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게 외로운 오후다. 한강이 꽁꽁 얼었던 날도, 보름달이 덤벼들던 밤도, 무사히 살아냈는데 이건 또 뭔지. 겨울이 작정하고 버틴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바람은 아파트 담벼락에 부딪혀 더 거세게 윙윙거릴뿐인데 어쩐지 내 귀에는 '가기 싫다, 가기 싫다, 네 곁에서 너를 더 움츠리게 하고 싶었다, 벌벌 떨게 하고 싶었다'로 들린다. 택배를 받기 위해 열었던 현관문 틈으로 쏟아진 바람 한 줄기가 발목을 노린다. 귀도 멍멍한데 발목도 아프다. 이명인지 환청인지 그저 환상통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들뜬 혈통

 

허연

 

하늘에서 내리는 뭔가를 바라본다는 건

아주 먼 나라를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들뜬 혈통을 가진 자들은

노래 없이도 노래로 가득하고

울음 없이도 울음으로 가득하다

 

짧지 않은 폭설의 밤

제발 나를 용서하기를

 

심장에 천천히 쌓이는 눈에게

파문처럼 쌓이는 눈에게

피신처에까지 쏟아지는 눈에게

부디 나를 용서하기를

 

아주 작은 아기 무덤에 쌓인 눈에게

지친 직박구리의 잔등에 쌓인 눈에게

나를 벌하지 말기를

 

폭설에 들뜬 혈통은

밤에 잠들지 못하는 혈통이어서

 

오늘 밤 밤새 눈은 내리고

자든지 죽든지

용서는 가깝지 않았다

 

더는 나쁜 인간으로 살지 않겠노라고 아무리 손을 털어도 뱉어 놓은 말들과 함부러 저질러 놓은 일들이 한꺼번에 날선 바람이 되어 달려드는 날이 있다. '뻔뻔하다고, 이제와서 이러면 웃긴다고, 네게 줄 구원이 있다면 북극곰 한 마리를 살리는 것이 훨씬 가치있는 일이라고'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쩌면 매일이 그런 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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