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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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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낯설지만, 헌법이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정치적 분쟁이 헌법재판소를 통해 가르마 타지는 시절을 살면서 몇 번이고 "헌법이란 국가적 공동체의 존재 형태와 기본적 가치 질서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법규적인 논리 체계로 정립한 국가의 기본법"이라는 개념을 되뇌어 봤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그 때마다 [국민적 합의]라는 대목에서 여러차례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있고, 답답했던 적이 있었지만, 무지를 벗삼아 살아온 세월이 오래된지라, 그렇게 찾지 못한 답들을 한 켠으로 미루어 두었던 적도 많았다. 여하튼, 헌법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시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딱히 난독증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고, [권력의 정당성]이라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던 시점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헌법을 대하며 느꼈던 답답함은 헌법 텍스트의 문제라기보다, 헌법을 해석하고 사용하는 권력 그리고 그것에 강제당하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표상 정치]의 한계와 [표상 정치]를 극복하려는 기획들을 설명하고, 헌법의 본질과 헌법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 책은 매우 흥미롭고 유용한 책이었다.  

이 책은 1.헌법이란 무엇인가, 2.헌법적 사고의 원형(고전적 헌정주의의 두 예), 3.헌정주의의 근대적 혁신, 4.헌법정치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이라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칫 현학적으로 빠질 수 있는 내용들이었음에도, 이해하기 쉬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고, 헌법이라는, 상념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거리감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한 친절한 텍스트는 많은 부분에서 독자를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식인이나 권력자들만이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애매하고 난해하게 쓰여진게 아닌가 싶은, 그런 의혹을 받아도 무방해 보이는 것들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지, 그것 자체가 바로 표상 정치의 왜곡을 피하려는 필자의 노력이 아닌가 싶었다. 또한, 각 장이 마무리 되는 지점에 -깊이 읽기, 라는 짧지만 거침없고 많은 부분 적확한 분석은 헌법과 표상 정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4장에서 다뤄진 헌법 정치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 편은, 헌정주의의 대응 방향 그리고 표상 정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매우 유익한 읽을거리였다. 물론 필자가 제시한 표상 정치의 새로운 모델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기본 규범 위에 국제 사회가 존재하고, 집행력 있는 중간 규범 위에 주권 국가가 존재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좀 더 강한 규범 위에 지역 공동체가 존재하는 모습이다" 라는 대목에서 잠시 힘이 빠지면서 공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헌법에 입각해, 각각의 단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며 자유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할 때 이만한 대안도 없을 듯 싶다. 전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유난히 [대안]을 강조하는 센스(?)를 종종 발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관계와 무관하게, 언제부터인지 타인의 발언이 갖는 진정성보다 대안에 더 열을 올리고, 더 나아가 흠집을 내려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가릴 것이 있으면 뭐든 가리고 싶을 만큼 창피해진다. 여튼, 맺는 말에 적시된, 헌정주의의 실천을 위하여 주의할 점,이라는 글 역시 이 책을 유용하게 읽히게 하는 텍스트임에 부족함이 없었다. 헌정주의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표상 정치의 한계와 극복이라는 주제를 잘 풀어낸 책이어서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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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자유를위한정치>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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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규모와 무관하게, 한 집단안에서 리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코흘리개 시절의 경험이 증명하듯 그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도 힘들었었다. 하물며 결과에 따라 손익이 극명하게 갈리는 집단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우두머리는 필연적으로 비극적 상황을 즐기거나(?)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여튼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역사를 훑던 주위를 둘러보건 답은 명확하다. [사랑]받거나, [공포]를 유발하거나, [사랑]도 받고 [공포]도 행사할 수 있거나. 물론 여기서 [공포]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카리스마 정도로 하자. 현직 대통령을 그리고 고인이 되었거나 생존하지만 생계가 어려워지신 분들을 위 조건에 대입해보면 [사랑]과 [공포]를 동시에 거머쥔 분은 안타깝게도 없는 듯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2009년을 떠올리면 개인적으로도 환난의 한 해였지만,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손으로 뽑고, 온전한 마음으로 지지를 보냈던 16대 대통령을 잃었고, 현직 대통령과 냉전적 보수세력의 부패와 오만을 목도해야 했고, 진보라 불려지는 세력들의 전략없는 정략에 기겁을 했고, 신자유주의에 눈 먼 우리들을 지켜봐야 했다. 참담함에 어이를 상실한 한 해였다. 주위에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전직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해서 죄송하다고 했던 것 같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를 이렇게 치르는구나,싶다고. 치러야 할 대가가 내게도 남아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손호철교수의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를 읽는 동안, 불편했던 까닭을 나는 안다. 내 불편함의 절반은 나를 포함한 우리를 향한 것이고, 나머지 반은 저자를 향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해가 져야 비상을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대중의 움직임에 대해 사후적 해석만을 할 뿐, 언제 대중은 분노하고 언제 대중은 침묵하는지, 알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뿐이다"라고.  

문장을 읽히는 대로만 읽고 받아들인다면 저자는 본인의 무력함을 탓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리 읽히지가 않는다. 물론 저자의 고백 속에 담긴 진정성에는 동의한다. 억측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내게 읽히는 저자의 진정성은 이런 것이다. 첫째는 대중을 가늠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대중을 향해 아둔하고 천박하다고 일갈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대중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낀다는 것이리라. 내 추측이 오독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위의 문장을 곱씹어 본다면 부인하고 싶지도 않고,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나 역시 내가 포함된 우리를 향해 얼마나 많은 삿대질과 저주를 퍼부었는가. 그에 비하면 저자의 탄식은 절창에 가깝다. 그렇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때로는 아둔하고 실익에 눈 먼 대중이 항상 소인배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이 정의와 소수를 지켜내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깍아내릴 수 없는 진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직 대통령의 정책을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집단이 어떻게 잘 못 끼워진 단추들을 풀 수 있는지 역사를 근거로 설명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물론 저자를 향해 그리고 명민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띈 학자들을 향해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는 그대들은 이제껏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고 싶은 심정이 들지만 그건 치기임에 분명하다. 이미 답은 있고, 행동해야 하는 시절만 남아 있는데,필요없는 전력 소모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혹여 답답하고 불온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담벼락을 상대로 하면 그만이다.   

3월이다. 그리고 봄이다. 봄이 그러한 것 처럼 나는 현정권의 자살골에도 설렌다. 자살골에라도 기대어 현정권의 무능과 부패와 오만이 평가받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이다. 그리고 한편 걱정이 앞선다. 봄이 그러하듯, 곧 꽃이 필 것만 같은데 꽃샘추위에 여린 꽃망울들이 주춤거리는 것처럼, 전직 대통령이 옥쇄하여 다시 살려낸 정당과 정치인들이 결정골을 날릴 전략도 각오도 배짱도 없어 또다시 우리가 주춤거릴까봐 겁난다. 그렇지만 그래도 봄이다. 봄이기에 봄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언제나 봄이기만한 당신은 정작 봄을 믿는가? 나는 그것이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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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3-03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과 악수를 했지요.

치니 2010-03-0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굿바이 2010-03-03 13:14   좋아요 0 | URL
캬아~몸둘바를!

웽스북스 2010-03-0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댓글은 술김에 쓴 댓글이고

언니 리뷰 다시 읽어보니 그저 슬플 뿐이고
전 저 대중에 대한 부분 때문에 제가 했던 말들이 그저 마구 떠오르면서 속상해지네요.

하연이가 입학했고, 언니는 무려 입학 축하쇼까지했으니,
봄은 봄이죠. 봄이 봄인지는 모르겠지만.

굿바이 2010-03-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쨔쓰까잉!

아렌트가 그랬니? [무사유]가 악이라고. 필연적으로 연대되어 있는 관계들인데, 참....

봄이 봄인지 실은 나도 모르겠지만, 희망을 처방전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내 조카가 입학을 하고, 또 내 조카들이 부딪쳐야하는 구조적 폭력들이 엄연히 보이는데, 이모에게 봄을 묻는 아이들에게, 이미지로서의 봄도 봄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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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에 무슨 일이  

모든 생물은 번식에 대한 강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매우 작은 곤충에서부터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생활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으며, 전투적이고 심지어 치명적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소아성애자(Pedophile)를 연상시키는 바다사자의 교미에서부터 아침드라마의 소재이자 가정 법원의 단골인 불륜남녀까지, 이들의 사생활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동물이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섹스와 파트너 바꾸기 놀이의 기저에는 어떤 저주가 내려진건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왜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섹스에 혹은 그와 연관된 일에 투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려운 심리학보다 좀 더 낯뜨거운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 화려한 수컷과 까다로운 암컷의 비열한 전술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 계모와 언니들에게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이런 예는 신데렐라를 위시하여 각종 공주님들과 미녀들, 그리고 오늘날 김삼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녀들이 만나야만 했던 왕자, 미남 혹은 재벌 2세들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그녀들에게 배달되는데,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쟁취한 그들의 사랑은 무지개를 뚝 떼어 놓은 것처럼 설레고 신묘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거기에 단 한 번의 침실도, 속옷 속의 상황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촉촉한 눈망울, 그리고 그들의 깊고 달콤한 눈빛 뒤에 몇 억 마리의 전투적 정자와 앙큼한 난자 한 마리가 지략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하니, 뭐랄까, '맙소사'랄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생명체라면 여지없이 자신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많이 남겨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의 경우 이를 위해 섹스를 하고, 물론 인간의 경우 유희로서의 섹스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여튼 효과적인 섹스를 위해 전략적 행동이 필요하다. 간이 크다면, 수많은 아이들의 유전적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성들은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적, 즉 다른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정자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이책에서는 '정자전쟁'이라 부른다. '정자전쟁'은 말 그대로 가임기의 여성, 아내 혹은 애인,의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정자가 벌이는 눈물겨운 사투다. 승자인지 패자인지 9개월 뒤에도 확신할 수 없는 엽기적인 전쟁이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한 달에 한 번 밖에 포태할 수 없는 여성의 경우 양보다 질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되도록 좋은 유전자,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있는 유전자를 식별하기 위해 고도의 탐색전을 실행하고, 기회가 포착되면 그것이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이 책의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즉, 짝짓기 시장에 나온 남성과 여성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유전자에 더 좋은 유전자를 결합시킨 근사한 후세를 제작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가족사

끊임없는 외도와 배우자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 결과물로 으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경쟁력있는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겼다. 남은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는 준엄한 명령을 숨겨놓은 채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음모를 알아차릴 수 없다. 이것은 고도의 기술로, 자신도 모르게 몸 속 어딘가에 숨겨진 암호로서, 조건이 주어지면 여타의 환상과 함께 작동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한 당사자도 자신의 행위에서 원인을 찾기 쉽지않다. 찾는다해도 로빈 베이커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내 몸은 더이상 나만의 몸이 아니로세, 이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일 뿐이야.'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언급했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의 탓이니까 어떤 행동도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발언은 오다가다 벼락을 맞을 확률만 높일 뿐이다.

저자는 필요 이상의 정자를 만들어 내는 남자의 몸을, 배란기를 숨기는 여자의 신체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지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려함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음흉한 미소는 당장 거두시라.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까만 조약돌같은 그와 그녀의 눈동자에서 내가 믿고 있는 혹은 믿고 싶은 사랑을 읽고 싶다. 한 발 더 나아가 동요없는 마음을, 그것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족사가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내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날이 온다 해도 결단코 그것을 정자와 난자의 문제로 돌리지 않을것이다. 하여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고 화학적 메세지에 충실했던 그, 혹은 그녀에게 가해질 나의 응징은 참으로 길고 무서우리라.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모든 가족사에 그리고 모든 섹스에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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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팔다 베스트 모음
끼노 지음, 조일아 옮김 / 아트나인(비앤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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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팔다>는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사만화다. 1964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호아낀의 연재만화 <마팔다>의 주인공인 우리의 마팔다양은, 복슬복슬한 새까만 머리 위에 빨간 리본을 얹고 만화보다 더 웃긴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삿대질을 하는, 시쳇말로 '빵꾸똥꾸'정도를 외쳐주시는 당찬 꼬마소녀다.

주인공이 꼬마소녀라는 점은 다른 여타의 시사만화와 비교해 볼 때, 훨씬 호소력있는 장치로 작동한다. 아이의 눈으로도 빤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 꼬마소녀가 지켜봐도 우스꽝스러운 정치꾼들, 마팔다의 눈치를 살살 살펴야 할 정도로 켕기는 구석이 너무 많은 우리들에게 '잘 하는 짓이다’라고 비웃어주시는 마팔다의 한마디는, 한 대 맞고 나면 아파도 너무 아프고 쪽팔려도 너무 쪽팔린 죽비인 셈이다 

 

꼬마 소녀 마팔다는 이 나라를 살릴려면 어디부터 손봐야 하나? 라는 듣기에도 민망한 근심을 하며, 지구본을 향해 대신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조금 더 참고 버티겠다고 약속해줘. 라고 핑클 언니들의 애교 섞인 손가락질을 날리는 오지랖 넓은 박애주의자며, 정치를 가리켜 이 놀이는 팔짱 끼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시니컬한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지간한 어른도 소녀의 따끔한 충고를 모른 척 하기 쉽지 않다.

마팔다의 우울하거나 화가 난 표정을 따라가며, 물론 가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웃어줄 때도 있지만, 1960년대 머나먼 아르헨티나에서 그려진 만화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가슴에 와 닿는 것을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아무 생각없이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들이 사는 곳은 모조리 다 그렇더냐고 북망산에 묻힌 이주일선생의 콧소리를 흉내내며 허탈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굳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지구본을 쳐다보는 우리의 마팔다를 위무하자면, 아직은 삐뚤어진 것들을 바로잡으려 하는 어른들이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니고, 여전히 누군가는 바로잡아야 할 것들을 지적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들에 관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바리케이드 앞을 지키고 있다고 살짝, 그것도 매우 조그맣게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마팔다와 절친한 친구 펠리페의 대화를 적는다. 나를 비롯해 쪽 팔리는 분들은 맘껏 화끈거리시라고 말이다.

펠리페 : 누구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데 누구는 무기 만드는 데 거금을 펑펑 쓰고! 정말 웃기는 세상이야!
마팔다 :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 인생은 각본 없는 한 편의 코미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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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생은 각본없는 한편의 코미디이다'
하하, 굿바이님.
나의 코미디도 조금 화끈거렸습니다.

굿바이 2010-01-19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거의 매일, 불끈거리다 화끈거립니다.ㅋㅋㅋ
 
<피와 천둥의 시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와 천둥의 시대 -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 멸망사
햄프턴 시드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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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매사추세스 플리머스에 청교도라 불리는 일단의 백인들이 상륙한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유로 자신들이 일가를 이루었던 땅에서 내몰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 역사의 시작이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수난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팽창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적 판단의 도덕성을 스스로 검열하기도 전에,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적 판단 앞에 도덕성이라는 것이 개입될 자리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1845년 오설리반이라는 뉴욕의 젊은 편집자는 "뉴욕 모닝 뉴스"에 한 편의 논설을 실었다. 오설리번의 논설은 "매년 증가하는 수백만의 인구가 자유롭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욱 뻗어나가 신이 내려주신 대륙 전체를 차지해야" 한다였고, 이것을 미국의 "자명한 운명Manifast Destiny"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오만불손한 한 편의 논설은 미국이 멕시코령 텍사스를 병합하고, 캘리포니아를 점령하고, 끝없이 서진하는 중에 마주칠 수 밖에 없었던 원주민들을 신의 이름으로 완벽히 살육하는데 핵심적인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이 책 [피와 천둥의 시대]는 이렇듯 19세기, 미국의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며 야심차게 진행한, 미국의 서부 정복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멸족사를, 특히 "나바호"라 불렸던 원주민들과 "크리스토퍼 카슨"의 행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 햄튼 사이즈는 크리스토퍼 카슨이라는, 적어도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인 서부 사나이의 행적과 나바호 원주민들의 멸망사를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꼼꼼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흡족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작가가 객관성을 잃지 않고, 원주민들의 항전과 멸망, 정복자들의 패배와 승리를 보여주려 노력한 흔적도 적지 않다. 어쩌면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정서를 감추고, 객관적으로 사실들을 나열하려는 자세가, 오히려 더 큰 조롱이었는지는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가고, 다시 미국인들과 인디언들의 영토 분쟁이 치열했던 시기, 새로운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을 멸종시키는 대신 백인 사회로부터 물리적으로 격리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인디언 전체가 절멸할 것을 우려한 인도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포장과는 달리 철저히 인종주의가 깔려 있었고, 사회경제적 비용을 고려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백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겁탈하기 이전부터 이미 원주민들은 이 땅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고, 스스로를 부양했으며, 단일신이 아닌 수많은 신들과 교감하면서 그들의 존엄을 지켜왔다. 그런 원주민들을 경계밖으로 몰아내고, 문화적 자살을 감행하게끔 만드는 것이 어찌 인도주의적이며, 더 나아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녕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정신나간 나팔수들에게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구덩이를 경험하게 하리니.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영웅이었던 크리스토퍼 카슨은 "일반명령 15호"라는 나바호 원주민들을 향한 마지막 작전을 감행한다. 이 명령은 나바호 원주민들을 집단 거주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을 무력화하고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 골자다. 학살이라기보다는 항복이 그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철저히 파괴하고, 농작물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죽여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극단의 공포와 굶주림으로 몰아넣는 행위가 학살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서부개척 시대에 등장했던 수많은, 기독교라는 정신적 이념과 금이라는 물질적 신에 붙들린 백인들이 저질렀던 학살과 강탈에 비하면, 카슨이 실행한 "일반명령 15호"는 얼마쯤 피가 덜 흐르고, 살점이 덜 튀기는 작전이었다고 자위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전 존재와 원주민들이 가진 모든 것을 역사속에서 영원히 모욕하는 행위가 인도주의적인 처사였다고 항변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을 이유가 없다.  

미국의 역사는 말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들과의 전쟁은 종식되었으며, 그들은 안전한 집단 거주지역으로 옮겨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적어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부분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 문화에 포위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했다. 더 이상 그들의 푸른 산을 이야기할 수 없고, 초원 위의 버팔로를 그릴 수 없으며, 그들의 신을 존경할 수 없고, 술과 마약으로부터 자신들의 아이들을 지킬 수 없다. 미국은 총, 위스키, 성병, 돈, 기독교를 앞세워 게걸스레 서부의 모든 것들을 먹어치워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버젓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들먹이고,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전 지구의 방위대 역활을 하며 배를 불리고 있다.  

시대의 나팔수 오설리번이 말한 "자명한 운명"이라는 것이 역사에 존재한다면, 진실로 바라건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겪었던 "자명한 운명"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희생당했던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소수 민족들의 "자명한 운명이, 역사의 수레 바퀴 아래서 이제는 방향을 틀어 인종주의와 팽창주의로 무장한 모든 민족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게 있어 피와 천둥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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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0-01-0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평화시대'라는 명제 앞에 숨어 있는 '피와 천둥의 시대'.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제국주의적 속성인가요?
흐음, 지금도 지구촌 어디선가에서는 '피와 천둥의 시대'를 지나고 있겠지요.

참, 굿바이님.
책읽는부족 이달의 숙제는 해를 넘기셨네요. 하하

굿바이님의 새해, 모쪼록 밝게. 하하


굿바이 2010-01-05 18: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여전히 '피와 천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겠죠.
안다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누군가 말했었는데, 그 말이 요즘 참 절절합니다.

게으름과 밀린 일들을 핑계로 기한을 놓쳤습니다.
죽여주십시오ㅜ.ㅜ

굿바이 2010-01-0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아버지와 서부영화를 함께 보면서, 백인 총잡이들이 왠지 정의의 용사같아서
막 응원하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영화도 한심하고 저도 한심하고 그렇습니다.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바뀔 수 있다고 믿어왔던 시간들이 참 헛헛합니다.
나무의자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분노조차 할 수 없어 저는 자해중입니다.

후니마미 2010-01-08 20:1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 나무의자가 저랑 같은 사람인 거 아시죠? ㅎㅎ
오래전에 저도 알라딘에 흔적이 남겼었더라구요