리포트 굉장히 궁금하다.

그나저나 이제 방학이구나. 얼굴 한 번 보자 :)

Seong 2011-12-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고 양화진성지에 갔었어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토요일 오후였는데, 매일 그곳을 지나다니면서도, 유심히 바라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빗물이 베어든 잠두봉은 흡사 핏물이라도 흘리는 듯...

이곳에서 목이 베이고 허리가 끊긴 사람들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하긴, 그곳은 봄에도 항상 쓸쓸한 풍경이었어요...

굿바이 2011-12-21 17:42   좋아요 0 | URL
무섭고 외로웠다,는 표현이 제일 정확할 것 같아요.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그곳에 가면 매번 몸도 마음도 아팠던 것 같아요.
상상을 하면 저는 정말 참아낼 수 없는 공포와 고통이었을 것 같아서...

봄에도 쓸쓸하던가요?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